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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이론

그들도 파티를 망치고 싶어하진 않는다

 

“중앙은행이 할 일은 파티가 막 시작될 때 펀치보울(punch bowl)을 가져가버리는 일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아홉 번째 의장으로 가장 오랫동안(1951년 4월부터 1970년 1월까지) 연준을 이끈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William McChesney Martin)의 말이다. 중앙은행은 굳이 파티의 흥을 깨려 할 만큼 심술궂은 존재란 말일까? 달콤한 펀치(술이 섞인 파티 음료)에 모두가 기분 좋게 취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일까? 카푸친 씨는 중앙은행 수장들이 한 마디씩 던지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들을 언론이 그토록 대서특필하는 까닭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암호 같은 그들의 언어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결코 흘려 듣지 않고 곱씹어 보려 애쓴다.

 

 

앨런 그린스펀(Allen Greenspan)은 18년 이상(1987년 8월부터 2006년 1월까지) 연준을 이끌며 미국과 글로벌 경제를 조율한 마에스트로(maestro)였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이런 수식어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는 차라리 신이었다.


실제로 금융위기를 넘는 그의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돼 맞은 블랙먼데이(Black Monday, 1987년 10월 19일)의 주가 대폭락, 1998년 러시아 디폴트(default, 채무상환불능)와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붕괴, 2000~2001년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진 데 따른 충격을 거뜬히 넘겼다. 그린스펀 재임 기간 중 미국 경제는 인플레이션이 거의 자취를 감춘 가운데 역사상 가장 긴 두 번의 경기확장을 구가한 ‘대안정(Great Moderation)’의 시기였다. (침체는 아주 약하게 두 번만 겪었다.)


2007년 9월 18일 뉴욕에서 출판 사인회를 마친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에게 참석자들이 지폐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1997년 한 잡지에 이렇게 썼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실업률을 예측하는 간단한 모형이 여기에 있다. 그린스펀이 원하는 실업률에 그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한 랜덤 오차(random error)를 더하고 빼면 된다.” 결국 그린스펀이 원하는 대로 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거란 이야기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였다면 크루그먼은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린스펀이 신이 아니라는 게 너무나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그린스펀 신화는 무참히 깨졌다. 그린스펀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커다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한낱 인간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위기를 넘으면서 너무 낮은 금리를 너무 오래 끌고 가 자산시장 거품과 글로벌 경제의 불균형을 방치했고 이는 결국 더 큰 위기를 불러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이도 있다. 인플레이션이 낮아진 건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미국의 성장률이 유럽이나 일본보다 높았던 건 인구 증가나 노동시장 유연성과 같은 구조적 요인 때문이지 그의 통화정책 덕분으로 돌리기는 어렵다는 시각이다.
[그린스펀 자신도 글로벌 디스인플레이션 압력(disinflationary pressure) 덕분에 인플레이션과 싸우기가 쉬웠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자서전(The Age of Turbulence-Adventures in a New World)에서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가 세계 경제를 바꾼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옛 공산권에서 글로벌 경제로 값싼 노동력이 쏟아져 나오면서 임금과 물가 하락의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린스펀 풋과 헬리콥터 벤

그린스펀은 파티장의 펀치보울을 치워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과감하게 금리를 내리며 흥을 깨지 않으려 애썼다. 언론은 위기 때마다 되풀이되는 연준의 구제조치를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으로 일컬었다. ‘풋’은 풋옵션(put option)을 뜻한다. 풋옵션은 자산 가격이 떨어질 때 손실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계약이다. 투자자들은 위기가 닥치면 으레 그린스펀이 금리를 내려 손실을 막아 줄 걸로 기대했다. 그럴수록 투자자들은 더욱 무모하게 리스크를 안았다. 그린스펀 풋이 투자자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부추긴 것이다.

 

그린스펀 시대에는 중앙은행이 시장의 큰 흐름을 거스르는(leaning against wind) 통화정책을 펼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갈 때가 많았다. 그린스펀은 특히 주택시장이나 주식시장의 거품을 터트리기 위해 통화정책을 쓰는 건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자산 가격 상승이 인플레이션 압력이 되지 않는 한 중앙은행은 자산시장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르느와르 [선상파티]


그린스펀 독트린(Greenspan doctrine)으로 불리게 된 그의 논리는 이렇다. ‘자산시장 거품은 사후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겠지만 미리 알아보기는 어렵다. 설사 거품을 알아볼 수 있더라도 금리를 올려 선제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렵다. 금리는 자산시장의 거품을 다스리기에는 너무 무딘 무기다. 자산 가격 상승세를 꺾을 만큼 큰 폭으로 금리를 올리면 경제 전체가 가라앉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절로 꺼지기를 기다렸다 사후적으로 충격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펴는 게 안전하다.’ 이는 집값이나 주식값이 오를 때는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떨어질 때는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리는 비대칭적(asymmetric) 통화정책이라는 비판이 많다. (연준은 자산 가격이 오를 때는 천천히 오르고 떨어질 때는 급격히 추락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지금의 벤 버냉키(Ben Bernanke) 연준 의장은 2006년 부시 대통령 때 그린스펀의 뒤를 이어 의장에 올랐고 오바마 대통령의 재지명을 받아 2010년 2월 두 번째 4년 임기를 시작했다. 프린스턴대 교수 출신으로 어떤 전임자들보다 학문적 백그라운드가 든든한 그는 시장의 효율성을 굳게 믿는다. 그린스펀 때부터 연준의 통화정책에 지적 기반을 제공했던 그는 자산 거품을 막기 위해 통화정책을 쓰는 데 대해 그린스펀보다 더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는 마치 “큰 망치로 뇌수술을 하는 것(brain surgery with a sledgehammer)과 같다”고 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을 깊이 연구한 버냉키는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데 남다른 과단성과 창의력을 발휘했다. 2007년 9월 5.25%였던 단기기준금리를 15개월 새 10차례나 내려 제로수준으로 낮췄다. 명목금리를 더 이상 낮추기 어렵게 되자 국채를 비롯한 다양한 금융자산을 사들이거나 담보로 잡고 돈을 푸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썼다. 그런 그를 시장에서는 ‘헬리콥터 벤’으로 묘사했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대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말이다.

 

 

메스 대신 큰 망치로 뇌수술을 할 수 없다는 연준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이나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을 비롯한 많은 중앙은행들이 ‘자산 거품에 대해 메스 대신 망치를 써서는 안 된다’는 연준과 생각을 달리 한다. 머빈 킹(Mervyn King) 영국은행 총재는 자산가격이 오를 때는 경우에 따라 인플레이션 예상치가 목표 범위 안에 있더라도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클로드 트리셰(Jean-Claude Trichet) ECB 총재도 인플레이션은 낮더라도 자산시장 붐에 대응해 긴축을 해야 할 때가 있다고 본다. 이들은 긴축에 따른 경제적 비용은 거품 붕괴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보험료로 생각한다. 


중앙은행들은 자산시장 거품에 대한 태도와 대응전략에서만 차이를 보이는 게 아니다. 중앙은행으로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지표에 주목하면서 어떤 식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대공황을 겪었던 미국 중앙은행은 물가안정뿐만 아니라 성장과 고용을 중시한다. 이에 비해 초인플레이션의 기억이 남아 있는 독일이 주도해 설립한 ECB는 물가안정에만 주력한다. 연준은 통화정책을 운용할 때 소비자물가 상승률만 쳐다보는 데 비해 ECB는 인플레이션뿐만 아니라 통화량 지표도 중시한다. (연준은 통화량 지표를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2006년에는 넓은 의미의 통화량 지표인 M3 통계를 아예 없애버렸을 정도다.)

 

그리스 재정위기가 고조된 2010년 2월 16일 EU 경제·재무이사회에 참석한 ECB 장클로드 트리세 총재(左)와
루카스 파파데모스 부총재(왼쪽사진) 2010년 2월 24일 미국 하원 금융위원회에 나온 벤 버냉키 연준 의장(오른쪽사진)

 

 

ECB의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 지표뿐만 아니라 통화량과 신용 지표를 함께 고려하는 체제(two-pillar system)다. 단기적인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가늠하기 위한 경제적 요인(economic pillar)과 중장기적인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점검하기 위한 통화적 요인(monetary pillar)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통화증가율이 높은 나라가 인플레이션도 높으며, 자산 거품은 언제나 과잉 유동성과 함께 간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카푸친 씨는 그들의 암호 같은 언어를 해독하려 애쓴다

카푸친 씨는 연준 의장이나 ECB 총재 같은 딴 세상 사람들이 외계인의 언어보다 난해한 말을 쏟아낼 때마다 골치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음식값과 옷값, 집값과 주식값은 물론 카푸친 씨의 몸값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지려고 애쓴다. 그들의 생각과 스타일을 이해하는 게 생각만큼 어려운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카푸친 씨도 그들이 언제 파티를 멈추려 할지, 언제 다시 시작하려 할지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