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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헤지펀드가 온다]⑤ 국내 들어온 헤지펀드 득과 실

생소하기만 하던 헤지펀드(hedge fund)라는 용어가 귀에 익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8년 미국계 헤지펀드인 론스타펀드가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캠코)의 부실채권을 인수하면서부터다. 대규모 부실채권 투자로 배를 불린 론스타는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하며 국내 시장에 확실히 각인된다.

지난해 11월. 하나금융지주는 론스타와 외환은행 보유 지분(51.02%)을 4조6888억원에 매입하는 본계약을 체결했다. 론스타는 이미 배당과 일부 지분 매각을 통해 2조4058억원을 벌어들인 후였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투입한 돈이 2조1548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론스타가 거두어가는 돈은 5조원에 육박한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국내 금융시장에 적지않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금전적인 손실은 차치하더라도 ‘외환은행 헐값 매각 논란’, ‘먹튀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국내 투자자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론스타는 국내 기업과 금융 당국, 투자자들로 하여금 헤지펀드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해외 헤지펀드 입장에서도 더는 한국은 호락호락한 시장이 아니다.

◆ ‘백문불여일견’…쓰라린 경험이 약(藥)으로

지난 9일. 금융권의 시선은 다시 한 번 론스타에 모였다. 이날은 올해 1분기 배당금을 정하는 외환은행의 이사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외환은행 이사회는 3시간 넘는 회의 끝에 분기 배당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초 업계에서는 외환은행 이사회를 장악한 론스타가 주당 약 100원의 배당을 시행할 것으로 전망했었다.

절대 수익을 추구하는 헤지펀드인 론스타는 그간 배당을 통한 고수익 달성 원칙을 고수해왔다. 지난해 2분기와 3분기, 4분기에도 그랬다. 여타 주주들의 반발에도 론스타는 2010년 말까지 세전 기준으로 배당금으로만 1조2130억원을 챙겨갔다. 업계 전문가들은 론스타의 이번 행보를 두고 ‘외환은행 지분 매각을 앞두고 론스타가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금융 업계 관계자는 “론스타는 배당 수익 확보보다 외환은행 지분 매각이 더욱 시급한 문제”라며 “현 상황에서 높은 배당에 나섰다가 혹시 모를 잡음에 휘말릴 바에야 아예 배당을 포기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IB(투자은행) 업계의 한 관계자는 “론스타가 대주주 적격성 논란으로 번번이 지분 매각에 실패한 것은 한국 시장이 그만큼 헤지펀드에 적응해 왔다는 방증”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의 삿포로 맥주와의 경영권 분쟁으로 유명한 미국계 헤지펀드 스틸 파트너스는 국내에서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다. 2006년 스틸 파트너스는 글로벌 기업 사냥꾼으로 알려진 칼 아이칸의 아이칸 파트너스와 공동으로 KT&G의 경영권을 협공했다. 당시 스틸 파트너스와 아이칸 파트너스가 보유했던 지분은 각각 2.81%와 4.87%. 자칫 경영권이 넘어갈 위기에 봉착했던 KT&G는 대규모 주주 환원책으로 대응했다.

배당과 자사주 소각에 2조8000억원을 투입하는 환원책에 당장 아이칸 파트너스는 경영권 공격을 취소했다. KT&G는 전례 없는 배당에 나서기는 했으나, 아이칸 파트너스와 스틸 파트너스의 공조를 와해시킴으로써 경영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올해 1분기 말 기준으로 미국 투자자문사인 라자드 에셋 매니지먼트는 특별관계자의 지분을 합쳐 KT&G의 지분 7.73%를 보유하고 있다. 최대주주인 중소기업은행의 지분 7.45%를 넘는 수치다. 하지만 라자드에셋 측은 단순투자 목적임을 분명히 밝힌 상태다.

◆ 헤지펀드 기법 배워 코스닥 시장도 진화

헤지펀드가 반드시 대규모의 투자에만 나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헤지펀드는 돈이 된다 싶으면 중소업체를 대상으로 한 투자도 서슴지 않는다. 코스닥 시장에서 종종 출연하는 피터백 앤 파트너스나 DKR사운드쇼어 오아시스 홀딩펀드, 이볼루션 캐피탈매니지먼트 등이 헤지펀드로 분류된다. 이들은 최신 금융기법을 동원해 코스닥 기업과의 계약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겨왔다. 이에 개별 기업 역시 헤지펀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대응에 나서고 있다.

코스닥 상장업체인 A사는 지난해 기업 간 인수·합병(M&A) 매물로 시장에 나왔다가 매각에 실패했다. 최대주주 변경 작업까지 마무리되면서 무난할 것 같던 M&A는 인수자 측의 갑작스러운 의사 철회로 결렬됐다. A사가 자신들도 모르게 보유하고 있던 변종 파생상품이 문제가 됐다. 외국계 헤지펀드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변종 파생상품은 회사가 감자(減資)를 실시하는 경우에도 행사가격이나 전환가액이 변하지 않아, 사채권자가 감자비율만큼 폭리를 취할 수 있는 상품이다.

지난해 7월 금융투자협회는 CB와 BW의 특성에 따른 수탁계약서 표준안을 보강한 '표준무보증사채 수탁계약서' 개정 추진안을 발표했다. 변종사채의 행사가액 조정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통해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였다. 이른바 ‘황금 CB(전환사채)’ 또는 ‘황금 BW(신주인수권부사채)’로 불리는 변종 파생상품의 거래가 성행하면서 행사가액을 놓고 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헤지펀드의 유입은 코스닥 상장사들이 용이한 자금 조달 방법을 배우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헤지펀드들이 기업에 투자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의 하나가 분리형 BW 투자다. 분리형 BW는 회사채와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인 워런트를 분리해 따로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채권자는 BW 인수 후 워런트만 떼어 판매함으로써 사채 인수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최대주주는 워런트를 매입해 싼값에 지분을 확대할 수 있다.

코스닥 상장사의 한 관계자는 “과거 코스닥 기업들이 자금 조달을 위해 애용하던 방법인 꺾기는 일종의 선(先)이자를 떼고 자금을 빌리는 셈이어서 기업에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라며 “더욱이 한국거래소까지 꺾기 단속에 나설 조짐을 보이면서 위축됐던 자금 조달 시장이 분리형 BW 거래를 통해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 전했다.

코스닥 시장에서 M&A 전문가로 활동 중인 관계자는 “코스닥 시장이 활성화되는 데 있어 변종 파생상품이나 분리형 BW와 같은 새로운 금융 기법들이 도움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라며 “그러나 새로운 금융 기법이 시장에 정착되기까지는 일정 기간이 소요되는 만큼, 금융 당국의 안전장치 마련이 필요할 때”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