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街도 놀랐다 10억달러 굴려 40% 수익낸 남자
웨스트포인트서…
“시간 너무 느리게 간다”용산서 3년 복무후 월가로 금융위기때 대체투자 적중
펀드매니저로…
세계 최대 연기금인 캘리포니아 공무원퇴직연금 한국 사학·군인 연금도 고객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의 대표적인 금융빌딩 '1330 아메리카 애비뉴(Avenue)'.6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10명의 금융 전문가가 일하는 790㎡ 크기의 벨스타그룹 사무실이 펼쳐진다. 그룹 대표인 재미교포 1.5세 대니얼 윤(44)이 두툼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월가의 한국계 금융인 중 젊은 대표주자로 정글 같은 헤지펀드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서 지난해 평균 10억달러의 자산을 굴렸고, 40%의 수익을 냈다.
벨스타그룹 금융 전문가들은 월가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엘리트들이다. 시미나 파카슈(50) 최고투자책임자(CIO)의 경우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프린스턴대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런던대 박사, JP모간과 베어스턴스의 수석 매니징디렉터(MD), 실버백자산운용의 최고 포트폴리오전략가를 역임했다.
금융위기 이후 다른 헤지펀드들이 반 토막 손실을 낼 때 그의 회사가 꽤 좋은 수익을 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세계 최대 연·기금인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퇴직연금(캘퍼스)과 한국의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이 돈을 맡겼다. 7000여개 헤지펀드가 난립하는 월가에서 벨스타그룹은 10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운용하는 100위권 회사로 성장했다.
- ▲ 미국 월가의 헤지펀드 벨스타그룹의 대니얼 윤 대표가 지난달 뉴욕 사무실과 서울 파크하얏트 호텔에서 본지 기자를 만났다. 그는“내가 떠날 때 베트남보다도 못살던‘아버지의 나라’한국이 이렇게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사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미 육군 장교로
윤 대표는 여섯 살 때이던 1973년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의 1인당 소득이 베트남에도 못 미치던 시대였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던 순간 모든 게 크고 신기했다. 특히 에스컬레이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낯선 타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서울대를 나온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간판과 포스터를 그려 생활비를 벌었고, 어머니는 야간 간호사로 일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버지다.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고,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어요. 평소 대화라고 해봐야 '이거 해라', '저거 하지마' 정도였지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는 차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긴 대화를 나눴어요. 아버지는 '내 꿈을 이뤄준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높이 날 수 있도록 내가 작은 공항이 되어 주겠다'고 말했어요. 나 같은 교포 1.5세들은 부모들이 참 많은 희생을 했죠." 아버지 얘기를 꺼낼 때마다 이 건장한 중년 남자의 눈시울이 자주 붉어졌다.
웨스트포인트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990년부터 3년간 용산 미군기지에서 군 복무를 한 뒤 의무 복무기간을 채우자마자 펀드매니저로 변신했다. 그는 "훈련받는 것은 즐거웠지만 군대에서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고 했다. 마침 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MBA 출신들 외에 다양한 경력과 전공을 가진 이들을 찾는 중이었다. 골드만삭스에서 1년을 근무한 뒤 리먼 브러더스로 자리를 옮겨 부사장까지 오른 그는 1998년 보이저(Voyager)라는 작은 헤지펀드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 ▲ 지난해 2월부터 벨스타그룹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애슐리 호멜씨. 그는 “(여기는) 팀워크를 강조하는 좋은 직장”이라고 말했다. /뉴욕=박종세 특파원
◆월가 정글에 뛰어들다
낯선 헤지펀드시장에서 처음부터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해 대형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파산하면서 헤지펀드시장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동안 모아 왔던 전 재산을 사업에 쏟아 부으며 벼랑 끝까지 몰린 적도 있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카드 잔고가 부족해 샀던 물건을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했다
200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6개월간 휴식을 취하면서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소수 개인 투자자의 자금을 운용하는 보이저 대신 연·기금 같은 기관 자금을 운용하는 벨스타그룹을 세웠다. 공개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수많은 헤지펀드를 도산으로 몰아넣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주식이나 파생상품 같은 위험자산 대신 자산유동화증권(ABS) 같은 대체 투자에 주력한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한국 고맙고 자랑스러워"
'할아버지의 나라'를 잊지 않게 하려고 그는 일곱 살, 다섯 살 된 아이들에게 한국어 개인 교습을 시킨다.
윤 대표는 2008년 한국계 금융인을 대표해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한국이 아니었다면 그의 회사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벨스타그룹이 운용하는 자금 중 절반 정도가 한국의 연·기금들이 맡긴 돈이다. 그는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가 이렇게 빨리 성장해 전 세계에 투자할 만큼 부자 나라가 됐다는 게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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