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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초점] 채권자의 배로 갈아타라

세상은 공평하다. 21세기의 첫 번째 10년은 채무자의 시대였다. 그러나 두 번째 10년은 채권자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큰소리쳤던 미국, 아일랜드, 두바이를 보라. 한결같이 남의 돈 무서운 줄 몰랐던 나라들이다. 그리고 요즘 누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지를 보라. 개미처럼 일하고 저축했던 중국독일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는 은행 빚내서 집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다. 빚내서 집 산 사람들이 거리로 쫓겨나고, 금리가 오를까 안절부절못하는 세상이 됐다.

세계의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변하는 시기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이런 중대한 시기에 승자의 배에서 패자의 배로 옮겨 타려 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가 허리띠를 조이고 빚을 줄이는데, 한국의 빚은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 공공부채도, 가계부채도 마찬가지다.

남유럽이 국가부채 때문에 위기를 겪고 있는데, 한국은 장차 가계부채로 위기를 겪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은 규모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이밍이 매우 나쁘다는 게 불길하다. 무엇보다 전 세계적으로 물가와 금리가 오르는 시점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지난 몇 년간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도하게 통화를 찍고 정부 지출을 늘리는 위험한 도박을 벌였다. 그 결과로 세계적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조짐이 올 초부터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인플레이션 시대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물가가 오르면 금리도 따라 오를 것이고, 빚을 진 가구에는 큰 짐이 될 것이다. 한국은 외국과 달리 주택시장에 큰 조정이 없었다는 점도 좋지 않은 조짐이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 국내 주택시장이 뒤늦게 급락한다면 빚내서 집 산 이들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다.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 출신의 저자가 펴낸 '부채의 습격'이란 책은 가계부채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국내 주택담보대출의 90% 이상이 변동금리 대출이라는 점을 들어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라고 표현했다. 보통 주택담보대출은 일정 기간 동안은 이자만 내다가, 그 뒤엔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국내 은행들은 2008년 10월에 이 거치기간을 2~5년 연장해 줬는데, 그렇게 연장한 만기가 2011~2012년에 집중된다.

'질량 불변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부채 불변의 법칙'도 있다. 부채의 총량은 크게 보면 변하지 않는다. 주머니만 바꿔 찰 뿐이다. 외환위기는 과다한 기업 부채가 발단이 됐다. 그 뒤 기업들이 부채를 줄이자 돈 굴릴 데가 없어진 은행들은 가계 대출을 늘렸다. 처음에는 신용카드를 마구 발급한 뒤 카드 대출을 해주더니 카드 대란이 터진 뒤엔 주택담보대출로 전환했다. 정부는 IT 버블 붕괴 이후 내수를 살리기 위해 이를 방조하고 때로는 조장했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가 빚을 부끄러워하는 사회에서 빚 없으면 팔불출(八不出)인 사회로 바뀐 것은 정부와 은행의 합작품이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채무자의 배가 타이타닉처럼 가라앉고 있다. 지금이라도 채권자의 배로 갈아타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우선 마이너스 대출을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자. 정부는 리먼 브러더스 파산에 1년 10개월 앞서 DTI나 LTV와 같은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내놓아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을 비켜간 것처럼 이번에도 선제적이고 창의적인 규제를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