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러 코웬 교수 "성장 정체가 경제위기를 초래"… 뜨거운 논쟁을 부르다
미국 경제를 위기로 내몬 것은 소득 불평등인가. 아니면 이제 성장 자체가 한계에 부딪힌 것인가. 미국 경제학자들 사이에 책 한 권이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책 제목은 '거대한 침체(the Great Stagnation)'로, 미국의 파워블로거인 조지메이슨대학 타일러 코웬(Tyler Cowen)교수가 지난 1월 전자책으로 펴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은 '올해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코웬 교수의 책을 앞다퉈 소개하고 나섰다. 학계뿐 아니라 인터넷 블로그·커뮤니티 등에서도 찬반이 갈리고 있다. 이른바 거대 침체(the Great Stagnation)냐, 거대 격차(the Great Divergence)냐의 논쟁이다.
책의 요점은 이렇다. '미국 경제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를 겪었고,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 더블딥 리세션(경기가 회복하는 듯 하다 다시 위축되는 것) 얘기마저 떠돈다. 미국 경제가 이 지경이 된 근본 원인은 우리가 지난 300년간 '낮게 달린 과실'을 다 따먹었기 때문이다.'
- ▲ 조지메이슨대학 타일러 코웬 교수는 최신작 ‘the Great Stagnation(거대한 침체)’에서“경제위기의 원인은 소득불평등이 아니라 성장을 이끌 만한 기술 혁신이 거대한 침체기에 들어섰다는 데 있다”고 했다. /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낮게 달린 과실' 다 따먹었다
전기, 자동차, 대량생산 체계…
엄청난 고속성장 이루다가 1970년대 이후 '정체상태'
인터넷이 고용 창출은 못한다
경제활동 패턴만 바뀌었을 뿐
아이디어로 소수만 '떼돈'… 사라진 일자리가 더 많다
해법은 '기술 혁신을 통한 성장'
'낮게 달린 과실'을 창출
성장의 파이를 늘려야 소득 불균형 문제도 풀릴 것
낮게 달린 과실(low-hanging fruit)이란 쉽게 손에 닿아 빨리 따먹을 수 있는 자원을 말한다. 미국이 17세기 이후 누려온 '낮게 달린 과실'은 비옥하고 광활한 땅, 풍부한 노동력과 교육기회의 확대, 기술 혁신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고속 성장을 이뤄온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가장 큰 이유는 기술 혁신이 거대한 침체기에 들어섰다는 데 있다. 전기, 자동차, 대량 생산 시스템 등 20세기 초반까지 사람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고 사회 전체에 엄청난 부를 안겨줬던 기술이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거대한 침체기'로 요약되는 코웬 교수의 주장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시각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많은 수의 학자들은 경제 문제의 원인을 소득 불균형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자인 UC버클리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경제 성장의 보상 대부분이 상류층에만 돌아가는 등 소득 분배가 왜곡되면서, 중산층이 붕괴하고 빈곤층이 증가했다"고 했다. 소득 불균형을 해결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경고다.
실제로 미국 사회에서 소득 격차에 대한 불만은 목 끝까지 차올랐다. 2008년 OECD 국가 중 소득 불균형이 가장 심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인의 최상위 1%의 소득은 1976년 전체 9%를 차지했지만 그 수치는 2007년에는 24%로 치솟았다.
금융위기에 대해서도 주류 학자들은 소득 불평등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소득 불평등으로 인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 정치권이 가계 대출 완화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의 돈으로 집과 차를 사면서 빚잔치를 했고 그 과정에서 경제의 기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코웬 교수는 미국 경제의 문제를 분배가 아닌 '성장'의 시각으로 설명했고, 이 지점에서 논쟁이 뜨겁게 타오른 것이다. 그는 금융위기의 원인 역시 '미국인들이 자신이 실제보다 더 부자라고 생각한 데 있다'고 요약한다. 미국인들이 성장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과신 위에 돈을 굴릴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코웬 교수의 입장에서 소득 격차는 경제문제의 원인이 아니다. '낮게 달린 과실'을 다 따먹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1970년대 이후부터, 고속 성장을 이끌만한 혁신적인 기술은 갈수록 희소해지고 있다. 그나마 성취한 대부분의 기술혁신은 개인의 부를 증대하는 쪽에 치우쳐 왔다. 복잡한 금융 상품, 트위터·페이스북은 비행기나 통신처럼 공공재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경제 파급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몇몇 소수에게만 엄청난 부가 집중되고 나머지는 소외된다.
코웬 교수는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인터넷마저 소득 분배 면에서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을 통해 구인·구직활동이 이뤄지고, 물건을 사고파는 등 경제활동의 패턴이 바뀌고 있지만 자동차 산업처럼 수십만 일자리가 생겨나진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트위터가 고용하고 있는 인원은 고작 300명이다. 구글은 2만 명, 페이스북은 1700명, 이베이는 1만6400명 정도다. 아이패드가 약 1만4000개의 새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인터넷의 탄생으로 사라진 일자리는 더 많다.
- ▲ 타일러 코웬 교수가 전자책으로 펴낸 ‘거대한 침체(the Great Stagnation)’
기술 혁신에 의한 성장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전체적인 소득 수준도 예전만 못하다. 1947년 가계중간소득은 2만1771달러로, 1973년에는 4만4381달러로 뛰었다. 약 30년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그러나 2004년에는 그 수치가 5만4061달러에 불과했다. 1973년 이후 30년간 증가율이 22%에 그친 것이다. 코웬 교수는 "미국의 좌파(the American left)는 문제의 원인을 불평등 탓으로 돌리지만, 근본 원인은 우리가 거대한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경제문제의 원인을 보는 시각차는 해법을 내놓는 과정에서도 반복된다. 문제의 원인을 소득격차에서 찾는 쪽은 정부가 나서서 부의 재분배를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코웬 교수는 기술 혁신을 통해 성장의 파이를 늘리자고 제안한다. '낮게 달린 과실(기술 혁신)'을 창출할 때야 비로소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 불균형도 해결된다는 것이다.
책 한 권이 일으킨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거대한 침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를 보다 근본적으로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코웬 교수의 문제 제기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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