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

`경제적 9·11 테러` 겪은 미국인 투자도 "Back to the basic"

지난 1월 중순 쌀쌀한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두꺼운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은 금융위기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일선 은행 창구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주택 모기지론과 신용카드 발급이 주요 상담 메뉴였던 은행 지점을 이제는 목돈 만들기와 불리기가 관심인 고객들이 메우고 있다. 월스트리트 체이스 은행 지점에서 만난 한 고객은 "꾸준히 돈을 모으고, 모은 돈을 불리려고 왔다"고 말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저축캠페인이 떠올랐다.

티머시 윌리엄스 씨티은행 개인자산관리(Personal Wealth Management) 담당 부행장은 "기본으로 돌아가는(Back to the basic) 것이 최근 투자 패턴"이라고 했다.

글로벌 위기 진원지에서 미국 개인투자자들은 지금 `신중하게, 아는 것에만, 길게, 직접 계획을 세우는` 새로운 투자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 꼼꼼하게 듣고, 깐깐하게 투자

= 월스트리트 현지 금융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투자 흐름 변화를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현금 선호 경향이다. 만약에 대비한 여윳돈 준비 때문에 `현금ㆍ채권ㆍ주식ㆍ부동산` 등 전통적인 포트폴리오 구성에서 5~10%에 불과했던 현금성 자산 비중이 높아졌다.

둘째, 같은 맥락에서 채권 선호도도 강해졌다. 금리가 낮아 채권 수익률은 그다지 높지 않고, 경기 회복이 가시화할 때 채권값 하락이 염려되지만 안전자산이라는 측면을 선호하고 있다. 달러 약세로 미국 국공채 대체물인 엔화 채권도 인기다.

셋째, 부동산이나 환차익 등 투자 대상이 다양해졌다. 여유자금이 충분한 부유층을 중심으로 금융위기 회복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부동산과 환투자가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넷째, 은퇴 시점이 늦춰지면서 연금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특히 1940년대 후반~1950년대에 태어난 초반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 시기에 접어들자 연금보험 가입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세계은행(WB) 보고서는 "평균수명 연장, 베이비부머 은퇴, 미국 국가재정 불안 등으로 개인이 직접 노후를 챙기는 트렌드가 강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은퇴를 앞둔 세대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트렌드는 투자자들이 `조언에 대한 질적 차별성`을 따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모기지론이나 신용카드, 펀드 등 단순히 상품을 추천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투자전략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많은 미국인은 조언에 목말라 있다(hungry for advice)"며 "최근에는 아예 은퇴 이후까지 로드맵을 세워 달라는 고객들도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 때문에 미국 은행들은 직원 교육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금융위기로 많은 사람이 금융에 눈을 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포트폴리오도 "내가 직접 짠다"

= 조언 범위가 곧바로 투자 일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조언만 깊게 듣고, 결정은 직접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미국 투자자들 눈이 한층 까다로워졌다는 얘기다.

평균 수익률이 높아 관성적으로 주식에 투자하곤 했던 미국 투자자들은 이제 직접 투자 포트폴리오를 짜고 이를 전문가에게 검증 받는다. 계층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현지 금융인들은 "사람들이 위기를 경험하고 나서 투자를 이해하고자 원하게 됐다. 자기 돈이 어디에 투자되는지 알 수 있는 상품을 원한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이 자기결정권을 확대하는 추세는 연금보험 상품(Annuitized Insurance) 인기에서도 확인된다. 일부 목돈을 금융사에 맡기고, 그 목돈을 사망 시까지 나눠서 받는 상품이다.

최근 인기인 연금보험 상품은 회사가 아닌 개인이 선택해 가입해야 한다. 회사 연금만으로는 노후 대비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글로벌 위기 전까지 `사회보장`을 믿었던 미국인들이 안락한 노후를 보내려면 내 주머니를 더 믿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미국 베이비부머 세대(1946~1964년 출생) 중 1946년생들이 처음 은퇴를 맞이해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씨티은행 등 일부 금융사에선 우리나라 역모기지론과 형태가 비슷한 연금 상품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 돈 쓸줄만 알던 미국인, 돈 모으기 시작했다…저축률 한국 두 배

= "미국인들이 겁을 많이 먹었다. 일반 투자자들은 쌓아놓은 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2%대에 불과하던 저축률이 불과 몇 년 새 6%에 육박하게 된 이유다."

미국인의 `금융위기 트라우마`는 투자 패턴을 극명하게 뒤바꿔 놓았다. 저축률은 높아졌고, 안전자산으로 자부하던 달러는 푸대접을 받게 됐다. 증시 회복기에도 개별 종목 투자보다는 안전 지향적인 지수 투자에 눈을 돌렸다.

그동안 미국인에게 재테크란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닌 `노후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아시아인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재테크를 하는 것과 달리 미국인은 은퇴 이후 삶을 위해 돈을 모으는 성향이 짙었다.

금융위기 이전에는 `미래에 대한 자신감(confidence for the future)`으로 재테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 굳이 돈을 모으지 않더라도 퇴직 후 안락한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키웠다. 미국인이 저축에 다시 눈을 뜨게 됐다. 실업자가 양산되고, 부실 채권이 봇물처럼 늘어나면서 본인 생활 역시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가 직업을 잃고 상환 불능 상태에 빠졌다. 자신 또는 이웃이 뼈저리게 겪은 파산 경험이 저축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웠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07년 2.1%였던 미국 저축률은 2008년 4.1%로 뛰었고 2009년 5.9%, 2010년 5.7% 등 줄곧 5% 후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2011년엔 6.0%, 2012년에는 6.1%로 올라설 전망이다.

조너선 클리멘츠 씨티은행 본부장은 "올해 미국 저축률이 6%를 상회할 것으로 보이고, 한동안 저축률 상승세가 지속될 전망"이라며 "언제든 위기가 다시 올 수 있다는 경계심, 은퇴 이후에 대한 관심이 만든 트렌드"라고 말했다.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 상담원은 "미국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 수준을 벗어난 것으로 판단되지만 아직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저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여전히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회복세인 미국 증시에서도 개별 종목이 아닌 상장지수펀드(ETF)가 각광받고 있다. 상승하는 주식시장 흐름을 타면서도 위험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목돈이 들지 않고, 수익률도 시시각각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ETF는 올해 미국 자산관리 시장에서 최고 인기 상품으로 뜨고 있다. 파생 상품보다 이해하기 쉽다는 강점도 있다.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양적 완화 정책에 따른 달러화 가치 하락 탓이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타국 통화에 대한 관심은 더 확산될 전망이다.

티머시 윌리엄스 씨티은행 부행장은 "ETF에 대한 관심이 늘고, 달러 대신 다른 통화에 대한 투자가 늘어난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미국은 수십 년간 경기 변동을 겪어왔고 이번 위기 역시 극복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