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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주식

또 개미들을 出口 삼겠다니

주식 투자 경력이 오래된 투자자들에게 2000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한국 주식 시장 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주가 폭락이 이때 벌어졌다. 2000년 3월 코스닥지수는 3000 가까이 올랐다가 미국의 IT 버블 붕괴와 더불어 무너졌다. 연말 지수는 최고치에 비해 80% 떨어진 525로 마감했다. IMF 외환 위기나 글로벌 금융 위기 때보다 더 급락했다.

이 비극적인 '코스닥 드라마'는 1999년 김대중 정부가 코스닥 등록 요건을 완화해 준 것이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벤처 활성화를 위해 문턱을 대폭 낮춰주니 자격 미달 업체들이 무더기로 코스닥에 입성해 시장을 어지럽혔다. 이 난장판을 청소하는 데 많은 비용과 고통이 뒤따랐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602개 기업이 상장했는데 이 중 38%가 상장폐지됐다. 소액주주 188만명이 24조7000억원의 피해를 봤다. 평범한 가장과 주부들이 주식 투자에 실패해 자살했다는 기사가 끊이질 않았다. 장기 침체에 빠진 코스닥시장은 2005년 한국거래소로 통합돼 오늘에 이르렀다.

불행했던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지만 그때의 코스닥 광풍(狂風)까지 미화될 줄은 몰랐다. 1세대 벤처기업가들을 중심으로 "그때가 좋았다"며 요즘 코스닥시장 분리를 외친다. 그 중심인물이 이민화 전 메디슨 회장이다. 2000년대 초 '벤처 신화(神話)'의 상징으로 통했지만 문어발식으로 벤처에 투자했다가 회사가 부도났던 그가 "코스닥은 2000년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다"며 과거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금융 당국도 이런 주장에 동조한다는 게 더 걱정스럽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코스닥 상장이 가능한 기업이 8000개 가까이 되는데 지난해 40개밖에 상장하지 못한 것은 역동성이 떨어진다는 증거"라고 했다. 임 위원장의 주도로 금융위는 코스닥 분리 방안을 추진 중이다.

코스닥을 분리해 상장 문턱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지는 간단하다. "벤처기업의 출구(出口)를 넓혀야 창업과 투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미 투자자들을 벤처의 출구로 삼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창업자 또는 소수의 초기 투자자가 갖고 있던 지분을 일반 대중에 파는 기업공개(IPO)와 상장에는 막중한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 전 세계 기업들이 몰리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 수는 3000개 남짓이다. 상장사가 1000개쯤 되는 코스닥은 한국의 경제 규모와 기업 생태계를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런데도 코스닥에 상장 가능한 기업이 8000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현재의 코스닥 상장 요건이 지나치게 느슨한 게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벤처 천국(天國)인 미국에서도 벤처 기업의 출구는 주로 인수·합병(M&A), 즉 전문가들끼리의 거래를 통해 이뤄진다. 벤처 투자는 위험 부담이 커서 개인 투자자에게 매우 불리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벤처를 살리겠다고 개미 투자자들을 출구 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15년 전에 똑똑히 목격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