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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알아듣기/영어한마디

나의 영어공부기⑦

[나의 영어공부기⑦]

대법원에서 연수대상자로 선정되더라도, 가고 싶은 학교에 지원해서 어드미션을 받는 것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 가장 부담되는 것은 personal statement, 즉 자소서다. 솔직히 처음엔 너무 부담되어서 한글로 쓴 다음 돈 주고 번역시키면 어떨까 하는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곧 맘을 고쳐먹었다. 그건 일종의 컨닝이다. 게다가 미국 대학에 그것도 학위 과정으로 공부하러 가면서 입시에 떨어질까봐 자기소개서 하나 자기 힘으로 안 쓸거면 갈 자격이 없는 거다. 목적이 무엇이든 글은 글이다. 글의 기본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진솔하게 쓰는 것. 유학 정보 자료에 있는 남들의 자기소개서는 읽지 않기로 했다. 틀에 갇힐까봐.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내 어설픈 영작문을 첨삭지도해 줄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 친구는 중학교때 같은 반이었는데, 미안하지만 성적 최상위권이거나 눈에 확 띄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부모님 따라 미국으로 중2때 이민을 갔다. 얘길 들으니 그는 진도 빠른 한국 교육과정 덕에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이차방정식을 척척 푸는 수학 천재(?)로 등극한 후 승승장구하여 초명문고로 진학하여 맷 데이먼과 동급생이었고, 하버드 수학과 졸업 후(역시 맷 데이먼과 하버드 동문) 하버드 MBA를 마치고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는 거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수학을 잘했다니 훌륭하긴 한데 그렇다고 글쓰기를 지도할 수 있을까? 하는 문과생의 이과생에 대한 편견.
그런데 이메일로 첫 초고를 써 보낸 후 온 그의 답장을 열어보고 감동했다. 우선 전체적으로는 과분할 만큼 칭찬을 구체적 포인트 집어가며 해 주어서 용기부터 심어 주고, 완곡하게 단어 하나, 구절 하나마다 영미권 문화에서의 뉘앙스의 차이를 알려주며 보다 나은 표현을 제안해 주더라. 이건 문학적인 소양이 아주 높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정성과 배려심에 더욱 감동했기도 했다. 물론 그 개인의 노력이 가장 훌륭하지만, 미국 교육의 장점도 엿볼 수 있다. 나중에 보니 역시 그는 중고교 시절 제인 오스틴, 토마스 하디, 셰익스피어, 코난 도일, 아가다 크리스티 등등의 전작품을 다 읽었더라. 대치동 학원 다니고 문제 푸느라 바쁜 환경이었으면 그럴 수 없었겠지. 고전을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여유와 인문학적 분위기가 지적 성장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그때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내 기본 실력 부족으로 어색한 부분, 세련되지 못한 표현도 보인다. 도리 없지. 단시간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1년 공부하러 가면서 너무 거창한 소리를 늘어놓아서 낯뜨겁기도 하다. 결국 자기를 어필해야 하는 자소서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증거다.

자소서는 연구하려는 주제를 서술하는 A파트와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B파트로 되어 있는데, 이 중 B파트를 올려 본다. 서두에 개인사가 좀 있어서 망설였는데, 누구나 소싯적 나름의 사연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라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되어 그냥 옮긴다.

When I was 11 years old, one of the most agonizing things in my life was that I had to lie. My mother was running a small business, and she sustained a big loss from a fraudulent customer. Creditors often made threatening calls to my mother. Whenever I received such calls, I had to lie about her absence, and having been taught to be honest, this was more agonizing than leaving our house with a small garden where I had planted rose bushes.

My mother passed away of cancer when I was 15 years old. And I immersed myself in literature and music in order to forget the sad reality. I read almost all the books in the school library, and every night I listened to Rachmaninoff and Beatles using an old audio cassette player.

In 1988, I became the highest scorer in the Korean National College Entrance Exam, and I was admitted to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Law. However, my success was followed by emptiness. I was not sure how much law could contribute to the happiness of people. These doubts led me to study poverty, discrimination, and environmental issues in Korea.

After college, I passed the National Judicial License Exam and I became a judge. From the early days as a judge, I realized how greatly law affects individuals’ life and how many people suffer without the protection of the law.

While in the Judicial Research and Training Institute, with some of my peers, I opened an online free legal advice program for needy people. Later on while working at the Seoul Administrative Court, I devoted myself to protecting individuals whose rights had been violated by the government. In 2001 as I became interested in the life of transgenders who suffer from contempt under the influence of Confucianism traditions, I wrote a paper advocating reassigning of legal genders for transgenders. As many judges began sympathizing with my advocacy, court decisions to permit legal gender reassignment to transgenders began to emerge starting late 2002.

In 2004, as I began working at the bankruptcy division of Seoul Central District Court, I became more interested in helping delinquent debtors. In the meantime, I read “The Two‐Income Trap” co‐authored by Professor Elizabeth Warren of Harvard Law School. Based on “The 2001 Consumer Bankruptcy Project” at Harvard, this book analyzes the causes of an increase in individual bankruptcy filings in the USA. I was moved by Professor Warren’s deep affection for people as well as her keen analysis which are permeated throughout the book. This book led me to apply for the Harvard Law School.

After reading Professor Warren’s book, I wrote an essay titled “What is Bankruptcy” in hopes of widely communicating the plight of debtors and the importance of bankruptcy process. This essay was featured in the Segye Daily, a nationwide newspaper, as a front‐page article of the “Society” news section. Subsequently, the article was reprinted in dozens of internet websites attracting a lot of attention from the public. Since then, I have responded to consulting requests from the media, the National Assembly, the Ministry of Justice and others interested in helping delinquent debtors.

Korea is scheduled to put the Bankruptcy Bill in operation. The bill adopts many of the features of the U.S. bankruptcy law. In this regard, exact understanding of the U.S. Bankruptcy Code and related laws could be very important. Without hesitation, I’m applying only to Harvard Law School in hopes of learning from the world’s top professors. After studying at Harvard and returning home, I will continue various activities such as authoring books, lecturing, and participating in the bankruptcy reform legislation.

I support an orphanage called “Gemma Home”. Many children are left there because their parents could not raise them due to poverty. Whenever I visit with them, I see myself of age 11. I had lost some of the most valuable things, but I overcame these challenges to achieve success. However, living happily ever after cannot be the end of my fairy tale. I’d like to utilize this small gift which God blessed me with in creating a world where all children can be happy.

다행히 하버드에서 입학허가서가 날아왔다. 그리고 이민가방 여러 개를 끌고 미국 땅을 밟았다. 초반의 부푼 가슴은 초기 정착기의 시행착오 속에 가라앉았다. 역시 언어는 단시간에 머리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동료 LL.M.(석사과정 학생)들 중 영어를 제일 못하는 것은 바로 필자였다.

LL.M.은 처음 법학을 공부하는 J.D.들과 달리 이미 각국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가진 학생들이다. 대부분 변호사 자격이 있고 이미 다양한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다. 다른 로스쿨에서 J.D.를 마친 후 특정 분야를 더 공부하고 싶어서 온 미국인 LL.M.도 있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온 친구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온 친구들은 미국인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인도, 필리핀, 싱가폴에서 온 친구들 역시 액센트는 각기 달랐지만 아무 문제 없이 자유롭게 미국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결국 한 중 일 3국 출신들이 가장 과묵할 수밖에. 그런데 그 중에도 어려서 외국 생활을 했던 친구들이 상당수 있었고 순수 토종에 나이 들어 뒤늦게 벼락치기로 영어 공부를 한 사람은 필자 뿐이었다.

평소 토론을 즐기는 성격이라 이 다양한 인재들과 토론하고 싶은 것이 천지인데 어휘력 부족으로 충분히 내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여 위축될 때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유창하고 세련된 표현을 구사하는 외국 친구들 앞에서 더듬거리며 단순한 표현으로 얘기하자니 내 의견 자체가 단순한 의견으로 전락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세미나 자리에 참석했는데 내 이름을 듣더니 다가와 말을 걸어 온 한 교수가 있었다. 내 personal statement를 읽었는데,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단다. 학생으로 입학 허가 심사를 할 것이 아니라 교수로 임용 여부 심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되더라는 조크를 던지는 그가 고맙긴 했지만, 먼 작은 나라에서 온 판사에 대한 과장된 격려로 느껴졌다.

동료 LL.M. 대부분이 영어 사용이 자유자재일 뿐 아니라, 각국에서 온 판사나 검사도 여러 명이고, 이미 국제기구에서 활약하던 친구, 일본 대장성 관료, 심지어 왕국의 공주님까지 있었다. 그들의 자소서는 깊이 있고 세련된 표현과 서구 문화권의 고전 인용 등으로 풍성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불쑥 물었다. 내 자소서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를. 답은 간단했다. 나라는 사람이 보이는 글이어서 좋았고, 그래서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새삼 깨달았다. 말이나 글은 결국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문법, 어휘, 발음, 세련된 표현 모두 중요하지만, 그 도구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생각, 마음이 더 중요하다. 만약 내가 의미 있는 정보나 의견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비록 더듬거리고 있더라도 상대는 인내심을 갖고 들어 줄 것이다. 반대로 유창한 척 떠들고 있지만 하나마나 한 소리에 불과하다면 상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다. 결국 컨텐츠가 중요하고, 진실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영어는 미국인, 영국인만의 언어가 아니었다. 인도 사람, 필리핀 사람, 중국 사람, 싱가폴 사람 모두 자기들 방식의 영어를 자신 있게 하고 있었고, 아무 문제 없이 미국인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미국 발음과 제스추어를 어설프게 흉내내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영어는 이제 세계인의 도구였다.

유감스럽지만 해외연수를 위한 벼락치기 준비기간, 그리고 1년간의 유학 생활 동안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내 영어실력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언어습득능력은 유소년기를 지나면 급속도로 저하되며, 단시간에 향상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으니 만족한다. 부족한 실력에도 감히 영어공부기를 쓴 것은 필자의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혹시라도 참고할 점이 있으실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애초에 2006년 당시 해외 연수를 준비하는 후배 판사들 참고하라고 법관용 게시판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쓴 글이라 부족함이 많았다.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용서를 바란다.

다음주부터는 하버드 로스쿨 연수기간 동안 느낀 점들을 적어 두었던 연수기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