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일본 대지진' 릴레이 현장 칼럼] [1] 日선 아직 '官民'이었다

고리야마(郡山)병원의 간호사는 울고 있었다. "환자들 식사가 하루치밖에 없어요. 빨리 지원해주지 않으면 모레부터 굶어야 합니다." 지원을 청해봤느냐고 물어봤다. "현청(縣廳)에 며칠 전부터 연락했어요. 그런데 말이 없어요. 여러분, 제발 도와주세요."

누마사키(68)씨는 이와테(岩手)현 야마다초초(山田町長)다. 우리 동장(洞長) 격인데 지진과 쓰나미로 마을이 잿더미가 된 후 사흘을 굶었다. 그 뒤 그가 먹은 건 '오니기리(주먹밥)'와 물뿐이다. 역시 지원을 청해봤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벌써부터 취했죠. 그런데 아직도…."

11일부터 18일까지 지진해일의 피해를 입은 일본 동북(東北)을 종횡하면서 숱한 사연을 목격했다. 하나같이 '불쌍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피난소의 60대 여성은 "모포 한 장뿐인데 너무 춥다"며 울었다. 80대 할아버지는 "오니기리 먹는 게 지겹다. 라면이 먹고 싶은데…"라며 울었다.

이런 이야기는 일본 언론에도 수없이 보도됐다. 사연을 다 들은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그런데 그뿐이었다. 힘내고 용기내려면 잘 먹고 잘 자야 하는데 돌아오는 건 공허한 '격려'다.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면 인간은 똑같아진다. 일본 이재민들은 추위 피하려 신문지를 배에 두른 뒤 그 위에 비닐을 감았다. 눈 녹인 물로 단수 때문에 막힌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궁상(窮狀)의 현장이었다.

세계적인 부국(富國)의 이면이 왜 이리 불쌍할까.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은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 13년 전 게이오대에서 연수했을 때부터 아는 한 일본인은 "공무원들은 지금 서류 기안하고 있을 것"이라며 냉소를 지었다.

일본의 현대 관료제, 즉 공무원제는 메이지유신 후 정립됐다. 140년 정도니 우리보다 역사가 배쯤 된다. 그 밑그림은 오쿠보 도시미쓰(大久保利通·1830~1878)가 그렸다. 그는 초(超)엘리트 관료의 어깨에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임무를 맡겼다.

"우리가 주도해야 일본이 잘 된다"는 이 '기관차'들은 이후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괴물이 됐다. 군림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개혁이 웬말인가, 매뉴얼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만다, 옆의 부서와 소통도 필요없다…. 지인의 설명은 이런 것이었다.

일본에 있는 8일간 신경 쓴 건 뭘 먹고, 어디서 자고, 무엇을 타고 움직이고, 휘발유는 어디서 파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1996년 12월 강원도 태백에서 보낸 며칠이 생각났다. 한겨울 무너진 탄광에 파묻힌 광부들이 살아나오길 바라는 하염없는 기다림이었다.

그 추위와 외로움을 동네 아낙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무쇠솥에 끓여준 국밥 한 그릇으로 이겨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나 중국 민항기가 김해 돛대산에 처박혔을 때도 이름모를 자원봉사자들이 공무원보다 먼저 나타났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공무원의 속성은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은 그들을 믿고 우리는 불신한다. 그런 순종의 결과가 지금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으니 알 수 없는 게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