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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과 39선… '운명의 1도'

 

38선과 39선… '운명의 1도'

2017년 12월 26일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눈 경계선이 하필이면 왜 북위 38도선이었을까. 가장 많이 알려진 얘기는 미국 영관급 장교들이 벽걸이 지도를 보고 즉흥적으로 결정했다는 설(說)이다. 현장에 있었던 한 장교는 훗날 “신중하지 못한 결정이었다”며 아쉬워했다. 그의 목격담을 들어보자.


일본의 항복을 앞둔 1945년 8월, 조지 마셜 장군은 한국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한반도를 분할 관리하는 방안을 보고하라고 에이브 링컨 장군에게 지시했다. 링컨은 곧바로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딘 러스크 대령은 평양 바로 아래의 39도선을 경계로 분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폭이 가장 좁은 곳이어서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군사분계선을 지킬 수 있다는 게 근거였다.


그러나 링컨은 38도선을 따라 선을 그었다. 다른 장교들이 왜 1도 내려야 하는지 묻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만 때문이지”라고 답했다. 스파이크만은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로 강의 때마다 세계적인 문학과 발명품의 90%가 38선 북쪽에서 창조되고, 위대한 인물들도 거기서 났다고 강조한 지정학자다. 링컨은 그를 언급하며 38선을 밀어붙였다.


반대하던 참모들은 링컨의 기세에 밀려 마셜 장군에게 39선 의견을 보고하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장교들이 벽에 걸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뒤 분할 점령안을 보고했고, 이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돼 맥아더 사령관에게 하달됐다고 알려져 왔다.


당시 이 상황을 지켜봤던 장교의 이름은 에드워드 라우니. 예비역 중장인 그는 2014년 출간한 회고록 《운명의 1도(원제 An American Soldier’s SAGA of the Korean War)》에서 “39선이라면 방어가 더 쉬웠고 6·25 때 많은 미군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번역본 제목도 분계선이 39도로 정해졌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취지로 정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도쿄의 미 극동사령부 참모 시절 일요 당직 장교로 북한의 남침을 맥아더에게 최초로 보고했고,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한 3인방의 한 사람이었다. 군인과 민간인 20여만 명을 구한 흥남철수 때도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켰다.


3년 전 출판기념차 방한 때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해 큰 박수를 받았던 그가 지난 17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생전에 그는 “한국인이 모르는 6·25 비사(秘史)들을 알리고 싶다”며 “한국의 오늘이 수많은 희생 위에 가능했다는 점을 젊은이들은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1세기에 걸친 그의 삶은 지금도 우리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폴란드계 이민자인 그가 모국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치려고 장학재단을 세웠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더욱 숙연해진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한반도의 분할,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던 날, (1945년 8월10일) 미군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한반도의 운명도 결정되고 있었다.

1945년 년 초부터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이 사실은 패전국 일본도 승전국 미국및 연합군 다 알고 있었다. 우리민족만 모르고 있었다.

우리나라 광복은 우리에게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왔다. 도둑처럼 맞이한 해방이었지만 우리 민족은 그저 좋아서 온 나라가 만세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할 때 우리나라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미군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우리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반토막을 만들어 낸 것이다.우리 민족은 이 사실 또한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설로 굳어져온 분단 경위는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 그중에서 전후 처리 과정에서 라이벌로 등장한 미국과 옛 소련이 상호 경쟁과 타협의 산물로 38선을 그었다는 것이었다.

지도를 참고해가며 한반도에 직접 38선을 그은 장본인은 미국의 딘 러스크로 알려져 있다.
선을 그은 정확한 날짜는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된 날(1945년 8월10일) 자정께였던 것으로 브루스 커밍스 등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했던 이 분단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분할 협상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1894년과 1903년 각각 중·일, 러·일간에 한반도 분할문제를 두고 열린 비밀회담에서 이미 거론된 적이 있었다.

KBS에서 제작한 '다큐 공감'이라는 프로에서
그 당시 미군전략기획단의 일원으로 있었고 '운명의 북위1도 ' 라는 책을 쓴 에드워드 로우니 전직 미군 장성은 주장한다.

1945년 8월중 미군전략기획단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팀은 일본이 항복 한 후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 미군 군사 전문가들은 한반도를 분할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어느 부분에서 분할 할 것인지 한반도 지도를 놔두고 고민한다. 그리고 여러 사황을 고려하여 북위 39도선이 최적이라고 결정한다. 그리고 그 팀의 가장 상관이고 결정권자인 링컨장군에게 보고 한다.

그러나 링컨 장군은 부하들이 고심 끝에 결정한 39도선을 거절하고 38도선으로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이유가 어이없다. 링컨장군이 신봉하는 스파이크만이라는 학자의 학설이 있었는데 세계 주요사적인 사건 90%가 북위 38선 부근에서 일어났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과론적으로는 링컨장군 말이 맞아 떨어졌다.
38선때문에 6.25가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어처구니 없게 한 사람의 고정된 관념에 의해 39도선이 38도선으로 결정되고 6.25같은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북위 1도 차이로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아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39도선으로 했을 경우 북쪽으로 상당부분 올라가 평양 바로 밑이다.
그 부분은 한반도의 허리 부분에 해당되어 횡단으로 가장 짧다. 북쪽에서 침략이 있을 경우 방어하기에도 아주 적당하다. 미군전략기획단은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39도선으로 결정했다.

만약 미군전략기획단의 처음 의도대로 39도선으로 했다면 '북한도 그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6.25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는 전쟁대신 뭔가 평화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라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38도선 확정은 별도의 미·쏘 간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미·소 간 항복접수구획선으로 제안된 미군전략기획단 건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정설인 만큼 로우니 장군의 주장은 사실 일 것이다.

미국과 쏘련은 그 당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미국이 스스로 결정해 쏘련에 일방 통보했을 뿐이다.
2차세계대전 중 쏘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웠을 뿐, 일본과는 겨우 1주일간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일본과 한반도에 관한 한 쏘련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으므로 38선 이남은 점령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 들였던 것이다.

사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는데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천km 남쪽 멀리 오끼나와 섬에 있었다.
또 미군은 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쏘련은 신속히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나진-웅기-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다. 이런 속도라면 불과 2~3주 사이에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러 한반도 중간의 북위 38도선까지만 쏘련군의 남하를 허용하기로 결정하고 쏘련에 통고했고
쏘련이 이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

미국이 분할선을 39도로 결정해서 통고 했거나 아예 미국이 조금만 더 신경써서 쏘련군은 한반도에 진입해선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 했다면 쏘련은 한반도까지 들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쏘련이나 미국 모두 당시는 한반도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반도의 분할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한반도 분할의 단초를 연 문건이 1945년 3월13일 당시 일본의 현역 해군 소장이자 종전 당시 일본 해군성 교육국장이었던 다카키 소키치였다 다카키가 육필로 완성한 <주칸호코구안(中間報告案·중간보고 초안)>였다는 것이다.

즉 일본 군국주의자들 내부에서 한반도 분할을 일본이 항복하기도 전부터 항복을 예상하고 논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 1905) 전야에 툭하면 들먹거렸던 ‘38선 분할안’을 구체적인 고려 대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문건의 핵심 요지는 일본이 전쟁에서 질 때 지더라도, 동북아에서 일본이 누렸던 기득권을 송두리째 미국에 넘겨줘 미국이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소련과 손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소련이 참전할 때까지 항복을 늦추고 있었으며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 100만이나 되었지만 쏘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전혀 제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앞서 말했지만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나진-웅기-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는데도 일본의 100만 관동군은 꿈쩍도 안한다. 그런 관동군에 쏘련군이 더 어리둥절해 하고 놀랄 정도였다.

다카키는 일본 ‘제국 해군’의 지도적 전략가로 활약했으며, 1939년께부터 일본의 세계 전략으로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과 소련을 묶어, 영·미 동맹에 대항하는 방안을 입안해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분할이나 38도선이나 39도선 우리 민족의 비극이 우리는 전혀 모르는 채
몇 사람들 전략가에 의해서 결정 되어 버렸다는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이다.

 

 

 

 

  • 문화일보
  • 입력 2020-06-23 11:41

이미숙 논설위원

38선은 남북 분단의 상징이자 6·25전쟁의 상징이다. 해방 후 서울·평양에 각자 정부가 수립되며 38선은 접경선이 됐고, 1950년 6월 25일 남침 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하기까지 38선을 넘나드는 피의 전선이 됐다. 중공군 참전으로 38선 부근에서 교착상태가 이어지자 당시 미군 병사들 사이에선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나(die for a tie)”라는 냉소적 표현이 유행했다고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의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기록했다.


한반도 분할에 대한 연구는 많이 나와 있지만, 1945년 8월 10일 러시아가 남하하기 시작했을 때 미군 전략회의에서 30분 만에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는 38도선이 그어졌다는 게 대체적인 정설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부관이었던 에드워드 로우니(1917∼2017) 장군은 당시 전략회의 목격담을 회고록 ‘운명의 1도(2013)’에서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회의에서 딘 러스크 대령은 평양 밑인 북위 39도선을 주장하면서 근거로 “한반도에서 폭이 가장 좁아 방어가 용이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에이브 링컨 장군은 “세계 최고의 문학과 발명품 90%는 38도선 북쪽에서 창조됐다”는 니컬러스 스파이크만 예일대 교수의 저서 ‘평화의 지리학’을 언급한 뒤 38도선을 주장해 그렇게 결정됐다. 로우니 장군은 “39도선으로 결정했다면 방어가 쉬웠을 것이고 수많은 미군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돌이켜보면 큰 실수였다”고 기록했다.


일본의 원로 한반도 연구가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慶應)대 명예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39도선으로 결정됐다면 6·25전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오코노기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한반도 분단의 기원’에서 “39도선은 제정 러시아가 일본에 제안했던 선”이라면서 “실제 소련군 사령부는 평양 점령 전까지는 함흥을 북한의 중심도시로 여겼고 남포항 접근권만 보장된다면 소련이 굳이 39도선 설정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39도선 획정에 성공했다면 김일성이 북쪽에 ‘민주기지’를 건설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남침을 허용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미국이 39도선을 택했다면 6·25 남침은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다. 그 1도의 차이 때문에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