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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환율 主權' 20년 만에 뺏기나

입력 : 2018.04.20 03:13

수년 전 이맘때다. 당시 주요 20개국(G20) 차관보급 회의에선 회원국들 모두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자는 결의가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갔다. 우리나라만 나 홀로 반대하며 버텼다. 한국 대표로 참석했던 고위 공무원은 우군(友軍)도 없이 "왜 당신네만 안 된다는 거냐"는 집단 항의에 시달렸다.

그 공무원은 미국·독일 등 우방에 읍소하고 매달려 겨우 최종 합의를 막았다. 공무원 사회에서 몇몇만 아는 비화(秘話)다. 한 전직 경제 부처 장관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압력이 외환 위기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20년을 버텨 외환시장 주도권을 지킨 것"이라고 했다.

10년 전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환율 주권(主權)'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가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나라는 없다. 이는 주권의 문제"라는 그의 주장은 '환율은 시장 수급에 의해 결정되고, 정부는 급격한 변동이 있을 때만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개입한다'는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달랐다.

전직 외환 당국자는 "환율을 제대로 다뤄 본 사람치고 강 전 장관처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오히려 드물 것"이라며 "다들 안팎의 시선 탓에 속내를 드러내지 않거나 그럴 수 없을 뿐"이라고 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최근 이 말을 다시 꺼냈다. 그는 "환율 주권은 엄연히 우리에게 있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는 우리의 필요에 따른 선택이지 외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같은 말인데 맥락은 전혀 다르다. 정부는 다음 주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는 안(案)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 부총리는 이번 주 국제통화기금(IMF) 총회에서 이 문제를 미국 등과 최종 조율할 예정이다. 미국의 압박에 정부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국제금융 업무 선배 공무원들이 20년 가까이 '명줄'처럼 지켜온 장벽이 결국 허물어졌다.

이번 조치로 우리 정부가 외환시장에 손을 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글로벌 위기 당시 외환 업무를 했던 전직 고위 공무원은 "투기 세력이 원화를 노리고 공격해오면 미국 등에 미리 '개입을 위한 양해'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 정부 손발이 묶이는 것"이라고 했다. 한 대기업 재무 담당 임원은 "올해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000원대 초반까지 밀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수출 비중이 높은 다른 회사 임원들도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소중한 가치일수록 말로 하기보다 가슴에 담고 지킬 때 더 빛을 발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에겐 '환율 주권'도 그런 가치다. 부총리의 말이 허언(虛言)이 되지 않길 바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9/20180419033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