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의 '싱가포르 신화']
고향 짓밟는 日本軍 보며 '생존이 우선' 신념 굳혀
英 유학 후 변호사로 활약, 31세에 정치인으로 첫걸음
반발 불구 英語를 공용어로 민족 갈등 풀고 세계화 추구
세계적으로 낮은 법인세율, 양도세·상속세는 아예 없어… 1만여 다국적 기업 끌어들여
◇빛처럼 영리했던 젊은 시절
리콴유는 영국 식민 시절인 1923년 9월 16일 부유한 중국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혁명가 쑨원·중국 지도자 덩샤오핑 등과 같은 객가인(客家人·중국 북부에서 남부·동남아로 이주한 한족) 출신이다. 빛(光)과 영리함(耀)이라는 의미가 깃든 이름을 얻은 소년은 명문 래플스 대학에 수석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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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여섯 살이던 1959년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바닷가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리콴유는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 /저서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문학사상사)
◇식민지 시대에 배운 실용주의
1941년 12월 들이닥친 일본군에 동족 수천명이 살상당하자 리콴유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통치 이념이자 신념인 '실용주의'의 싹이 튼 것이다. 그는 고향을 짓밟은 일본군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먹고살아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고 1942년 일본어 강좌를 수강한다.
일본군 정보부에 취직해 연합군의 모스부호 해독 임무를 맡아 연일 들어오는 추축국 패전 소식에 새 세상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패퇴한 뒤에도 혼란이 가시지 않자 심란한 마음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식민지 언어를 공용어로
1959년 영국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상황은 위태위태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1963년 말레이연방 가입을 결정했으나 공업화 추구 노선이 말레이연방의 다른 구성원들과 충돌하며 2년 만에 쫓겨나듯 탈퇴했다.
리콴유가 당장 풀 문제는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등으로 엉킨 민족 갈등이었다. 이를 풀 실마리는 '강력한 공용어'라고 보고, 그는 어느 민족의 모국어도 아닌 '식민지 언어' 영어에 '제1 공용어' 지위를 부여한다. 인구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계의 반발에도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과거의 어촌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하지만 '유교적 권위주의'만큼은 국가 운영 이념으로 극대화시켰다. 혹독한 법치와 반부패 제도를 확립해 거리에서 껌만 뱉어도 심하면 태형(笞刑)을 받을 수 있는 나라, 마약은 0.5g 이상 가져도 사형당할 수 있는 나라로 바꿨다. 부패행위조사국(CPIB)으로 공직자를 밀착 감시했고, 1995년 가족이 사들인 주택 가격이 올라 논란이 일자 자신도 조사를 받았다.
가난한 어촌 마을을 반세기만에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가 넘는 부강한 나라로 탈바꿈시킨 리콴유(李光耀·91)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23일 오전 3시 18분(한국시각 오전 4시18분) 폐렴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한국)·장제스(대만)·덩샤오핑(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도약을 이끈 1세대 창업형 지도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리콴유는 독립 50주년(8월 9일)을 앞두고 영면했다.
싱가포르 총리실은 이날 오전 짧은 성명서를 통해 “리셴룽(李顯龍) 총리는 침통한 마음으로 리 초대총리가 오늘 새벽 입원 중이던 싱가포르종합병원에서 향년 91세로 편안하게 세상을 떴음을 전 국민들에게 알려드린다”고 발표했다. 총리실은 이어 “장례 일정은 별도로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달 5일초부터 심한 폐렴 증세로 입원해 한 달 넘도록 치료를 받아왔다. 2008년부터 건강이 나빠져 심장박동조절기를 부착한 뒤에도 말초신경 장애, 뇌허혈 발작 등 각종 질병과 싸워왔다. 작년 11월 싱가포르 인민행동당 창당 60주년 행사를 끝으로 공식석상에서도 모습을 감췄다.
국부(國父)를 잃은 싱가포르 국민은 큰 슬픔에 빠졌다.
‘시대를 만든 인물’(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오늘날 싱가포르의 아버지’(존 메이저 영국 총리), ‘위대한 성공의 주역’(새뮤얼 헌팅턴)…. 싱가포르의 기적을 일군 리콴유에게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보낸 찬사다.
리콴유는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통치하던 1923년 9월 16일 광둥성에서 이주한 화교 이민자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났던 그는 악착같이 공부해 명문 래플즈대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뒤이어 2차 대전이 터지고 일본군이 고향을 점령하자 그는 일본군 선전·정보부에서 번역 일을 하거나 고무풀 장사 등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일본 점령기 경험에 대해 “정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은 시기”라고 회고했다.
리콴유는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유학을 떠났고 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유학 시절 접했던 영국의 선진 문물과 학문 그리고 그 안에서 겪었던 아시아계 인종에 대한 차별 등의 경험으로 ‘고향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1950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노동 전문 변호사로 영국 측 사용자들과 아시아계 노동자들 사이 쟁의를 잇따라 타결시키면서 동족의 이익을 대변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졌고, 1954년 창립한 ‘인민행동당’의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서른한 살 ‘정치인 리콴유’의 첫걸음이었다.
1959년 싱가포르가 자치권을 얻어낸 뒤 실시한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이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했고 리콴유는 이해 서른여섯 살에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됐다. 그러나 곧장 시련이 닥쳤다.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말레이 연방에 가입했지만 연방의 맹주 말레이시아와 충돌하다가 2년 만에 탈퇴했다. 이때부터 리콴유 정치 노선의 핵심 키워드로 꼽히는 실용주의가 빛을 발했다.
영국과 일본의 통치를 경험하고 유학까지 한 그는 특정 이념에 경도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그는 급진 반식민주의→온건 사회주의→강경 반공주의로 표변(豹變)하며 싱가포를 통치했다. 그는 자원빈국 싱가포르의 미래는 인재(人材)육성에 달렸다고 믿었다. 공직자 급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 공무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강력한 반부패 정책으로 빈곤과 무질서를 바로잡았다. 도시개발·교육 등에 서구 선진 시스템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외교에서는 싱가포르의 국가위상을 높이는데 힘썼다. 1967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창설을 주도했고, 1972년 중국과 미국의 국교 정상화 교섭 때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았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할때는 적극적인 조언자가 됐다. 31년간 싱가포르를 통치한 뒤 1990년 후임 고촉통에게 총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그에게는 ‘독재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사회 규율이 엄혹하고, 집회·결사 등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 리셴룽이 3대 총리로 취임하자 세습 논란도 있었다. 63년을 해로한 부인 콰걱추 여사와 2010년 사별한 뒤에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2013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그는 ‘날마다 몸이 약해져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도 털어놨다. 2011년에는 미리 가족에게 “죽거든 지금 사는 집을 절대 기념관으로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헐어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국강병을 실현한 실용주의 정신은 유언에까지 깃들어 있었다.
[國父 잃은 싱가포르… 김형원 특파원 르포]
총리 취임 前부터 75년간 살아… 벽 곳곳 갈라져… "청렴 그 자체"
추모 꽃 보고서야 리콴유 집인 줄 알았다
재개발 예정지… 그대로 두면 주변 건물 못 올려 이웃 고통
"내가 죽거든 헐어버리라"던 고(故) 리콴유 전 총리의 집은 싱가포르 옥슬리(Oxley) 거리 38번지다 (38 Oxley Rd, Singapore 238629). 24일 가보니 색 바랜 기와부터 보였다. 페인트 찌꺼기가 벽에 붙어 너덜거렸다. 100년 전 유대인 상인이 지었다고 한다. 내버려만 둬도 이윽고 주저앉을 집이었다. 60년 가까이 총리나 국부(國父)로 불렸던 사람은 75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옥슬리 거리는 서울 강남의 고급 주택가쯤 되는 곳이다. 리콴유 전 총리의 집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의 집은 중국 전통 건축양식으로 기와지붕을 3단으로 올렸다. 갈색 목재와 검은색 금속 틀로 만든 대문이 화려했다. 오른쪽 집은 미국의 단독주택처럼 자동문을 지나면 바로 차고로 통하게끔 되어 있었다. 밝은 색 페인트로 벽을 칠했고, 2~3층에는 통유리를 끼워서 현대적인 느낌을 줬다.
싱가포르 부동산업자에 따르면 리 전 총리의 집은 대형 건물 하나만 있는 '싱글 방갈로' 스타일이다. 부동산 관계자는 "크기는 큰 집인데, 요즘 사람들이 '멋있다'고 할 만한 미적 요소는 거의 없다"며 "38번지가 재개발에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부수고 새 건물이 올라갈 것 같다"고 말했다.
생전에 리 전 총리는 이곳을 '침실 5개와 원래는 하인들이 사는 방 3개가 있는 넓기만한 집'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그는 "인도 초대 총리 네루나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집도 결국 폐허가 됐다"며 "집이 너무 오래돼 벽이 갈라지는 판이니 없어져도 자식들이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리 전 총리는 1940년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이곳에서 청년 리콴유는 인민행동당(PAP) 창립 멤버 등 20명과 독립을 논했다. 싱가포르 독립 이후에는 당론(黨論)이 이 집으로 모였다. 집은 자연스레 싱가포르 정치의 중심이 됐다. 리콴유의 아들이자 현 총리인 리셴룽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뛰놀았다. 2010년 반려자 콰걱추 여사가 사망하자 리 전 총리는 집안 구석구석에 행복했던 순간의 사진을 깔았다. 장례식 이후 여사가 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열했다. 이곳에서 노년기의 그는 식사와 운동, 신문 읽기와 공부로 이어지는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 입원하기 전까지 지내던 곳도 바로 '옥슬리 집'이었다.
리 전 총리는 평소 내부에 골프장까지 갖춘 공관(이스타나)을 쓰지 않았다. 대신 옥슬리 거리의 오래된 집으로 퇴근했다. 이 같은 이유로 리 전 총리 재임 당시 집무실 '이스타나'가 공저(公邸)지만, 싱가포르 정부의 진짜 집은 따로 있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현지 언론에서는 사망 이튿날부터 역사적 의미를 기려야 한다며 "유언을 따르지 말고 집을 보존하자"는 주장이 실렸다.
옥슬리 거리는 양옆으로 차량 출입 통제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정문 방향을 지키는 경호는 모두 4명으로 모자를 쓴 2명이 대문을 지켰고 나머지 2명은 집에서 10~1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출입하는 차량을 감시했다. 사진을 찍으면 즉각 제지를 당한다. 이날 오전 9시 40분쯤 주변을 맴돌던 바바라 옹(55)씨가 "도대체 리콴유 총리의 집이 어디냐?"고 묻자 경호원이 "바로 여기"라고 대답했다. 근처 전봇대 아래에 놓인 꽃다발들이 눈에 띄었다.
리 전 총리는 "지배층의 영혼을 정화하라"는 플라톤의 말을 신봉했다. 1959년 총리 취임 사진을 보면 리콴유와 각료 전원이 정장 대신 흰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다. 청렴과 정직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후 56년간 청렴 문제만큼은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총리 아들'을 둔 리콴유의 아버지는 일흔이 넘도록 작은 시계 수리점을 운영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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