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급감은 日학살 때문' 러시아 정부문서 공개]
2009년 귀국 사할린 동포
"미즈호라는 곳에서는 여성·아이 할 것 없이 칼로 찔러… 수십명 몰살"
정확한 학살자 수 확인 위해선 추가적인 문서 확보 필요
1940년부터 사할린에 살다가 2003년 3월 귀국한 김수영(73)씨는 14일 본지에 "에스토루 지역에서 1945년경 일가족 5명 정도가 트럭을 타고 사할린 남부로 이동하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1945년 귀국한 김경순(84)씨는 "사할린에서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가려다 오빠와 아버지를 잃었다"며 "일본 경찰이 귀국하려던 아버지와 오빠를 경찰서에 데리고 가 총알을 퍼붓고 경찰서를 태워버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전쟁 패전 책임을 구실로 한인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사할린에서 태어나 살다가 2010년 귀국한 이태엽(74)씨는 "토루에서 가마타라는 일본인 경찰이 농가에 쳐들어가 20대 남성과 그 아버지 모두를 일본도로 배를 가르고 근처 젊은 부부까지 칼로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일본 경찰이 이들에게 '소련 스파이가 아니냐'며 트집을 잡았다"고 말했다.
- 사할린 탄광의 한인들… 일본강점기 러시아 사할린 탄광에서 탄광 노동자교육을 받고 있는 한인들 모습. 국가기록원이 광복 67주년을 맞아 사할린국립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해 14일 공개한 희귀기록물에 들어 있는 사진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일본 패망 이후에도 강제징용자 2세들의 삶은 비참했다. 2009년 귀국한 박일섭(73)씨는 "1944년 탄광이 무너져 아버지가 작업복 차림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지게에 실려와 결국 두 달을 앓다가 돌아가셨다"며 "어머니도 병사해 11살 때부터 벌목장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월급도 없이 점심으로 빵 한 조각을 먹으며 나무를 베고 나르는 일을 했다.
- 국가기록원이 14일 공개한 러시아 정부 보고서. 2차 세계대전 전 사할린 서북부 지역에 한인이 1만229명 살았지만 전쟁 후 5332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국가기록원 제공
한국외국어대 방일권 연구교수는 "러시아 문서를 통해 민간인 살해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는 증거는 나왔지만 학살자 수가 얼마나 될지에 대해선 추가적인 문서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지난해 1월 사할린 강제동원 진상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1945년 해방 당시 남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4만3000여명이고 노동에 동원된 한인 남성 수는 3만~3만4000명으로 추정했다. 한인을 동원한 회사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오지(王子)제지, 닛테쓰(日鐵) 등이었다. 국가기록원은 일본군의 사할린 한인 학살 관련 문서와 함께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한인 1만2000여명의 명부와 서신, 가족관계 관련 기록을 확보했다. 이 자료는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보상 신청 근거로 활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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