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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그때 그사람

‘돌대가리’로 박정희를 들이박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독재자의 단순·무식·과격한 분신이었던 김형욱
‘좀 모자란’ 그의 성공은 중앙정보부의 불행으로 남아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5년 5월26일 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발표를 했다. 김형욱의 실종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했지만, 대개 ‘양계장설’이나 ‘청와대 지하실설’ 등 박정희의 직접적 지시에 따른 살해나 차지철 라인에 의한 살해 등이 유력한 설이었다. 이런 설들이 사실이라면, 중앙정보부는 김형욱 살해에 연루되지 않았거나 일부 요원들이 개인적으로 관계된 것이 되어 적어도 이 사건에 관한 한 국정원은 기관 차원에서는 면죄부를 받거나 최소한의 책임만을 지게 된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국정원이 중앙정보부가 기관 차원에서 움직였다는 점을 시인하고, 지난날의 국가 폭력에 대해 국가기관으로서 책임을 분명히 인정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사건의 핵심에 있는 이상렬 주프랑스 공사가 아직 입을 열지 않았고, 주검 처리나 박정희의 지시 등 아직 밝혀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언론의 반응을 보면 이번 중간발표가 의혹을 풀어주었다기보다, 오히려 증폭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의 실종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언론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정작 김형욱,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중앙정보부를 어떻게 운영해왔는지를 깊이 있게 파헤치지는 않았다.



8기의 우등생 김종필, 열등생 김형욱

» 김형욱은 다중인격자 박정희의 한 얼굴이었다. 그 둘을 짝지워놓은 것은 박정희의 형벌인가, 김형욱의 형벌인가. (사진/ 연합)


김형욱, 아직 군정이 실시되고 있던 1963년 7월, 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그는 3선개헌안 통과 직후인 1969년 10월20일 해임될 때까지 6년3개월을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기간은 요즘 대통령 임기 5년보다 더 길며, 역대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국정원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장장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집권기간 중 3분의 1이 넘는 기간에 그는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기간에 김형욱만 자리를 오래 지킨 것은 아니었다. 김형욱의 천적이었던 쌍권총 박종규는 육영수 여사의 피격으로 낙마할 때까지 10년이나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냈고, 김정렴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9년이나 지냈다. 이후락도 비서실장 6년에 중앙정보부장 3년, 신직수는 검찰총장 7년6개월에 중앙정보부장 3년, 차지철도 경호실장만 5년이고, 김재규도 보안사령관 2년에 중앙정보부장 3년을 지냈으니, 독재자 박정희는 집권기간이 길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몇몇 인물을 꽤 오래 쓴 편이다. 박정희는 이런 친위 인물들을 서로 충성 경쟁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그들 몇몇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저승길로 갔다.

김형욱의 어린 시절과 입대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향이 황해도 신천이라는 것 이외에는 저마다 설이 갈린다. 가난한 집 출신이라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다고도 하고, 어려서 복싱과 승마를 배웠다는 것으로 보아 부유한 집 출신임이 틀림없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그가 일본 헌병 보조원 출신인데, 해방 이후 그 경력 때문에 좌익들에게 크게 혼이 나 월남했다고도 하는데, 뚜렷한 입증 자료를 찾을 수 없다. 그가 미국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소련군이 고향에 진주함에 따라 공산 학정을 견디지 못해 1946년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고 한다. 김형욱은 여순반란 사건 직후인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대했다. 육사 8기는 약 6개월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됐는데, 특별반까지 합쳐 1200여명이 임관돼 육군사관학교 역사에서 최다 임관으로 기록되고 있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낸 김종필이 8기의 우등생이었다면, 가장 오래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누린 김형욱은 재학 시절에는 성적이 최하위권이었다고 한다. 8기의 우등생들이 일찍이 육군본부에 배치돼 박정희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반면, 김형욱은 일선을 전전했다. 육사 8기는 한국전쟁 당시 일선 소대장으로 3분의 1가량이 전사했는데, 김형욱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위관급 장교로서는 처음으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촌놈 중령’ 김형욱은 대대장 생활 7년 만에 육군대학을 마친 뒤 1960년 3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에 배치됐고, 정보참모부 행정과장으로 근무하던 동기생 김종필과 재회했다. 이승만 시절 이미 군사반란을 준비했다가 4·19로 기회를 잃어버린 박정희, 김종필 일당은 대신 정군운동(整軍運動)을 들고 나와, 당시 참모총장 송요찬에게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서한을 군수기지 사령관 박정희 명의로 보냈다. 김종필의 동기인 8기생이 육군본부에만 120명이 근무하며 수평적 유대를 공고히 하고 있었던 것은 군이 아무리 상하관계가 절대적인 수직적 조직이라 하더라도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외의 압력 속에 끝까지 정군을 주장한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등 8기생 8명(8·8그룹)은 국가반란음모죄로 체포됐다. 그러나 군의 중핵을 이루는 8기생을 대거 처벌할 경우 발생할 동요를 우려해 이들은 석방됐다. 그 뒤 이들은 7기와 9기 선후배들을 모아 다시 하극상 사건을 일으켰고, 그 결과 김종필은 군복을 벗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5·16 군사반란은 무르익어갔다.

»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자리가 만들어낸 막강한 인물이었다. 중앙정보부장 시절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형욱. (사진/ 정부기록 사진집)


5·16 군사반란의 정점에는 박정희가 있었지만, 실제 거사는 김재춘, 문재준, 박치옥 등 육사 5기와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등 8기를 양 날개로 해 이루어졌다. 아직 박정희가 절대권력을 수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5기와 8기의 대립 등 자칭 ‘혁명 주체’ 내부의 권력다툼은 날로 심해졌다. 8기가 처음 육사에 입교했을 때 5기가 소대장으로 혹독한 기합을 주던 사이였다고 한다. 5월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처음 발족했을 때 김형욱은 최고위원에 들지 못했다. 그는 중령 이하에 최고위원이 5명만 배치됐다고 거세게 항의하다가 육사 선배인 농림장관 장경순 준장에게 뺨을 맞았는데, 며칠 뒤 최고위원 겸직 금지로 장경순 각료 5명이 물러난 자리에 5기 김재춘, 8기 홍종철 등과 함께 임명됐다.

‘과소평가’ 받은 덕분에 오른 중정부장

이 당시 김형욱은 홍종철, 길재호 등과 함께 ‘김홍길’이라 불리며 최고위원 내에 8기 강경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는 김종필의 후원으로 최고회의 내무위원장이 되는데, 중앙정보부는 내무위원회 소관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종필이 처음 중앙정보부를 만들 때 8기 동기로 일찍부터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했던 이영근, 서정순, 석정선, 전재구 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창설에 관한 소식은 어두워 오히려 장도영 등 반대세력에게서 너는 8기라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김형욱 자신은 정군 운동과 5·16의 주체로 8기 주류로 자임했지만, 정작 8기 내에서는 일정하게 소외된 측면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 김형욱이 지은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 그의 시시콜콜한 훈장과 외국여행 기록까지 포함해서 한 페이지 가득 경력을 소개하고 있다.


김형욱에 앞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는 초대 김종필, 2대 김용순, 3대 김재춘이었다. 능력 있고 언변도 좋은데다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이 너무 앞서가자, 5기생은 물론이고 동기인 8기에서도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형성돼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8기 주류에서는 김형욱을 후임으로 밀고 5기는 김재춘을 밀었는데, 어느 쪽 손도 들어줄 수 없었던 박정희는 중도파인 김용순을 임명했다. 그러나 중도파는 양쪽의 지지보다는 양쪽에게서 비판을 받는 법인지라, 김용순은 그 막강한 자리를 채 2달도 지키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번에는 5기 김재춘을 선택했고,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김재춘은 김종필 세력 제거를 최고의 목표로 삼다가 역시 반격을 받아 3달 만에 쫓겨났다. 처음 박정희는 김재춘의 후임으로 방첩부대장 출신의 장경순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총괄해야 하는 자리에 앉힐 장경순이 농림장관으로서의 성적이 시원치 않아 농민들의 원성이 큰데다, 다시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8기 주류의 적극적인 노력이 작용해 김형욱이 큰 감투를 쓰게 되었다.

저돌적인 모습은 계산된 것

왜 김종필 등 8기는 정보인으로서의 명석함이나 분석능력,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저돌적이고 폭력적인 김형욱을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적극 추천한 것일까? 아마도 김형욱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구당 위원장이나 지역구를 ‘잠시’ 내놓아야 하는 국회의원은 절대로 똑똑한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지 않는다. 뭔가 좀 부족한 사람, 그래야 그 자리에 추천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줄 알고 딴 생각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명 초기 김형욱은 8기에 대해 고분고분했고, 내가 정보를 아느냐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상의도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불과 15만표의 차이로 승리한 1963년 대통령 선거의 일등공신으로 떠오른 뒤 김형욱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1964년 6·3 사태 이후로는 자신을 추천한 김종필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종필이 박정희에게 김형욱의 교체를 건의한 뒤- 박정희는 ‘친절하게’ 이런 사실을 모두 김형욱에게 이야기해준다. 이것이 박정희의 용인술이다- 에는 기회만 있으면 김종필을 제거하거나 타격을 주려 했다.

동백림 사건에서 김형욱이 무리하게 민족주의비교연구회를 연결지은 것은 단순히 학생운동을 겨냥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시 표적이 된 서울대 교수 황성모는 김종필의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에 깊숙이 연루됐던 인물이다. 1966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국회에서 오물을 뿌렸을 때 김형욱은 김두한의 배후에 김종필이 있다고 박정희에게 보고하고, 김두한에게서 이런 진술을 얻어내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가했다. 장군의 손녀 김을동은 건강했던 아버지가 50대 중반에 세상을 뜬 것은 김형욱의 중앙정보부가 가한 고문 후유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1968년 국민복지회 사건은 직접적으로 김종필의 손발을 자른 사건이었다. 아직 3선개헌 전이었으니, 김종필 입장에서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김종필에게 박해를 가한 김형욱으로서는 김종필이 대통령을 꿈꾼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3선개헌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는 박정희 대통령. 그는 개헌 이후 김형욱을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사진/ 정부기록 사진집)


한편 박정희는 왜 김형욱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을까?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인물이지만, 젊고 능력 있고 야심만만한 그를 막강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앉혀두는 것은 박정희에게도 불안한 일이었다.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박정희 밑에서의 2인자는 꿈꿔도 박정희의 자리는 탐할 수 없는 사람, 그러면서 박정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사람을 박정희는 필요로 했던 것이다. 1980년대 초반 개그맨 김형곤이 ‘날으는 돈까스’ ‘공포의 삼겹살’이란 말로 사람들을 웃겼는데, 사실 이는 단순·무식·과격으로 대표되는 김형욱의 별명이었다. 김형욱이 쓴- 사실은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대지의 가교>란 책에서 그는 조금 우아하게 “외곬, 우직, 직선적 열정형”이라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 모든 나에 대한 ‘닉네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라고 썼다. 5·16 군사반란을 준비하면서 8기와 9기가 서로 명단을 교환할 때 9기쪽에서 김형욱의 이름을 보고 저런 ‘쓸모없는 돌대가리’를 왜 포함시켰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박정희는 그를 참 잘 써먹었다. 그러나 3선개헌을 성사시키고 어떤 상을 받을지 궁금해하다가 해임된 김형욱은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해 그 돌대가리로 박정희를 들이박았다.

김형욱이 단순, 무식, 과격했다는 데에 대해서야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그의 저돌적인 모습은 다분히 계산된 것이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요구이기도 했으며, 김형욱 자신이 즐긴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런 무식함, 과격함, 야비함이 권력 확대의 수단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전혀 중앙정보부장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김형욱이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이 된 것을 두고 “어처구니없는 단순성을 무기로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했다.

불행히도 그의 성공은 정보기관으로서 중앙정보부의 불행이었다. 박정희 정권 초기의 중앙정보부 부장을 6년 넘게 지냈다는 점에서 중앙정보부가 갖는 부정적인,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힘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은 모두 김형욱이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박정희의 시대가, 그리고 박정희란 인물의 그릇이 고문과 용공조작, 불법과 도청, 강제 연행과 테러, 밀수 등 온갖 부정적인 활동을 자행하는 중앙정보부를 요구했을 것이다.

김일성 밀사 황태성은 왜 죽었나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막강한 자리를 만들었다면,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자리가 만들어낸 막강한 인물이었다. 그의 모든 권한은 박정희에서 나왔지만, 때로 김형욱이라는 독특한 인물은 박정희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한국전쟁 당시 이북 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신천이 고향인 김형욱은 좌익 전력이 있는 박정희를 색깔론에서 보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개인적인 관계로 본다면 박정희는 북에서 밀사로 내려온 황태성이 너무 가까운 선배이자 둘째형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처지였으나, 황태성의 사형을 김형욱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김성곤 등 과거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정권 내의 많은 실력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으며, 권력투쟁의 유력한 수단이었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이자 오랜 술친구였던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가 같은 혁명주체인 이낙선이 발행인인 <세대>지에 실은 논문을 구실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이나,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북쪽 육상 대표선수로 참가한 신금단과 남에서 간 아버지의 눈물의 부녀 상봉 직후 국회의원 이만섭이 판문점에 남북 이산가족면회소를 설치하자고 주장한 것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고 펄펄 뛴 것도 반공의 사상검열관을 하면서 권력 내부의 군기잡기를 시행한 것이었다.

» 1977년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의 죄상을 털어놓는 김형욱. (사진/ 한겨레)


김형욱은 박정희의 3선개헌을 관철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3선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찬성으로 돌리는 데 이용한 악명 높은 수단은 여자 문제로 약점을 잡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때로는 사전에 아가씨를 매수해 호텔방에서 점잖은 나리의 옷을 속옷까지 몽땅 들고 도망치게 해 곤경에 빠뜨리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여자 문제로 별로 약점이 잡히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네는 무슨 재미로 사나?” 하며 참 별 걱정을 다 해주기도 했다.

3선개헌 직후 박정희는 3선개헌 통과의 일등공신인, 또 그동안 원성이 자자했던 김형욱과 이후락을 전격 교체했다. 가히 토사구팽의 전형이었다. 이후락은 곧 주일대사로 임명됐고, 김형욱은 8대 국회에 공화당 전국구 의원 5번으로 입성했다. 그러나 박정희 밑에서 2인자를 자처하던 김형욱으로서는 국회의원 자리가 성에 찰 리 없었다. 한번은 국회 외무위에서 김형욱이 모 야당 의원과 멱살잡이를 벌인 일이 있었는데, 야당 원로 윤제술이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무슨 개싸움들이여!”라고 웃겨서 그냥 끝이 났다고 한다. 이 해프닝을 두고 어느 언론인은 이게 김형욱 ‘의원’의 유일한 원내 활동이라고 비꼬았다.

박정희의 여자관계만 발설하지 않은 이유는?

해임 다음날 새벽 김종필의 직계로 김형욱에게 가장 많이 당한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의 집을 찾아가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는 일화는 그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워낙 지은 죄가 많았기에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난 뒤 전전긍긍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미국으로 망명해 두문불출하고 지내던 김형욱은 1977년 프레이저 청문회에 등장해 박정희 정권의 악행에 대해 증언했다. 한국 정부의 외환보유고가 3천만달러 수준일 때 그가 미국으로 빼돌린 재산이 2천만달러에 달한다고 그의 행적을 적은 여러 기록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 그가 무엇을 원해서 증언대에 섰을까? 인기가 거품처럼 사라진 흘러간 스타의 허탈함처럼 다시 각광을 받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가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지 약 1년반 뒤에 간행한 <대지의 가교>에는 ‘김형욱 저’라고만 나와 있을 뿐 아무런 저자 소개가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1년반 뒤인 1972년 말에 그의 이름으로 간행된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라는 1200쪽짜리 책에는 시시콜콜한 훈장과 외국여행 기록까지 포함해서 한 페이지 가득 경력을 소개하고 있다.

김형욱의 모든 권력은 박정희에게서 나왔다. 박정희가 위임한 권력을 거둬들인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가 벌인 모든 악행은 사실 박정희의 요구였다. 박정희 없는 김형욱을 생각할 수 없듯이, 1960년대의 박정희는 김형욱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김형욱은 다중인격자 박정희의 한 얼굴이었다. 김형욱은 프레이저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회고록을 통해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지만, 단 한 가지 박정희의 여자관계만은 털어놓지 않았다. 김형욱이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들에게 피살된 것은 기왕의 폭로에 대한 복수였을까, 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추잡한 시한폭탄에 대한 예방이었을까? 박정희와 김형욱,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원수가 된 처지에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승길 길동무가 되었다. 그 둘을 짝지운 것은 박정희에 대한 형벌이었을까, 김형욱에 대한 형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