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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알아듣기/영어한마디

[나의 영어공부기④] 해외연수 준비 시작

[나의 영어공부기④] 해외연수 준비 시작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업무에 정신이 없다가 2년차 때 좀 한숨을 돌리게 되어 해외연수를 지원해 보기로 결심했다. 판검사, 로펌 변호사들은 장기해외연수대상자로 선발되면 1년간 미국, 유럽 등의 유명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 행정부 공무원들은 2년짜리도 가더라.

법조인들이 가는 연수과정에는 visiting scholar로 가서 관심 있는 한두 강의 정도만 들으며 자유롭게 연구하는 코스와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LL.M. 학위과정으로 가서 학부생에 해당하는 J.D.들과 함께 수업듣고 같이 시험치고(채점은 이름 가리고 똑같이 하니 외국에서 온 LL.M.이라고 학점 너그럽게 주지도 않음) 논문도 쓰는 좀더 힘든 코스가 있다. 주변 선배들이 이왕이면 더 힘들지만 더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학위과정에 도전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당시(2005년)는 심각한 가계부채로 신용불량자 400만 시대여서 파산부에서는 신불자 구제를 위한 개인파산, 개인회생제도 정립 및 홍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개인파산 제도를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직접 담당했던 개인파산 사건의 안타까운 사연들, 파산 제도의 취지 등을 알기 쉽게 정리한 ‘파산이 뭐길래’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문제에 관하여 고민하던 중 하버드 로스쿨의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가 미국 중산층 파산 증가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분석한 실증적인 책 ‘맞벌이의 함정(원제 Two-income trap)'을 읽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연수를 갈 바에는 워런 교수가 있는 하버드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토플 시험(당시는 CBT 시절) 치려면 파워프렙이라는 기본문제집을 풀어봐야 한다고 하기에 친구 것을 빼앗아 우선 백지상태에서 모의 토플 문제를 풀어보았다. 300점 만점에 200점은 가까스로 넘더라. 귀머거리 벙어리 주제에 문제는 곧잘 푸는 한국형 영어의 특징이다. 프렌즈, 앨리맥빌을 숱하게 봐서 그런지 리스닝도 의외로 아예 모르는 단어 외에는 잘 들리는 듯했다.

대학가를 가득 메운 토플, 토익 영어강좌 홍보 플래카드.
대학가를 가득 메운 토플, 토익 영어강좌 홍보 플래카드.

근본적인 영어 실력 향상이 목표가 아니라 우선 연수에 필요한 토플 점수가 먼저 필요했기에 기본문제집인 파워프렙만 집중하여 풀고 토플 시험 준비 사이트의 정보를 토대로 점수 잘 받기 위한 요령만 터득하여 학원 한번 안나가고 초단기에 유학에 필요한 점수를 얻기는 했다. 하지만 점수로 봐서는 엄청 영어 잘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독해는 좀 되나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수준. 바로 나 같은 경우 때문에 이후 ETS가 말하기 듣기를 강화한 IBT를 도입한 것이다.

운 좋게 대법원의 선발과정에서 원하는 하버드대 연수대상자로 선정된 후, 평생 처음으로 비로소 제대로 된 영어공부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년 동안 가족과 함께 타국에서 살면서 미국 학생들과 같이 수업듣고 시험치고 무려 석사학위를 따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막막. 단기간에 필요한 토플점수를 얻은 것과 실제 영어실력은 별개 문제였다. 일단 어휘력 수준이 너무 낮고, 평생 잉글리쉬 스피킹을 해 본 적이 없다! 문자 그대로 없었다. 여행가서 호텔에 방 달라고 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10개월 후에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영어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정작 공부는 시작 안하고 ‘영어공부법’에 대한 책만 먼저 섭렵했다. 그러다 발견한 유일한 보배는 ‘영어, 이렇게 배워야 통한다’(문성업, 이호남, 신종호 공저, 키출판사)였다. 브리검 영 대학에서 언어습득학을 전공한 전문가들인 저자들은 한국에 유포된 온갖 혹세무민하는 영어공부법을 과학적으로 비판하고, 언어공부에 왕도는 없고 기본이 있을 뿐임을 설파했다.

그 기본이란 CI(comprehensible input: 이해할 수 있는 영어의 저장)이며 다른 하나는 MI(meaningful interaction: 의미 있는 상호교류)라는 것이다. 여기에 밑줄 쫙. 정말 절대진리라고 생각한다. CI와 MI가 충분히 주어질 때 개별적 영어지식과 규칙이 아니라 이를 총체적으로 운영하는 영어시스템(interlanguage)이 구축된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는데 단기간에 영어를 잘하는 얄미운 사람들은 바로 위 두 가지가 잘 되어 있는 경우다. 미군정 당시 무학자 구두닦이도 요령 좋은 사람들은 귀동냥 잘 하다가 단순한 몇 마디라도 말을 걸면서 금방 미8군 영어를 습득했다.

CI란 자신의 진짜 수준에 맞는 영어에 노출되어야 얻어진다. 대체로 80% 이상의 의미를 곧바로 건질 수 있는 영어, ‘이거 너무 쉬운데? 거의 다 들리는데?’ 정도를 말한다. 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뇌가 정상적 속도로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고 추리하고 찾아봐야 한다. 80% 이상을 아는 수준이면 나머지도 반자동적으로 추론, 연상이 되며, 아는 부분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하는 등 ‘말 연습’을 하게 된다.

MI란 2인 이상의 사람이 의미있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CI로 습득된 쉬운 말들부터 바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써 보는 것이다. 정해진 틀에 짜인 가짜 대화(시간, 날짜, 요일 묻기 등) 따위는 MI가 아니다. 진짜 수다 떨고 싶은 화제(비욘세가 더 핫한지 제시카 알바가 더 핫한지 등)에 관하여 아무리 단순무식한 논거를 들어서라도 영어로 말싸움하는 것이 MI다. 자기가 필요한 말할 거리를 영어로 만들어 상대에게 어떻게든 전달하는 interlanguage가 작동해야지 단순암기, 패턴암기로 진정한 조어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이 이치를 배우고 난 후 나는 자기 실력의 수준을 넘는 타임지 수준의 고급 어휘 공부나 독해 공부 등은 일체 안 하기로 했다. 고교 졸업 후 영어공부를 한 적이 없어 어휘력 수준이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어려운 단어 하루 몇 개씩 외워봤자 입에 붙을 리도 없다. 독해는 원래 괜찮게 한다. 단어는 모르면 찾으면 된다. 아는 단어는 그럭저럭 잘 들리는 편이다. 그렇다면 가장 못하는 것은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결론을 내리고, 여기에만 올인하기로 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