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사람 풍경] 나무에 빠진 곽수일 서울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입력 2014.07.05 00:16 / 수정 2014.07.05 00:16
비 오면 물오르고 더우면 잘 자라고 불평할 날 없으니 암도 달아나네요
40년 최장기 서울대 교수 기록, CEO 제자만 1000명 경영학 대부
3만 평 농장서 제2 인생 10년째 … 조경수 100여 종 3만여 그루 심어
손 안 대는 곳 없는 요즘 대기업 문제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 가로막아
곽수일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나무농장은 옛 선비들의 임하(林下)와 같다. 임하는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곳을 말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좋아요, 너무 즐거워.”
올해 일흔셋의 ‘호랑이 선생님’은 “좋아, 좋아”를 연발했다.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영락없는 촌부(村夫)다. “이런 차림으로 여주 시내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시골 노인네라고 구박을 한다니까요. 하하하.”
2일 오후 경기도 여주시 가산리 일규(一圭)농장. 현직 교수 시절 엄하기로 소문났던 곽수일 서울대 경영학과 명예교수의 발걸음이 가볍다. 2006년 40년6개월이란 서울대 최장기 교수 기록을 세우고 교단에서 물러났던 그가 ‘제2의 삶터’로 택한 곳이다. 은퇴 1년 전 시작한 나무농장이 어느덧 10년을 맞게 됐다. 그와 함께 3만 평에 이르는 농장을 둘러봤다. 섭씨 30도가 넘는 더위,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흘렀 다.
“이것 보세요. 주목(朱木)입니다. 관상용으로 제격입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말로 유명하죠. 이쪽 납작한 소나무도 보세요. 반송(盤松)입니다. 집에 한 그루 심어 보세요.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저 뒤에 보이는 건 왕벚나무입니다. 가로수로 많이 쓰이죠.”
100% 서울 토박이, 뼛속까지 경영학자였던 그의 입에서 나무 이야기가 줄줄 터진다. 대왕참나무·구상나무·메타세쿼이아·청단풍·연상홍·이팝나무·복자기·모감주 등 조경수 100여 종이 자란다고 했다. 나무 숲 사이사이에 개망초가 백색 군락을 이루고 있다.
“참 희한해요. 풀도 해마다 판도가 바뀝니다. 올해에는 개망초가 점령했네요. 지난번에는 쑥 천지였거든요. 꼭 정치판 같죠. 하나가 득세하면 주변을 삼켜버리거든요.”
“50대 후반부터 은퇴 이후를 생각했습니다. 교육이 100년을 내다보고 한다면 나무는 10년 앞을 보고 하잖아요. 제 나이에 딱이죠.”
- 왜 하필 나무인가요.
“제 전공이 키우는 겁니다. 학생(육영)에서 나무(육림)로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죠. 제가 지금 장사나 서비스업에 뛰어들겠습니까.”
- 동물도, 물고기도 키우지 않습니까.
“뭔가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육림은 나라의 인프라를 만드는 일과 비슷합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셈입니다.”
- 얘기가 좀 거창한데요.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의 업적 가운데 밀리언 트리 프로젝트(Million Trees Project)가 있어요. 맨해튼 곳곳에 나무 100만 주를 심는 거죠. 도시의 온도가 내려가는 효과가 있습니다. 서울시장도 비슷한 운동을 하면 어떨까요. 급격한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 말이 10년이지 짧은 기간은 아닙니다.
“첫해에 30~80㎝ 남짓 묘목 2500여 주를 심었습니다. 해마다 비슷한 수량을 구입했어요. 지금까지 2만~3만 그루 정도 됩니다.”
-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하지 않나요.
“그럼요. 끝이 없죠. 1년에 세 번은 나무 밑의 풀을 베어줘야 해요. 풀이 무성하면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거든요. 묘목 뿌리가 자리를 잡으려면 3년은 지나야 합니다. 요즘에는 하루 10만원을 줘도 풀 벨 사람을 구할 수 없어 걱정이 큽니다.”
- 육체노동이 고되지 않습니까.
“힘들긴 왜 힘들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밥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주변에 은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무를 심으라고 적극 추천합니다. 비가 오면 나무에 물이 올라서 좋고, 날씨가 더우면 더 왕성하게 자라서 좋고 하루도 불평할 날이 없어요.”
-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당연하죠. 무엇보다 일이 있잖아요. 어제도 가위를 들고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사랑할 대상도 생겼고요. 큰 나무에게는 ‘잘 자랐다’라고 칭찬하고, 작은 나무를 보면 ‘조금 더 자라야지’라고 격려합니다. 나무와 교신하는 거죠. 믿기지 않겠지만 아픈 나무들이 ‘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도 들을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희망이 보입니다. 나무들이 커서 숲을 이루는 것을 보려면 저도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농장을 열었던 2005년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1994년 신장암 수술을 받았는데, 그때의 암세포가 뒤늦게 췌장으로 옮겨간 거죠. 나무를 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2012년에는 폐암수술을 받기도 했죠. 그때도 나무가 있었고요. 생명의 은인쯤 될까요. 서양의학에서도 암 환자에게 나무를 심으라고 권한다고 합니다.”
- 앞으로도 나무와 함께하시겠죠.
“농장 언덕바지에 제가 갈 곳도 정해 놓았습니다. 화장을 한 다음에, 유약을 쓰지 않은 토기에 유골을 담아 묻어달라고 가족들에게 부탁했어요. 1년쯤 지나면 모두 분해돼 자연으로 돌아갈 겁니다. 유약을 칠한 도자기는 습한 곳에서 곰팡이가 낄 수 있답니다.”
곽 교수가 지난 삶을 돌아본 『어느 특별한 재수강』(인플루엔셜)을 냈다. 30년 전 제자였던 신영욱 파라다이스 전무가 성공과 행복의 참뜻을 묻고, 그가 답하는 형식이다.
- 26세 서울대 최연소 교수에 제자가 1만여 명이나 됩니다. 그중 CEO가 1000여 명, ‘CEO의 영원한 스승’이란 별명도 있습니다.
“다 옛날 일이죠. 초창기 기업특강을 할 때는 제가 최연소였는데 언제부턴가 최연장자가 됐더라고요. 제가 알았던 것도 구식이 됐죠. 누가 지금 일흔 노인의 얘기를 듣겠어요.”
- 학점이 짜기로 유명하셨죠.
“수강생 20~40%에게 F를 줬어요. 우리 학생들이 미국에 비해 공부량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은퇴 10년여 전부터는 많이 너그러워졌어요. 학점이 나쁘면 유학 가는 데 지장이 컸기 때문이죠.”
- 요즘 주된 관심사가 있으신가요.
“정보통신기술(ICT)이 바꿔놓은 경영환경 변화입니다. 너무 빨리 변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죠. 애플만 해도 자체 공장 없이 전 세계를 주름잡았죠. 월마트는 재고 제로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고요. 백화점에서 고객 성향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전략이 없으면 기업이 생존하지 못할 겁니다.”
- 한국 경제에 한마디 하신다면.
“요즘 기업인들과 만날 때 빠뜨리지 않고 말하는 게 있습니다. 대기업이 손대지 않는 분야가 하나라도 있으면 대보라고요. 다들 대답을 못합니다. 예식장이고, 커피숍이고, 빵집이고, 일반 서민이 먹고살 건 남겨둬야 합니다. IBM에서 밥장사 한다는 얘기를 들어봤나요. 이러다간 시장경제의 기초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 대표적 친기업 학자이신데요.
“그만큼 문제가 예사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돈이 된다고 대기업들이 달려들어선 안 됩니다. 경제민주화, 동반성장, 이런 걸 꺼내는 게 아니에요. 일자리가 줄면, 소득 불평등이 심해지면 모두 ‘못살겠다’고 일어날 수 있어요. 체제 자체가 흔들립니다. 지론이지만 최고의 복지는 직업입니다. 전경련이 대체 뭐 하는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규제에 나서야 합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신경림 시인의 ‘나무 1’ 마지막 대목이 떠올랐다.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중략)/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나무 값 궁금해요? 공시지가처럼 매년 ‘단가표’ 산정하죠
그중 눈에 띄는 게 ‘조경수목 단가표’다. 조달청이 매년 산정하는 것으로, 국가에서 나무를 구입할 때 기준으로 사용한다. 부동산으로 치면 공시지가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조경수 가격은 어떻게 결정할까.
수종(樹種)에 따라 값은 다르지만 주요 지표는 나무의 높이(H)와 굵기(R)다. 높이와 굵기의 단위는 각각 m와 ㎝다. 업계에서는 굵기를 ‘전’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름 1㎝는 1전, 10㎝는 10전이다. 일반적으로 지면 부근의 굵기를 측정한다. 전문용어로 ‘근원직경’이라 부른다.
곽 교수 농장에 많이 있는 이팝나무의 올해 가격을 알아보았다. 4만4200원(H 2.0XR 4)부터 294만9000원(H 4.5XR 30)까지 10단계로 나뉘었다. 밑동이 굵을수록 값도 비싸다.
“한 단계 올라가는 데 보통 2년을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경업자에게 팔 때는 많아야 단가의 40%밖에 받지 못해요. 나무를 캐고, 싣고, 옮기는 건 그들의 일이거든요. 처음에는 부르는 대로 팔았지만 지금은 단가표가 있으니 속을 일은 없죠.”
곽 교수는 나무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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