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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퇴직금+3억인데도…'희망퇴직 안하는' 그 회사


위로금 3억~4억 희망퇴직도 손사래 “이런 불황에 나가봐야 할 게 없다”

위기 감도는 동남권 중공업 벨트 르포



1일 오후 울산광역시 전하동 현대중공업. 930만㎡(약 281만 평)의 드넓은 공장 내 도로 위로 수백 t 넘는 선박 구조물이 대형 수송차에 얹혀 천천히 움직인다. 배를 짓는 도크 위로는 초대형 갠트리(골리앗) 크레인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현장은 활기찼다. 하지만 불안과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같은 날 오후 3시. 10분 휴식시간. 작업장 곳곳 흡연 장소에 모인 직원들이 짧은 대화를 나눈다. 전직 노조 간부였던 한 직원은 “한 달 남은 대선은 별 얘깃거리가 안 된다. 현재 진행 중인 희망퇴직이 최대 화제”라고 말했다.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은 지난달 22일부터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9일까지다. 대상은 50세, 과장급 이상, 사무·기술직이다. 예상 규모는 2000여 명. 하지만 1일 현재 50~60명밖에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퇴직금 말고도 위로금으로 1인당 3억∼4억원(기본급 60개월분)을 더 주는 조건인데 말이다. 한 직원은 “회사를 나가봐야 이런 불황기에 할 게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사는 ‘인력 구조조정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과장·부장급이 너무 많은 기형적 인력 구조를 바꾸려는 것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의 희망퇴직은 창사 40년 만에 처음이다. 정년을 60세(기존 58세)로 늘린 게 1년도 안 된 시점이다. 그러나 조선업계 시황이 최악 수준으로 떨어지며 상황이 싹 바뀌었다. 이 회사 수주량은 10월 말까지 연간 목표의 절반을 겨우 넘겼다. 수주 잔량도 역대 최고치(2008년)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노조 관계자는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희망퇴직이 더 큰 폭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시내 한식당 ‘만상’의 이상범(57) 사장은 “현대중공업 회식이 월 두세 번꼴로 있었는데 이달 들어 뚝 끊겼다”며 “희망퇴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인 거 같다”고 전했다.

포항·울산·거제·통영 등 동남권 제조업 벨트에 흐르는 위기의 불안감은 그뿐만이 아니다. 철강업계의 맏형 포스코도 구조조정설이 무성하다. 통영엔 일감이 없어 손을 놓고 있는 중소 조선업체가 수두룩하다. 일감이 있는 대형 조선사도 안심할 처지가 아니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한국의 신규 선박 수주량은 2007년 3251만 CGT(부가가치 환산 톤수)에서 지난해 1374만 CGT, 올해엔 9월 말 현재 520만 CGT다. 수주 잔량 역시 같은 기간 중 6440만 CGT, 3860만 CGT, 3003만CGT로 급감했다. 대형 조선업체들이야 고부가가치 선박과 해양 플랜트로 활로를 찾는다지만 중소 업체들은 고사(枯死) 직전이다.
1일 오후 경남 통영의 한 중소 조선소 작업장. 한창 일할 대낮이지만 일감이 없어 대부분의 작업 공간이 텅 비어 있다. 통영=강나현 기자


경남 통영시 도남동·봉평동 일대엔 중소 조선사들이 몰려 있다. 이 곳에서 삼호조선소는 이미 폐업했고, 21세기조선도 조만간 문을 닫는다. 긴 불황 탓이다. 신아sb조선 등 남은 회사들도 발버둥친다. ‘신아sb살리기 범시민대책위’ 김민재 위원장은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데 회사와 채권단은 아무 대책 없이 시간만 끌고 있다”며 “조선업이 기간산업이라면서 정부가 살릴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포항에도 불황의 여파가 확산되고 있다. 포항상공회의소가 지역 제조업체 82개사를 대상으로 4분기 경기전망을 조사한 결과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66으로 나타났다. 2009년 2분기 이후 가장 낮다. 기업들이 그만큼 불황을 체감한다는 것이다.

포항의 철강산업은 조선·건설 분야의 불황 때문에 3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포항세관 통과 물량을 기준으로 9월 수출은 8억1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23% 줄었다. 포항상의 대외협력팀 배용조 차장은 “1998년의 IMF 위기, 2008년의 리먼 브러더스 사태에도 포항은 잘 견뎠는데 요즘엔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문제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