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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Country Report]벼랑에 선 일본

“일본이 2017년 전에 부도를 낼 수도 있다. 유럽보다 먼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한때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의 투자자문을 했던 후지마키 다케시 씨가 지난 6월 블룸버그 통신을 통해 경고한 내용이다. 이에 앞서 국제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AA이던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로 두 단계나 내려 한국과 같게 만들었다. 게다가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달아 여차하면 다시 내릴 수도 있다고 했다.

한·중·일 삼국의 재무장관이 세 나라 국채를 상호 보유키로 약정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자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채권국으로 큰 소리를 치던 일본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의 기획재정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약정서에 도장을 찍고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Quadrillion으로 통하는 일본의 빚

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말할 때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세 자리씩 끊어서 새로운 단위를 붙인다. 이와 관련해 영어를 배운 사람들이 1980년대까지 많이 듣던 단위는 Thousand(천)와 Million(백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 Billion(10억)이라는 단위가 등장하더니 몇 해 전부터 Trillion(조)이란 단위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위는 무엇일까?

돈, 특히 달러나 파운드화로 치면 Trillion만 해도 워낙 큰 숫자이기 때문에 그 뒤의 단위는 사실 거의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미국에서조차 Trillion이란 단어는 국가부채가 세계적 이슈가 되면서 자주 등장하게 됐을 정도니 그 이후에 나올 단위에 누가 관심이나 뒀겠는가.

그런데 얼마 전 일본이라는 나라가 친절하게도 그 단위가 무엇인지를 알려줬다. Quadrillion(1000조) 이라고….

아즈미 준 일본 재무성 장관은 지난 5월 일본의 국가부채가 960조엔이 됐다고 발표했다. 아즈미 준 장관은 곁들여 이번 회기 말(2013년 3월 말)이면 일본의 국가부채가 1000조엔이 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아라비아 숫자로 적으면 이렇게 나온다.

¥1,000,000,000,000,000.

처음 이 숫자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동그라미를 한참 세어야 금액이 나올 정도다. 숫자감각이 떨어지는 경우엔 손가락을 몇 번이나 굽혔다 폈다 해야 할 것 같다. 이를 원화로 환산하면 숫자는 더욱 엄청나다. 무려 1경4000조원이 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의 국가부채는 아즈미 준 장관의 예상보다 더 빨리 1000조엔을 넘을 것 같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가부채 규모를 발표한 지 두 달여가 지난 7월 18일 아침 세계 각국의 부채 규모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부채시계(Debt Clock)’는 이날 일본의 국가부채가 984조7533억엔이 됐다고 알려줬다. 또 이 시점으로 일본 국민 한 사람이 부담하는 국가부채는 773만엔이라고 공개했다. 두 달여 만에 24조엔이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1000조까지는 15조엔 가량이 남았을 뿐이다.

이날 기준 일본의 국가부채를 미국 돈으로 환산하면 12조4652억달러로 같은 날 미국의 국가부채 15조8899억달러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지금의 추세라면 일본의 국가부채가 미국 국가부채 규모를 뛰어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다.

IMF는 2011년 GDP를 기준으로 일본의 국가부채가 229.77%라고 밝혔다. CIA 기준으로는 208.2%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국가부채가 GDP의 250%를 넘어서는 것조차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IMF는 2014년 전에 일본의 국가부채가 GDP의 246%를 넘을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일본의 국가부채가 이렇게 늘어나는데 문제가 없지는 않을까.

세계적 석학이자 미국 경제조사국 멤버인 칼멘 라인하트(Carmen M. Reinhart) 교수와 케네스 로고프(Kenneth S. Rogoff) 교수는 지난 2008년 세계 8개국의 금융위기를 조사한 보고서에서 국가부채 규모가 그 나라 GDP의 80%를 넘으면 재정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리스는 이 비율이 112%, 스페인은 55%에 불과한데도 금융위기를 겪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이미 이 비율이 200%를 훨씬 넘어갔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생각하면 일본은 벌써 망했어도 몇 번은 망했어야 할 것인데 아직도 건재하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

일본 먹여 살리는 최대기업, 일본은행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린 바로 다음날인 7월 12일 일본은행(BOJ)은 이틀간의 금융정책결정회의를 마치면서 기준금리를 0.0~0.1%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덧붙여 발표한 자료가 눈길을 끌었다. 일본은행이 국채 등 자산매입 규모를 현재와 마찬가지로 70조엔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일본 국채 29조엔과 일본 재무성 단기채권 9조5000억엔 등이 포함돼 있다.

국채를 산다는 얘기는 거꾸로 8850억달러나 되는 돈을 찍어 일본 정부 등에 판다는 것을 말한다. 토요타의 연간 매출 18조5830억엔의 거의 네 배 정도를 일본은행이 올리는 게 아닌가.

특히 일본 정부와 재무성 두 곳에 파는 것만도 토요타의 연간 매출의 두 배나 된다. 결론적으로 일본은행은 알려지지 않은 일본 최대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국가부채가 GDP의 200%를 훨씬 넘어도 일본 정부가 흔들리지 않는 비밀이 여기 숨어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발명품이 애플의 아이폰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의를 하건 말건 요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이코노미스트들은 미국 최대의 발명품은 달러화와 미국 국채라고 한다. 미국의 연간 경상수지 적자가 5000억달러이건 1조달러이건 달러화를 찍어서 얼마든지 갚아줄 수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실제로 달러화를 무제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국가부채가 15조달러를 넘어섰지만 미국 국채는 여전히 안전자산으로 불티나게 팔린다. 그저 달러를 찍어주면 되기 때문에 미국 국채는 ‘절대로’ 부도가 나지 않는 상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S&P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내렸을 때 미국 국채의 가격은 별 변동이 없었는데 그 충격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위기에 말린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만이 가진 특권이다.

미국만한 힘이 없는 일본은 엔화 채권을 찍어 밖이 아닌 안에다 팔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가 발행한 채권의 95% 정도는 일본 국내에서 보유하고 있다. 물론 최대 고객은 일본은행이다. 대신 일본은 요즘 엔화를 수출하고 있다. 지금이야 일본의 경제력 때문에 엔화를 비싸게 팔지만 국채 때문에 찍어낸 돈의 가치가 제대로 반영되면 폭락할 수도 있으니 비싼 값에 자국 돈을 팔아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리를 올릴 수 없는 나라

지난 7월 12일 일본은행이 금통위를 마치고 열심히 자료를 만들어 돌렸지만 사실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리지 못할 것이란 것은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다. 국가부채가 1000조엔에 육박하는 지금 일본으로선 금리를 올리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정부가 매년 지급하는 국채 이자만 해도 2785억달러로 GDP의 5%나 된다. 일본 정부가 국채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면 당장 GDP가 5% 줄어든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가 일본은행에 주는 이자율은 0.1%다. 그런데 기준금리를 1% 올리면 당장 일본 정부의 부담이 10조엔(약 1267억달러)이나 늘어난다. 정부 예산을 10.75%나 늘려야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가뜩이나 재정적자가 누적돼 긴축예산을 편성하고 있는 일본 정부로선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한국이나 미국이 하듯 1노치(notch ; 0.25%포인트)를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2조5000억엔이 들어간다. 그 정도라도 거의 동일본대지진 복구비에 육박한다.

그래도 얕볼 수 없는 나라 일본

이처럼 빚에 허덕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일본은 거인이다. 한국에선 쉽게 말하고 또 얕잡아 보는 나라이지만 숫자가 말해주는 일본의 힘은 그런 수준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지난 연말 발표한 새해(平成·헤이세이 24년) 예산은 전년보다 2조엔 가량 줄어든 90조3339억엔이다. 일본으로선 허리띠를 졸라매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일본 재무성은 이 가운데 42조3460억엔을 세금이나 기타수입으로 충당하고 44조2440억엔을 채권을 발행해 충당하겠다고 했다. 직전 회계연도에 일본은 92조엔이 넘는 예산 중 44조2980억엔의 채권을 발행해 충당한 바 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가 아니다. 여기에 동일본대지진 특별회계 3조7754억엔을 더해야 한다. 특별회계 5305억엔은 특별세로, 5507억엔은 일반회계 전입으로 충당하고, 2조6823억엔을 국채(부흥채)를 발행해 충당한다는 게 일본 정부의 계획이다.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치면(전입금 중복 부분 제외) 올해 일본의 예산은 93조5586억엔에 달한다. 이를 7월 18일 환율(1대 14.4234)로 계산하면 1349조4331억원이나 된다. 일본 정부 예산만 따져도 한국의 국가 GDP보다 많다. 참고로 지난 2011년 한국의 GDP(국내총생산)는 1237조1282억원이다. 이것이 일본의 모습이다.

매년 그랬듯이 일본 정부는 세수 부족분을 채권을 발행해 충당한다. 올해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친 일본의 국가부채 발행 규모는 46조9263억엔이다. 정부예산의 50.16%를 빚을 내서 조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재정적자 규모는 GDP의 10%를 넘어서고 있다. 국가부채가 많다보니 일본 정부 예산의 24.3% 상당인 22조엔가량이 국채비로 나가고 있다. 국민과 국가, 개인과 나라가 뒤섞인 게 일본이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들

“은퇴할 때 평균 재산이 25만달러다. 그런데 죽을 때 평균재산은 35만달러나 된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가 일본의 실상을 설명하는 얘기다. 은퇴를 했으면 가진 돈의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쓰고 가야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모으기만 하다가 간다고 한다. 심지어 늙어서 일할 능력이 없을 때조차 정부가 주는 연금마저 저축하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다가 가는 게 일본 국민이란다.

이런 국민적 특성은 일본 경제가 내수부족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또 지난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만든 데 이어 2000년대 들어와서도 두 번째, 세 번째 새로운 잃어버린 10년을 이어가게 하는 요인이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런데 일본 국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저축이 나라의 빚이란 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일본 정부의 빚 가운데 95%는 일본 국내에서 빌린 것이란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1인당 국가부채 773만엔을 원화로 따지면 1조1000억원 정도가 된다. 이러니 일본 국민들이 엄청난 부를 모은 것 같지만 정부 부채를 생각하면 쉽게 쓰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나라부터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복지에서 복지로 이어지는 적자

오늘날 이 같은 일본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은 무분별한 ‘복지’ 정책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은 지난 1973년 ‘복지원년’을 선언하고 복지예산을 대대적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세수가 부족해지자 국채를 발행해 이를 충당했다. 이 여파로 1977년 GDP 대비 32%에 불과했던 일본의 국가부채 비율은 1983년에 60%로 늘어났고 1997년엔 100%를 넘어섰다. 이후 채권 이자를 지급하기 위한 국채발행이 겹치면서 일본의 국가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일본이 발행하는 국채의 47% 정도는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이자 때문에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게다가 노령국가로 접어들어 복지예산을 쉽게 줄이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일본의 노다 정부는 부채가 더 이상 늘어나면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올해 긴축예산을 세워 의회로 넘겼다. 또 현재 5% 수준인 소비세를 2014년까지 8%, 2015년까지 10%로 높이는 세제개혁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게다가 후쿠시마 악몽에도 불구하고 원전 가동을 재개하려 하고 있다. 대단한 정치적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길이 순탄치는 않다. 소비세 인상에 반대하는 민주당 인사들의 탈당이 이어지고 있고 원전반대 데모가 끊이질 않고 있다. 노다 정부로선 운명을 건 도박이다.

소비세 인상과 원전 재가동의 의미는 매우 크다. 일본의 재정을 개혁할 수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은 신용평가사 피치만은 아닐 것이다. 노다 정부가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느냐는 세계 금융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진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