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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노숙인 프러포즈 이벤트 열어준 지역 주민들

중구 내 상점·기업체 참여한 기부 사업 '디딤돌' 일환으로
프러포즈 이벤트 열어주는 등 어려운 주민 4000여명 도와

김진명(51)·구주희(38)씨 부부는 2009년 서울역에서 노숙하던 중 만났다. 술독에 빠져 사는 다른 노숙인들과 달리 노숙생활에서 벗어나려 하는 노력에 서로 호감을 느꼈고, 다른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배식봉사를 하다가 더 가까워졌다. 2010년 6월, 둘은 서울 중구 황학동의 작은 단칸방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남편은 파지를 줍고 아내는 무가지를 나눠주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며 금슬을 키워갔지만 결혼식은 물론 제대로 된 레스토랑 한번 갈 엄두를 못 냈다. 남편 김씨는 "어려운 시절 만난 인연인데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 더욱 미안했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씨는 원래 서울 인근의 작은 목장에서 젖소를 길렀다. 1987년 농기계 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쳤고, 의족을 착용한 뒤부터 인생에 그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목장 일을 접고 전자부품상을 전전하며 일을 했지만 사정은 좋아지지 않았고, 1995년 전 부인과 이혼한 뒤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그로부터 1년 뒤 서울역 일대를 전전하는 노숙인이 됐다.

"한마디로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적도 있죠."

지난 17일 서울 중구 예장동의 레스토랑‘촛불 1978’에서 노숙인 출신 김진명(왼쪽)·구주희 부부가 촛불과 꽃이 놓인 테이블에서 늦깎이 프러포즈를 하고 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2005년 '이대로 가다간 정말 소리없이 사라지겠다'는 생각에 조금씩 자활 의지를 키우기 시작한 김씨는 구씨를 만난 2009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삶의 의욕을 갖게 됐다. 파지를 주우며 자립의지를 다졌고, 2010년 퇴행성 관절염이 찾아와 집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됐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희망으로 차 있었다. "아내(구씨)가 있어서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에겐 둘도 없는 보물이죠."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남산 기슭의 레스토랑 '촛불 1978'. 연인의 프러포즈 장소로 이름난 이곳을 김씨 부부가 찾았다. "여보, 사랑합니다.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만 했지?" 아내 손을 닦아주는 김씨 눈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아내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일인데…. 저희가 감히 이런 복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불행한 가정사 탓에 10여년 전 노숙인이 된 아내 구씨였다. 그래도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마음에 새겼고, 잉꼬부부로 소문났다. 하지만 김씨는 "잘해준 것 없어 아내가 섭섭해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둘의 소원을 이뤄준 프러포즈 이벤트는 '촛불 1978' 장경순(45) 사장의 기부로 성사됐다. 중구청에서 지역 내 상점·기업체 등이 이웃을 돕는 '디딤돌 사업'에 참가해보길 권했고, 장 사장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기부를 하더라도 돈만 주고 말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면서 "이렇게 우리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기부하니 '진짜 기부'를 한 느낌"이라고 했다.

중구 디딤돌 사업은 2008년 8월 시작돼 상점·학원·기업체 318곳으로 확산됐다. 신당종합복지관과 유락종합복지관, 약수노인복지관 등 3개의 거점기관과 지역아동센터 등 협력거점기관 9곳을 통해 지역 저소득 주민 4000여명에게 혜택을 줬다.

처음에는 중국요리 집에서 짜장면을 제공하고, 기업체에서 봉사활동을 가는 수준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서비스 기부' 개념이 더 강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