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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그때 그사람

윤필용 사건


 

유신선포 직후 박 대통령에 대한 불만 토로

 

1973 4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군내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던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과 그를 따르던 일단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전격 구속되는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일어났다.4 28, 보통군법회의는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을 비롯해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 육본 진급 인사실 보좌관 김성배 준장 등 장성 3명과 육군 범죄수사단장 지성한 대령, 26사단 예하 연대장 권익현 대령(육사11기·전 민정당 대표의원·전 국회의원), 육본 진급인사실 신재기 대령(육사13기·전 국회의원) 등 장교 10명에게 모반죄가 아닌 횡령·수뢰·군무이탈 죄를 적용, 각각 징역을 선고했다. 

그리고 군내에서 윤장군을 따랐던 안교덕(육사11기·전 국회의원·전 청와대 민정수석), 배명국(육사14기·전 국회의원), 박정기(육사14기·전 한전사장), 김상구(육사15기·전두환 전 대통령 동서·전 국회의원) 31명이 예편됐고 24명이 인사 이동되기도 했다.이 사건은 유신 선포 직후 궁정동의 한 식당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박대통령 측근 실세들이 저녁을 함께 하던 자리에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대통령께서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때 자리에 함께했던 신범식 당시 서울신문 사장이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이 사실을 박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노한 박대통령이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함으로써 사건화된 것이다.수사 결과 유신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윤필용 장군이 박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은 일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병력 동원과 같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모반 기도나 쿠데타 모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박대통령이 윤필용 장군을 거세하기 위해 과대 포장한 정치적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편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윤곽이 드러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일명 一心會)를 제거하기 위해 당시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 준장과 노태우 대령 등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가 오히려 보안사령관에서 3관구 사령관으로 전보되는 역풍을 맞기도 했다.당시 육사 정규 출신 특정 장교들로 결성된 하나회의 세력은 말 그대로 막강했고 바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사실상 하나회의 대부였던 것이다.

73 1월 전두환 대령은 손영길·김복동·최성택 대령과 함께 육사11기로서는 처음으로 장군으로 진급했다.2월 초 전두환 준장은 손영길 준장과 함께 박대통령이 베푼 만찬에 초대받아 그 자리에서 당시에는 고급 승용차였던 크라운 세단과 금일봉을 하사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뒤이어 노태우 대령과 정호용 대령도 장군으로 진급했는데 박대통령은 이들에게 ‘일심’(一心)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휘봉을 선물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이 그들을 든든한 친위 세력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회의 뿌리를 뽑겠다고 달려든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수사 의지는 무모한 것이었다.후일담이지만 10·26 12·12를 거치면서 신군부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자 하나회에 칼을 뽑았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2 5개월간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75년 석방된 윤필용 장군은 80년 이후 한국도로공사 사장과 담배인삼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는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윤필용 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오점을 남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회자되는 것은 어떤 범법 행위 자체보다 군의 정치 개입과 일부 정치군인들의 이기적 행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정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됐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 국군 장교단의 성숙한 의식 수준과 선진 정치 상황에서 볼 때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김영이 군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