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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태평로] "1960년생은 전원 사표 내세요"

서울의 한 대기업은 이번 연말에 1960년생(生) 직원들에게 '전원 퇴직'을 통보했다. 주민등록증에 '1960년'이 찍혀있는 직원들은 예외없이 나가달라고 했다. 물론 불황 탓이다. 1960년생이면 새해 52세가 된다. 수명은 80~90세까지 길어졌는데 그들 중 몇 명이나 퇴직 후 남은 인생을 살아갈 준비가 돼 있을까. 내년 우리 경제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다음은 1961년생 차례고, 잔혹한 불황의 한파(寒波)가 더 길어진다면 '잘리는 연령'이 40대 후반으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720만명에 이르는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세대가 은퇴나 폐업의 소용돌이에 들어가 있다. 우리 사회의 주력부대를 형성해온 이들에게 소득이 끊기면 중산층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중산층이 깨져 사회격차가 확대되면 나라가 흔들린다. 살아온 날만큼 살아가야 할 날이 남아 있는 세대가 하류층에 쌓일수록 사회변화는 더 거칠고, 광범위하고, 잔인한 형태로 발생한다. 1990년대 이후 장기불황과 초(超)고령화를 동시에 겪은 일본은 중산층의 증발로 '격차 사회'로 변형됐고 자민당의 54년 정권이 무너졌다. 지금 뉴욕 월가의 반(反)자본주의 시위는 미국 중산층의 몰락이 가져올 대격변의 예고편일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으킨 중산층의 초토화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까지 갔던 남유럽 국가들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중산층이 하위층에 흡수돼 가난·소외·불안·불만·분노계층이 불어나면 그 파괴력이 이렇게 무섭다.

2003년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33.5%였던 핵심 중산층은 1차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말 30%로 줄었다. 이번 2차 위기 충격의 내상(內傷)은 1차 때보다 더 심해 그 수치는 30% 밑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소득은 줄고 물가는 치솟아 쥐여짜이는 삶에 지친 중산층 가계(家計)들은 카드빚·사(私)금융빚까지 지면서 버티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퇴직을 해도 부모 재산을 물려받고, 자식의 부양을 받고, 친척의 도움도 받아가면서 "그래도 나는 중산층"이라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매겨왔다. 하지만 세상이 변해 이젠 혼자 힘으로 기나긴 '은퇴 후'를 보내야 한다. 소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간격은 더 벌어지고, 경제규모가 커져도 부(富)가 한쪽으로 쏠리고 일자리는 늘지 않고 있다. 초스피드의 고령화, 고용 없는 성장, 격차의 확대가 '오늘은 중산층이지만 내일은 하위층'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증세는 정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악화되다가 어느 순간 괴물로 변해 국가를 위기의 벼랑으로 떠밀고 국민을 괴롭힌다. '나꼼수'니, 품위 잃은 판사니, 선관위 디도스 공격이니 하는 것은 이미 시작된 중산층 붕괴 현상에서 파생된 정치적·사회적 격변의 조각들일지도 모른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각 정파들은 '복지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은 복지정책은 취약계층의 기초생활을 돕는 구휼(救恤)의 패러다임에 갇혀있고, 재벌과 빈민을 구분 않고 똑같은 현금을 살포하는 '무차별 무상복지' 경쟁에 빠져 있다. 갓 50세에 직장을 떠나는 샐러리맨들, 중산층의 끝자락에서 안간힘을 쓰는 구직자들의 기술과 경험·능력을 활용하고 재교육해 한 명이라도 더 일터로 다시 보내야 한다. 그것이 중산층을 지키는 길이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진정한 복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