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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건강-간

아들肝 받아 새 삶, 6시간 완주후 "아빠 건강해"

"완주하지 못할까 봐 긴장돼서 어제 잠을 못 잤어요."

23일 오전 9시, 최근 3년 내 완주기록이 없는 참가자 그룹인 H조 출발 지점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이명섭(48)씨는 주머니에서 꺼낸 알약을 삼켰다. 작년 5월 아들에게서 간을 이식받은 이후 매일 두 번씩 먹고 있는 면역 억제제다. 간 기능은 많이 회복됐지만, 준비 기간이 짧아 체력이 받쳐주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이씨는 "두 아들도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꼭 완주해 아이들에게 건강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는 태어나면서부터 B형 간염 보균자로 간 질환을 앓았다. 2003년 처음 간암이 발견된 이후 네 번이나 암 수술을 받았고, 2006년 세 번째 수술 이후 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다. 매일 10~20㎞를 달리면서 건강이 서서히 좋아졌다. 2009년까지 풀코스를 8번 완주했다. 2008년 춘천마라톤에서는 처음으로 풀코스를 4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서브 4'(3시간 57분)를 달성했다. 암과 기나긴 싸움에서 드디어 승리한 줄 알았다. 그러나 건강이 다시 나빠지면서 2009년 하반기에는 마라톤 풀코스에서 처음으로 중도 포기했다.

작년 2월엔 "간 이식이 아니면 살기 어렵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이씨는 이후 40여일 동안 혼자서 고민했다. 간을 이식해줄 수 있는 사람은 두 아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이런 날이 와버렸구나. 미안하다"고 털어놓으면서 "간 이식을 못 하겠다고 하더라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큰아들 민규(18)는 "내 간은 아빠를 안 닮아 건강하니 걱정 마세요"라고 말했고, 작은아들 진규(17)도 "아빠가 곁에 오래 있어주시는 게 우리를 위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지난해 5월 고등학교 2학년이던 민규는 결국 서울 광진구 건국대병원에서 아버지에 앞서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자기 간 70%를 떼어 준 아들에게는 명치부터 배꼽을 지나 오른쪽 옆구리까지, 아버지와 비슷한 'ㄴ'자 흉터가 생겼다. 그 흉터를 볼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달렸다. 서서히 건강을 회복한 이씨는 지난 3월부터 일주일에 2~3번 30~50㎞씩 자전거를 타면서 체력을 키웠다. 건강을 회복해서 10년 연속 완주해 춘천마라톤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것이 목표고, 언젠가 세 부자가 나란히 춘천의 아름다운 호숫가를 달리는 것이 꿈이다.

이씨는 한 달쯤 전부터 충북 괴산의 지인 회사에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간암 때문에 일을 그만둔 지 8년 만이다. "학비 때문에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갔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달렸다.

30㎞ 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난 이씨는 얼마간 더 달렸지만 치료를 위해 완주하지 못한 이들을 태우는 버스에 탔다. 기록용 칩을 반납해 더 달리는 데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는 "걸어서라도 완주하겠다"는 생각에 버스를 내렸다. 이씨는 출발 6시간 21분이 지나 결승선을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