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개미 열전] ⑪무극선생 이승조…대박과 쪽박 넘나든 고수
입력: 2009-04-22 11:43 / 수정: 2009-07-08 08:29
초심자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식에 대한 공부를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정도는 하고 시장에 참여해야 실패 확률이 적어집니다. 분석도 하지않고 논리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투자를 하면 변동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돼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주식시장의 법칙을 알고 자신만의 매매 시나리오를 짤 수 있는 수준이 됐을 때 투자에 돌입해도 늦지 않다는 것. 특히 초심자는 전체 자산의 30% 정도만 주식에 직접 투자해 이해력을 키우고 나머지는 적립식펀드 등을 통해 긴 호흡을 배워나갈 것을 주문했다. ◆ 50억 대박에서 17억 빚쟁이로 전락 학사장교 출신인 이씨는 주식시장에 발을 디딘 것은 1984년이다. 대우증권 조사부(현 리서치센터)에 입사해 '증권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같은 애널리스트 고참들이 기업탐방을 하면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주요 경제소식을 스크랩하는 시절을 보냈다. 조사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귀를 활짝 열어 놓았던 이씨는 정부의 한 경제정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자본자유화 5개년계획을 입안하고 증권사들의 대형화를 통해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놓았다. 대우증권의 경우 자본금 500억원 규모를 최대 3000억원까지 키우겠다는 복안도 포함돼 있었다. 이씨는 '이 바닥에서 정부 정책을 믿는 사람도 있느냐'는 부정적 반응이 대세일 때 남몰래 대우증권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투자기법이었다. 배정받은 자사주를 비롯해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통해 각각 5000만원씩을 변통, 1억원의 종자돈을 만들어 전액 대우증권 주식을 매수했다. 액면가 1000원짜리 주식이 800원~900원에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장기투자를 작심했던 이승조씨는 아예 대우증권 주식을 증권증서로 발행받아 장롱 속에 고이 모셔뒀다. 당시는 관련 법규가 느슨해 증권사 직원들도 자기 회사 계좌가 아니면 주식투자가 가능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1985년까지 무덤덤하던 대우증권 주가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으로 경제 활성화 붐을 타면서 1989년에는 5만4000원까지 치솟았다. 투자금 1억원이 50억원에 가까운 거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지금도 1988년 올림픽을 전후로 수직상승했던 경기를 경험했던 세대들은 아무리 경제가 좋아져도 불만을 토로합니다. 당시 짜릿한 경기활성화를 경험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벌수 있는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주식투자의 '귀재'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투자자들의 문의와 돈을 좀 굴려달라는 청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20대 초반에 꿈도 꾸지 못했던 거액을 만질 수 있게된 이씨는 자만에 빠지게 됐고 대리급 증권사 직원이라는 점도 싫증나기 시작했다. 망설임없이 사표를 던진 이씨는 대우증권 입사동기와 각각의 성(姓)씨 이니셜은 딴 'L&K투자정보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종자돈을 대준 양가 부모님께 10억원씩 나눠 드리고 나머지 자금과 투자자들의 자금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했고 이제는 100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도 생겨났습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고위 퇴역장교들 모임에서도 투자금을 선뜻 내놓았고 지인들도 돈을 좀 불려달라며 조건 없이 맡기기도 했다. 이렇게 수중에 들어온 자금이 자그마치 500억원. 하지만 비극적 종말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당시가 주식시장 장세로 보면 꼭지를 찍고 대세하락기로 돌아서는 이른바 '상투'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간 투자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미래의 직관을 키우면서 현재는 나쁘지만 미래에 과실을 얻을 수있는 종목을 연구해 나갔다. 공부를 계속하며 호구지책으로 잡다한 일을 다 해봤지만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1995년에 실패에 관대한 외국계증권사 동방페레그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법인영업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외국계 증권사라 성과급제도가 활성화돼 있어 펀드매니저들의 구두까지 닦아주며 실적을 높였습니다. 성과급으로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 일부는 종자돈으로 챙겼지요" 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직격탄과 함께 파생상품으로 큰 손실을 입은 동방페레그린이 도산하면서 또 한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대우증권에 남아 있던 직원들의 도움으로 영업을 뛰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죠" 그러던 이씨는 어려운 시절 밤잠을 설치며 공부를 통해 쌓은 노하우를 풀어낼 기회를 잡고 기사회생하게 된다. "2000년까지 증시가 큰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상승세를 탔습니다. 당시 주식투자자들에게 종목정보 등을 전화를 통해 제공하는 자동응답시스템(ARS)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기에 뛰어들어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ARS를 통해 한 달에 최대 5억원까지도 벌었다는 이씨는 이를 기반으로 일어설 수 있었고 현재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무극선생'이라는 필명도 그때부터 사용한 것이다. 빚을 갚고 김대중 정부 초기 IT(정보기술)업종이 한창 잘 나갈때 최대의 수익을 올린 이승조씨는 그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온갖 풍파를 겪으며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릎에서 사서 꼭지에서는 파는 전략을 고수해 현재는 수십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실패 뒤 체득하게 된 우직함과 단순함이라는 철학 때문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 "1인 지식기업 100개 만드는 게 목표"
"진정한 금융 싸움꾼을 키우려고 합니다. 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경험한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해 줘서 국내외 금융업계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질을 갖춘 '지적 금융전사' 100명을 키울 생각입니다. '1인 지식기업'을 만드는 셈이지요." 인천국제공항 인근에 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도 서 있다. 정글같은 주식시장에서 지친 금융전사들의 쉼터이자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초기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현재도 독신인 이씨는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루 15시간을 일하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한 달에 50권의 양서들을 독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각종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TV의 출연 요청에 쉴 틈이 없다. "주식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단순함과 우직함, 이 철학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으로 보답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무극선생은 모두에 꺼낸 말을 다시 되뇌였다.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었던 그의 말은 진정한 고수가 투자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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