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적으로 30만원이 대기업 대졸 초임이었다.
요즘 최고의 안정적인 직업으로 선망받는 공무원. 1975년도 공무원의 월급은 얼마나 됐을까. 당시 경상북도 문경군청 소속 4급 을류(현재 7급 해당) 공무원으로 일했던 김병옥씨가 최근 ‘문경인터넷뉴스’에 공개한 봉급 명세서를 보면 본봉 3만690원, 수당 8500원, 여비 1만1870원, 일·숙직비 400원(계 5만1460원)에, 공제내역은 기여금 1688원, 대한교육 900원, 제일생명보험 700원, 이동조합 2346원, 직장금고 100원, 신문대금 1150원, 전별금 500원, 축의금 300원(계 7884원)으로 기록돼 있다. 실제 수령액은 4만3576원. 5만원이 못되는 돈으로 저축도 하고 술도 마시며 살았다. ‘박봉’이라도 꼬박꼬박 월급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은 처지가 다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월급날은 아버지들의 목과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가는 날이었다. 항상 “물가는 하늘같이 오르고 애들은 콩나물같이 자라는데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어떻게 살아”라고 바가지를 긁던 어머니도 그날만은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고 반주하라며 소주까지 올려놓았다. 과자를 사들고 온 아버지는 일찍 잠든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뽀뽀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리곤 어머니에게 월급봉투를 던지며 유난히 낮게 깐 목소리로 “아껴 써”라고 말했다. 보너스라도 나와 월급봉투가 두둑한 날엔 평소 애교를 모르던 어머니가 “아유, 좋아라”라며 봉투에 입을 맞추는 걸 보며 신기해하던 기억도 있다.
월급날은 회사 풍경부터 달랐다. 사환이나 경리사원이 월급봉투를 들고 와서 나눠주면, 매달 받는 월급인데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편지봉투보다 조금 큰 크기의 누런 마분지 봉투에 본봉, 수당, 보너스, 갑근세 등의 명세가 적혀 있었는데, 혹시라도 동전 하나라도 빠진 건 아닐까 봉투를 거꾸로 들어 탈탈 털어보기도 했다. 아내 몰래 가불해 월급을 미리 축내거나 혹은 ‘비자금’이 필요한 이들은 온갖 아이디어를 짜냈다. 경리담당자에게 읍소해 명세서를 ‘위조’하는 이도 있었다. “지난달에 유난히 결혼이랑 상이 많아서…”라는 핑계를 대던 것도 월급봉투가 있던 시절의 추억이다.
80년대 각 은행이 전산시스템을 갖추면서 금융권을 시작으로 월급봉투는 점차 사라졌다. 직장인들이 월급봉투를 흔들며 모처럼 가족에게 큰소리 한 번 치는 기쁨도, ‘삥땅’의 짜릿함도 빼앗겼다.
4년제 대학졸업자 초임이 일본보다 높던 시절 이야기다. 1977년 9월 중순 삼성물산, 대우실업, 국제상사, 효성물산, 한일합섬, 반도상사, 삼화, 쌍용, 선경, 금호실업, 고려무역 등 국내 대표적인 종합무역상사 대표들이 무역회관에 모였다. 상공부 차관도 배석했다. 이들은 이날 회의에서 ‘대졸 신입사원의 임금을 종합무역상사협의회가 결정한 한도 안에서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이른바 ‘임금카르텔’이다.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향신문은 이 사실을 9월15일자에 주요 기사로 다루면서 “그동안 경쟁적으로 임금상승을 주도한 일류 기업들이 종합무역상사를 중심으로 임금상한선제를 결의함으로써 앞으로 임금인상은 이들 기업 이외에도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제동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1977년 9월15일 대기업들 ‘대졸자 초임 담합’
종합상사의 대졸자 초임이 얼마나 높았기에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이런 수선을 피운 걸까. 기업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월 15만원 선이었다. 당시 환율로 300달러가 넘는 액수였다. 기업들은 일본 대졸자 초임이 7만~8만엔(200달러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서 국내 종합상사 임금수준이 과도하게 높아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논리를 폈다.
임금을 억제하라는 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물론이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임금카르텔이 앞으로 임금정책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번 담합이 일반적인 임금수준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적이 염려스럽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당시 대졸자 초임이 고공행진을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수출 규모가 커지자 종합상사 덩치가 커졌고, 중화학산업이 본격적으로 확장되자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인재 부족 현상이 빚어졌다. 큰 대학에는 이공계나 경상계열 졸업생을 유치하려는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이 줄을 섰다. 한때 구인난이 40 대 1에 달했다니 말 다했다. 인재 스카우트전이 과열되고 임금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임금을 무한정 올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임금담합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당시 수출업체들의 인건비 비중은 10%도 안됐다. 명분 약한 담합이 지켜질 리 없었다. 종합상사들은 1978년에도 대졸 초임을 16만원으로 묶기로 비밀리에 결의했다. 하지만 채용 시즌이 되자 여러 업체들이 약속을 깼다. 16만원을 지킨 한 기업에선 신입사원 60여명이 연명서를 작성하고 임금인상 농성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해마다 임금조정 실태를 발표한다. 대졸자 초임도 조사하는데 1980년 처음으로 월 20만원을 넘었다. 1990년 41만원이던 것이 1996년 125만원, 2000년 144만원, 2008년 203만원으로 뛰었다. 지난 25일 발표한 ‘2015년 대졸 초임’은 월 290만9000원이었다. 누리꾼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도대체 어느 나라 대졸 초임이냐” “아주 소설을 써라”는 등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경총 조사는 100인 이상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한다. 국내기업의 열에 아홉은 종업원 수가 30명 이하다. 100인 이상 업체는 전체의 1%도 안된다. ‘대졸 초임 290만원’은 취업 못한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기업에 근무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청년들에게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990년에 대졸 첫월급이 50만원이 채 안되었다.
남자들은 조금 더 많았고 점심은 식권이 나왔고 지방 출장은 1박2일로 신청해서 그돈으로 당일 첫 비행기랑 마지막 비행기 타고오면 딱 맞았었다. 출장비는 기차값과 장급 여관비 정도 책정되었다.
그당시 강남 34평 아파트가 2억 정도.
그때는 모두 집장만이 가장 큰 고민이었고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88년 당시 대졸자 초임이 월 40만원에 미치지 못할 때, 개인택시 기사의 한달 평균 소득은 대졸자 초임의 3배가 넘는 150~200만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졸자 초임이 2,500~3천 만 원에 이르고 있지만 개인택시 운전자의 평균 소득은 연봉 2천 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개인택시 뿐 아니라 법인 택시 운전자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평균 근무시간인 49.5 시간을 훌쩍 뛰어 넘는 주당 72시간을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근무하지만 그들의 평균 소득은 120에서 150만원을 넘지 않는다.
박철순 선수의 연봉 2,400 만원(최고연봉)
OB(현재 두산)의 최고 스타인 불사조 박철순 선수는 그 인기만큼이나 높은 최고연봉을 받았다.
무려 2,400만원!
1980년대 프로야구 평균 연봉 1,215만원
과장급 월급 50만원. 단순 연봉은 600만원(세전, 성과급, 보너스 미포함)
이 때만하더라도 왠만한 기업의 과장급이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자식들 대학 졸업 및 결혼까지 하고도 노후준비가 걱정없는 기대였는데, 그 때의 월급은 50만원! 연봉으로하면 600만원이다.
서울의 아파트 한채 1,200만원
집한채가 1,200만원. 프로야구 선수는 1년 연봉으로 아파트 살 수 있었다.
과장급 월급은 한푼도 안쓰고 모으면 2년 정도면 아파트 한채 살 수 있었다.
집값 상승률은 30배 정도.
서민음식 짜장면 500원
소주 200원
버스비 100원
라면 100원
[출처] 기업체별 대학졸업자 초임 수당 지급표, 1984.09.01|작성자 현대사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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