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 많은 소년기엔 철저히 일본문화에 염장되었다가 갑자기 전래의 조선문화를 익혀야 하는 문화 불구의 삶을 살았다.
어떤 이들은 부인할지 모르지만 동시대인으로써 30년대생만큼 運 나쁘게 태어난 세대는 없지 않나 생각한다. 샤르트르의 말대로 '인간이 우발적 존재'라면 더구나 누구를 원망할 바도 아니지만…
그러면, 왜 불운한 세대인지를 30년대생의 출생부터 오늘까지 연대기식으로 내 개인사를 통해 여기서 시리즈로 엮어보고자 한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국민학교 입학 전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약간의 역사기록에 의존하고 이후는 가장 평범한 일개 시민으로써 내 개인의 지능으로 터득하고 체험으로 겪은 역사이야기여서 하나의 野史(야사)라 보아도 될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에피소드를 빼면 꾸밈 없는 진솔한 축소 현대사라 해도 무방하지 않나 감히 생각한다.
어제 경복궁 광장에서 盛了(성료)한 건국 60주년기념식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국가 정통사 회복이라는 史實로 기록될 것이다. 모자라는 감은 있었지만 나름 감격했다.
그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말하고자 하는 1930년대 초, 조선은 이미 일제 식민지가 된 지 20여년이 넘었다.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걲었을 뿐 30년대생들은 도무지 아는 것이 없다. 역사에 보면 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37년 다시 지나사변(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을 석권하려다 41년 미국에 대들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 63년 전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으로 패망했다
우리는 63년 전 일본의 패망을 조국의 광복으로 삼았고 그 3년 후 역사 이래 최초의 어엿한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이 땅에 건국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어제 오랜만에 기린(praise)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대여섯 살 적부터의 생애 기억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게도 30년대 후반의 생애 기억은 많이 남아있다. 다섯 살 때 긴 칼 찬 순사가 무서워 세 살 위의 형과 시골집 뒷간에서 똥을 함께 누다가 형이 순사 온다는 놀램에 겁이 나서 뛰어 나가려다 똥통에 빠져 죽을 뻔한 슬펐던 일, 서울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기차 타고 서울(당시는 京城이라 했다) 가며 열차에서 벤또라는 도시락을 사 먹던 즐거웠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그때 외할머니가 사 주신 도시락과 삶은 달걀을 먹고 차멀미를 일으켜 마주앉은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젊은 여인의 까만 단화에 먹은 것을 토해 외할머니가 어쩔줄을 몰라 했던 광경까지 생생하다. 그해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이다.
세상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리 없는 정말 철 없는 아이는 서울에 와서 전차도 타보고 다꾸시(택시)도 타보고 동물원도 구경하고 종로 네거리의 화신백화점도 들어가 보고 세발자전거도 가져보았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서울 외가에서 3년을 살고 입학 적령기가 되어 시골 본가로 귀향해서 십리 길의 시골 국민학교에 입학한 나의 장래 포부는 육군대장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내 정체성이란 것을 생각할 나이도 아니고 또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냥 사내아이이고 사내아이가 할 일은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유년기에 받는 교육이념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섭게 파고들었느냐는 것을 보여주는 군국주의 실험교육의 한 모르모트였다.
이렇게 30년대생 중 일본 군국주의 교육의 모르모트가 된 것이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적어도 30년에서 37년생, 그러니까 해방 전해까지의 취학생 모두가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실험쥐가 되었던 것이다.
실험쥐가 된 아이들은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온갖 궁핍 속에 춘하추동 일본의 聖戰(성전) 승리를 위해 눈코 뜰새 없이 동원되었다. 아직 뼈마디도 여물지않은 십대 아이들에게 메워진 짐은 허리를 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이 30년대생의 불행의 출발이었다.
오늘날 생각하면 과연 그런 시절도 있었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처음에는 총알이 모자란다며 집에서 쓰는 놋그릇을 가져오라더니 군함에 기름이 모자라니 소나무 뿌리를 캐라, 비행기 기름이 모자라니 피마자를 많이 심어라, 군량미가 모자라니 퇴비 증산을 위해 풀을 베어 오라 등등…이렇게 해서 학교 운동장은 온통 고사리 손으로 캐 온 소나무 뿌리와 퇴비 더미로 가득 차고 아이들은 뛰놀 곳이 없어 쭈그리고 앉아 땅 따먹기나 딱지 치기로 놀이를 대신해야 했다.
봄이면 모내기에, 여름이면 풀 베기와 풀 뽑기에, 가을이면 벼베기에 동원되고 겨울이면 난로 불땔감으로 솔방울 주어오기가 바빴다. 그리고 당시 중학생쯤 되면 비행장 건설에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징발되어 아예 공부는 뒷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수시로 방공훈련 한다고 우물에서 물 퍼나르기와 짚으로 꼬아 만든 소화장비를 들고 달리기 등 지금 생각하면 꼭 희극무대같은 놀음을 하기가 일수였다.
시골 학교에까지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할 리도 없는 뻔한 상황을 두고 이렇게 방공훈련을 시켰던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내가 미군기를 본 것은 전쟁 5년간 꼭 한번 있었다.
5학년 때 가을 어느날 오후로 기억한다. 주재소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공습경보가 발해진 순간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뛰어나와 방공호로 피신하며 쳐다본 푸른 하늘에 옷고름처럼 기다란 하얀 구름이 꼬리를 잇는 것을 보았다. 그런 현상을 처음 본 아이들은 용(龍) 보라며 소리쳤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은 용이라는 동물이 실존 동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용이 있다 하더라도 청천 하늘에 용이 오를 리 없고,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봐라! 맨 앞쪽에 움직여 가는 깨알만한 흰 점이 보였다. 비행기였다. 저게 비 29야! 하고 선생님이 말했다. 한반도를 유유히 종단해서 만주로 출격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바라본 흰 구름띠가 비행운이라는 것을 알리 없었다. 해주에서 서쪽 삼십리 떨어진 벽촌 학교 상공에서 전쟁 중 처음이며 마지막 본 하늘의 요새 미공군 폭격기 B-29였던 것이다.
그때 그 시절 우리들 30년대생들은 철도 모르고 먹을 것, 입을 것,신을 것, 학용품, 장난감, 온갖 것의 궁핍 속에 다만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어른에게 나아가 국가(?)에 그저 순종할 줄만 알고 살아 여기까지 왔다.
文化不具兒(문화불구아)가 된 30년대생은 문화혼혈아이기도 했다.
1945년을 기점으로 위는 중학 3년에서 아래로는 국교 1년생까지 철 모를 30년대생 아이들은 문화불구자로 자랐다.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그 나라 문자, 우리 고유의 한글 '가갸거겨…아야어여…'를 모른 채 말만 할 줄 알았으니 문화불구자에 반문맹자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는 역사책에서 알아 볼 것도 없이 내 체험의 역사가 생생하게 말해 준다. 일본이 중일전쟁 수행 중 1941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창씨개명과 함께 각급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교육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소위 고꾸고죠요(國語常用)라면서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조선말 쓰지 말고 일본말만 쓰라는 식민지 문화말살 정책이 추상같이 실시된 것이다.
[國語常用]이란 표어를 벽마다 붙여놓고 심지어 아이들에게 조선말 쓰는 친구가 있으면 선생님에게 고발하라고까지 했다.
솔직이, 당시 '조선어사건'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던 아이들은 그냥 그래야 皇國臣民(황국신민)이 되는 줄로 알고 학교에 가면 서툰 일본말만 열심히 했다. 집에서는 조선말 학교에서는 일본말 도무지 헷갈렸다.
그래 8.15 해방과 더불어 갑자기 일본말이 없어지고 조선말만 사용하게 되면서 아이들은 언어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출석 부를 때 '하이'냐? '네'냐? 순간 작동이 안돼 머뭇거리기 일쑤였으니…
1945년 여름방학 때 해방되면서 8월 17일 비상소집되어 등교해서 올드랭 송 곡에 "동해물과 백두산이…"란 가사를 붙여 부르는 애국가의 가사를 젼혀 알 리 없을 뿐만 마니라 한글 자체를 몰랐으므으로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부를수밖에 없었다.
내 경험으로는 결국 6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ㄱㄴㄷㄹ ㅏㅑㅓㅕ 라는 문자가 있고 그것이 우리 고유의 한글이라는 것을 알고 배우게 된 것이다. 당시 적어도 국교 전학년과 중학 1, 2학년생 전원이 기형적 문맹자 신세 아니었겠나 생각한다.
이 거짓 없는 63년 전 역사 사실을 30년대생 체험자 아니고 어느 누가 당시 정신적 혼돈상황을 짐작이나 하랴.
정체성 인식이 전혀 없던 아이들, 30년대생은 육체적으로는 성숙치 않은 여린 몸으로 戰時勞役(전시노역)에 동원되어 노동의 가치는 배웠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철저히 일본문화에 염장되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전래의 조선문화를 익혀야 하는 문화 탈바꿈을 하며 감수성 많은 소년기를 지내야 했다.
이렇게해서 1차적 문화혼돈을 겪은 10대의 아이들이 해방공간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나?
거기에는 물론 남 북 가릴 것없이 태극기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칼 찬 순사가 없어진 대신 38선 이북에는 노린내 풍기는 로스키, 이남에는 질근질근 껌 씹는 양키가 있었다.
그리고 또 민족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초상이 내걸린 거리를 휩쓰는 군중이 있었고 더불어 무질서와 혼란이 해방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설쳐대는 어른들의 정치광란이 있었다.
그런 것이 후에 30년대생들에 특히 불행을 안겨 주는 민족비극의 서곡이 되는 것인 줄이야 몰랐지만서도….
'나의 6·25이야기' 하다보니 생각나서 2년 전 글 재탕해 봅니다.
그러면, 왜 불운한 세대인지를 30년대생의 출생부터 오늘까지 연대기식으로 내 개인사를 통해 여기서 시리즈로 엮어보고자 한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국민학교 입학 전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약간의 역사기록에 의존하고 이후는 가장 평범한 일개 시민으로써 내 개인의 지능으로 터득하고 체험으로 겪은 역사이야기여서 하나의 野史(야사)라 보아도 될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에피소드를 빼면 꾸밈 없는 진솔한 축소 현대사라 해도 무방하지 않나 감히 생각한다.
어제 경복궁 광장에서 盛了(성료)한 건국 60주년기념식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국가 정통사 회복이라는 史實로 기록될 것이다. 모자라는 감은 있었지만 나름 감격했다.
그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말하고자 하는 1930년대 초, 조선은 이미 일제 식민지가 된 지 20여년이 넘었다.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걲었을 뿐 30년대생들은 도무지 아는 것이 없다. 역사에 보면 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37년 다시 지나사변(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을 석권하려다 41년 미국에 대들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 63년 전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으로 패망했다
우리는 63년 전 일본의 패망을 조국의 광복으로 삼았고 그 3년 후 역사 이래 최초의 어엿한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이 땅에 건국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어제 오랜만에 기린(praise)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대여섯 살 적부터의 생애 기억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게도 30년대 후반의 생애 기억은 많이 남아있다. 다섯 살 때 긴 칼 찬 순사가 무서워 세 살 위의 형과 시골집 뒷간에서 똥을 함께 누다가 형이 순사 온다는 놀램에 겁이 나서 뛰어 나가려다 똥통에 빠져 죽을 뻔한 슬펐던 일, 서울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기차 타고 서울(당시는 京城이라 했다) 가며 열차에서 벤또라는 도시락을 사 먹던 즐거웠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그때 외할머니가 사 주신 도시락과 삶은 달걀을 먹고 차멀미를 일으켜 마주앉은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젊은 여인의 까만 단화에 먹은 것을 토해 외할머니가 어쩔줄을 몰라 했던 광경까지 생생하다. 그해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이다.
세상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리 없는 정말 철 없는 아이는 서울에 와서 전차도 타보고 다꾸시(택시)도 타보고 동물원도 구경하고 종로 네거리의 화신백화점도 들어가 보고 세발자전거도 가져보았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서울 외가에서 3년을 살고 입학 적령기가 되어 시골 본가로 귀향해서 십리 길의 시골 국민학교에 입학한 나의 장래 포부는 육군대장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내 정체성이란 것을 생각할 나이도 아니고 또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냥 사내아이이고 사내아이가 할 일은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유년기에 받는 교육이념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섭게 파고들었느냐는 것을 보여주는 군국주의 실험교육의 한 모르모트였다.
이렇게 30년대생 중 일본 군국주의 교육의 모르모트가 된 것이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적어도 30년에서 37년생, 그러니까 해방 전해까지의 취학생 모두가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실험쥐가 되었던 것이다.
실험쥐가 된 아이들은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온갖 궁핍 속에 춘하추동 일본의 聖戰(성전) 승리를 위해 눈코 뜰새 없이 동원되었다. 아직 뼈마디도 여물지않은 십대 아이들에게 메워진 짐은 허리를 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이 30년대생의 불행의 출발이었다.
오늘날 생각하면 과연 그런 시절도 있었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처음에는 총알이 모자란다며 집에서 쓰는 놋그릇을 가져오라더니 군함에 기름이 모자라니 소나무 뿌리를 캐라, 비행기 기름이 모자라니 피마자를 많이 심어라, 군량미가 모자라니 퇴비 증산을 위해 풀을 베어 오라 등등…이렇게 해서 학교 운동장은 온통 고사리 손으로 캐 온 소나무 뿌리와 퇴비 더미로 가득 차고 아이들은 뛰놀 곳이 없어 쭈그리고 앉아 땅 따먹기나 딱지 치기로 놀이를 대신해야 했다.
봄이면 모내기에, 여름이면 풀 베기와 풀 뽑기에, 가을이면 벼베기에 동원되고 겨울이면 난로 불땔감으로 솔방울 주어오기가 바빴다. 그리고 당시 중학생쯤 되면 비행장 건설에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징발되어 아예 공부는 뒷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수시로 방공훈련 한다고 우물에서 물 퍼나르기와 짚으로 꼬아 만든 소화장비를 들고 달리기 등 지금 생각하면 꼭 희극무대같은 놀음을 하기가 일수였다.
시골 학교에까지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할 리도 없는 뻔한 상황을 두고 이렇게 방공훈련을 시켰던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내가 미군기를 본 것은 전쟁 5년간 꼭 한번 있었다.
5학년 때 가을 어느날 오후로 기억한다. 주재소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공습경보가 발해진 순간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뛰어나와 방공호로 피신하며 쳐다본 푸른 하늘에 옷고름처럼 기다란 하얀 구름이 꼬리를 잇는 것을 보았다. 그런 현상을 처음 본 아이들은 용(龍) 보라며 소리쳤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은 용이라는 동물이 실존 동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용이 있다 하더라도 청천 하늘에 용이 오를 리 없고,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봐라! 맨 앞쪽에 움직여 가는 깨알만한 흰 점이 보였다. 비행기였다. 저게 비 29야! 하고 선생님이 말했다. 한반도를 유유히 종단해서 만주로 출격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바라본 흰 구름띠가 비행운이라는 것을 알리 없었다. 해주에서 서쪽 삼십리 떨어진 벽촌 학교 상공에서 전쟁 중 처음이며 마지막 본 하늘의 요새 미공군 폭격기 B-29였던 것이다.
그때 그 시절 우리들 30년대생들은 철도 모르고 먹을 것, 입을 것,신을 것, 학용품, 장난감, 온갖 것의 궁핍 속에 다만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어른에게 나아가 국가(?)에 그저 순종할 줄만 알고 살아 여기까지 왔다.
文化不具兒(문화불구아)가 된 30년대생은 문화혼혈아이기도 했다.
1945년을 기점으로 위는 중학 3년에서 아래로는 국교 1년생까지 철 모를 30년대생 아이들은 문화불구자로 자랐다.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그 나라 문자, 우리 고유의 한글 '가갸거겨…아야어여…'를 모른 채 말만 할 줄 알았으니 문화불구자에 반문맹자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는 역사책에서 알아 볼 것도 없이 내 체험의 역사가 생생하게 말해 준다. 일본이 중일전쟁 수행 중 1941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창씨개명과 함께 각급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교육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소위 고꾸고죠요(國語常用)라면서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조선말 쓰지 말고 일본말만 쓰라는 식민지 문화말살 정책이 추상같이 실시된 것이다.
[國語常用]이란 표어를 벽마다 붙여놓고 심지어 아이들에게 조선말 쓰는 친구가 있으면 선생님에게 고발하라고까지 했다.
솔직이, 당시 '조선어사건'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던 아이들은 그냥 그래야 皇國臣民(황국신민)이 되는 줄로 알고 학교에 가면 서툰 일본말만 열심히 했다. 집에서는 조선말 학교에서는 일본말 도무지 헷갈렸다.
그래 8.15 해방과 더불어 갑자기 일본말이 없어지고 조선말만 사용하게 되면서 아이들은 언어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출석 부를 때 '하이'냐? '네'냐? 순간 작동이 안돼 머뭇거리기 일쑤였으니…
1945년 여름방학 때 해방되면서 8월 17일 비상소집되어 등교해서 올드랭 송 곡에 "동해물과 백두산이…"란 가사를 붙여 부르는 애국가의 가사를 젼혀 알 리 없을 뿐만 마니라 한글 자체를 몰랐으므으로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부를수밖에 없었다.
내 경험으로는 결국 6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ㄱㄴㄷㄹ ㅏㅑㅓㅕ 라는 문자가 있고 그것이 우리 고유의 한글이라는 것을 알고 배우게 된 것이다. 당시 적어도 국교 전학년과 중학 1, 2학년생 전원이 기형적 문맹자 신세 아니었겠나 생각한다.
이 거짓 없는 63년 전 역사 사실을 30년대생 체험자 아니고 어느 누가 당시 정신적 혼돈상황을 짐작이나 하랴.
정체성 인식이 전혀 없던 아이들, 30년대생은 육체적으로는 성숙치 않은 여린 몸으로 戰時勞役(전시노역)에 동원되어 노동의 가치는 배웠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철저히 일본문화에 염장되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전래의 조선문화를 익혀야 하는 문화 탈바꿈을 하며 감수성 많은 소년기를 지내야 했다.
이렇게해서 1차적 문화혼돈을 겪은 10대의 아이들이 해방공간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나?
거기에는 물론 남 북 가릴 것없이 태극기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칼 찬 순사가 없어진 대신 38선 이북에는 노린내 풍기는 로스키, 이남에는 질근질근 껌 씹는 양키가 있었다.
그리고 또 민족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초상이 내걸린 거리를 휩쓰는 군중이 있었고 더불어 무질서와 혼란이 해방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설쳐대는 어른들의 정치광란이 있었다.
그런 것이 후에 30년대생들에 특히 불행을 안겨 주는 민족비극의 서곡이 되는 것인 줄이야 몰랐지만서도….
'나의 6·25이야기' 하다보니 생각나서 2년 전 글 재탕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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