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5.19 03:17
역대 최고 수준의 대학생들… 심각한 취업난에 좌절
휴강 않고 연구 열심이지만 학생 교육은 30년 전 그대로
無책임·도덕적 해이 계속되면 학생과 부모들의 분노 커질 것
지난 5월 15일은 스승의날이었다. 지난 수년간 그러했듯이 힘든 날이었다. 학생들의 취업난 앞에 스승이라는 타이틀이 한없이 무겁고 부끄러운 하루였다.
최근 대학생들은 이전 어떤 세대보다도 성실히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한다. 외국어 실력, 컴퓨터 능력, 연수 경력 등에서 역대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취업 절벽 앞에 좌절하고 눈물을 흘린다. 공식적 청년 실업률이 11%를 넘었고 체감 실업률은 그 배 이상이다. 인문·사회계 학생들의 취업난은 특히 심각하다.
이 상처받은 세대를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위로한다? 웃기는 얘기다. 이들의 아픔은 저성장 시대 도래, 알고리즘이 인력을 대체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그리고 이 변화를 못 읽고 심지어 역행하는 정책에 기인한다. 잘못된 일자리·교육정책에 대해선 이미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동시에 책임을 느껴야 할 집단이 있다. 필자 같은 교수들이다.
교수들은 교육자이자 연구자이며 제반 사회문제에 대한 전문가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 중심에 학생들을 사회 필요 인력으로 양성하는 교육자 역할이 있다. 이 역할은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전공 분야 및 대학별로 차이가 있지만 교수들의 평균적 공식 책임은 주당 9~12시간 정도의 수업과 연 2~3편 정도의 연구 실적이다. 입시며 행정 업무가 있지만 어느 일에건 있는 부수적 업무 수준이다. 각각 두 달 이상의 여름 및 겨울 방학이 있고 그와 별도로 6~7년 주기로 1년간 수업을 면제받는 안식년이 주어진다. 학기 중에도 고정된 근무시간에 묶이지 않고, 정년 보장 심사를 통과하면 65세까지 거의 완전한 자유 생활이 보장된다.
이러한 자유는 교수직 책무 수행을 위한 재량 부여이지 그 책무의 특권적 면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는 교수들의 특권으로 변질되고 남용되어 왔다. 최소한 필자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에 그러했다. 낡은 지식 위에 군림하며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는 유한(有閑)계급. 필자가 대학 시절 내린 교수에 대한 정의다. 수업은 낡고 부실했으며 현실의 필요와 무관했다. 휴강(休講)도 부지기수였다. 우리는 그 시절을 낭만으로 회고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후진성이었고 무책임이었다.
2018년의 대학은 크게 달라졌다. 오랜만에 대학을 찾은 이들은 그 인프라나 프로그램의 비약적 성장에 너나없이 깜짝 놀란다. 이제 휴강은 찾아보기 어렵다. 연구 실적 요구도 강화되어 최소한 젊은 교수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논문을 쓴다. 대부분의 강의에 칠판과 분필 대신 파워포인트가 활용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대학 교육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부정적이다. 다수 대학은 여전히 절대적 교수 중심 사회다. 교수직은 진입은 어렵지만 일단 임용되면 사실상 정년이 보장된다. 교수들 상호 간에 건들지 않으면 아무 탈이 없는 비경쟁 카르텔 조직이다. 연구나 대외 활동은 소득·명성·관계를 가져다주지만 교육에 헌신해선 생기는 게 없다. 이러한 시스템하에서 교육은 방치된다.
그 결과 우리의 대학 교육은 질적(質的)인 차원에서 여전히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에는 끝이 없다.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쏟는 관심과 노력을 떠올려보면 된다. 하지만 이 절박한 시기에 한국사회 대학 교육의 시작과 끝은 여전히 강의실 수업이다. 대다수 대학생은 학원생들처럼 강의실을 오고 가다 졸업을 맞는다.
어려운 여건에서 교육에 헌신하는 교수들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은 교수, 특히 속칭 명문 대학의 중진 교수들일수록 학생 교육에 앞서 개인적 연구 과제며 외부 활동을 소화하느라 너무도 바쁘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일과 시간의 자유를 유한계급적 삶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모습도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교수 사회의 무책임성, 구태의연함, 도덕적 해이가 극명히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은 연구기관, 학원을 넘어 교육기관이다. 학생들을 방치하는 대학은 존립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연전에 필자가 속한 단과대학이 개최한 학부모 행사에서 한 참석자가 교수들에게 물었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온 우리 아이에게 당신들이 해준 게 무엇인가?" 학생과 그 부모들의 좌절과 분노가 교수 사회를 정면으로 향할 날이 머지않았다.
최근 대학생들은 이전 어떤 세대보다도 성실히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한다. 외국어 실력, 컴퓨터 능력, 연수 경력 등에서 역대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취업 절벽 앞에 좌절하고 눈물을 흘린다. 공식적 청년 실업률이 11%를 넘었고 체감 실업률은 그 배 이상이다. 인문·사회계 학생들의 취업난은 특히 심각하다.
이 상처받은 세대를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위로한다? 웃기는 얘기다. 이들의 아픔은 저성장 시대 도래, 알고리즘이 인력을 대체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그리고 이 변화를 못 읽고 심지어 역행하는 정책에 기인한다. 잘못된 일자리·교육정책에 대해선 이미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동시에 책임을 느껴야 할 집단이 있다. 필자 같은 교수들이다.
교수들은 교육자이자 연구자이며 제반 사회문제에 대한 전문가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 중심에 학생들을 사회 필요 인력으로 양성하는 교육자 역할이 있다. 이 역할은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전공 분야 및 대학별로 차이가 있지만 교수들의 평균적 공식 책임은 주당 9~12시간 정도의 수업과 연 2~3편 정도의 연구 실적이다. 입시며 행정 업무가 있지만 어느 일에건 있는 부수적 업무 수준이다. 각각 두 달 이상의 여름 및 겨울 방학이 있고 그와 별도로 6~7년 주기로 1년간 수업을 면제받는 안식년이 주어진다. 학기 중에도 고정된 근무시간에 묶이지 않고, 정년 보장 심사를 통과하면 65세까지 거의 완전한 자유 생활이 보장된다.
이러한 자유는 교수직 책무 수행을 위한 재량 부여이지 그 책무의 특권적 면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는 교수들의 특권으로 변질되고 남용되어 왔다. 최소한 필자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에 그러했다. 낡은 지식 위에 군림하며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는 유한(有閑)계급. 필자가 대학 시절 내린 교수에 대한 정의다. 수업은 낡고 부실했으며 현실의 필요와 무관했다. 휴강(休講)도 부지기수였다. 우리는 그 시절을 낭만으로 회고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후진성이었고 무책임이었다.
2018년의 대학은 크게 달라졌다. 오랜만에 대학을 찾은 이들은 그 인프라나 프로그램의 비약적 성장에 너나없이 깜짝 놀란다. 이제 휴강은 찾아보기 어렵다. 연구 실적 요구도 강화되어 최소한 젊은 교수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논문을 쓴다. 대부분의 강의에 칠판과 분필 대신 파워포인트가 활용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대학 교육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부정적이다. 다수 대학은 여전히 절대적 교수 중심 사회다. 교수직은 진입은 어렵지만 일단 임용되면 사실상 정년이 보장된다. 교수들 상호 간에 건들지 않으면 아무 탈이 없는 비경쟁 카르텔 조직이다. 연구나 대외 활동은 소득·명성·관계를 가져다주지만 교육에 헌신해선 생기는 게 없다. 이러한 시스템하에서 교육은 방치된다.
그 결과 우리의 대학 교육은 질적(質的)인 차원에서 여전히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에는 끝이 없다.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쏟는 관심과 노력을 떠올려보면 된다. 하지만 이 절박한 시기에 한국사회 대학 교육의 시작과 끝은 여전히 강의실 수업이다. 대다수 대학생은 학원생들처럼 강의실을 오고 가다 졸업을 맞는다.
어려운 여건에서 교육에 헌신하는 교수들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은 교수, 특히 속칭 명문 대학의 중진 교수들일수록 학생 교육에 앞서 개인적 연구 과제며 외부 활동을 소화하느라 너무도 바쁘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일과 시간의 자유를 유한계급적 삶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모습도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교수 사회의 무책임성, 구태의연함, 도덕적 해이가 극명히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은 연구기관, 학원을 넘어 교육기관이다. 학생들을 방치하는 대학은 존립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연전에 필자가 속한 단과대학이 개최한 학부모 행사에서 한 참석자가 교수들에게 물었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온 우리 아이에게 당신들이 해준 게 무엇인가?" 학생과 그 부모들의 좌절과 분노가 교수 사회를 정면으로 향할 날이 머지않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8/20180518031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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