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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강의 - 1982년 봄 손정의는 중증 B형 만성간염








시바 료타로의료마가 간다 읽은 손정의의 가슴에 대망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일생을 걸고 세상을 뒤흔드는 큰일을 해내고 싶다!’ 사카모토 료마는 하급무사 출신으로 포부가 남달리 컸다. 국가성장동력을 바다에서 찾은 료마는 나가사키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운무역회사를 차린 이후 정치적 대립관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이끌어냄으로써 해군지원대를 창설한다. 격변기를 종횡무진 내달리며 대정봉환(大政奉還) 이루어내 천왕 중심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실현했으나 암살당하고 만다. 손정의는 새로운 일본을 꿈꾸며 짧지만 불꽃 같은 인생을 살다간 사카모토 료마에게 빠져들었다. 순간 어린 손정의의 인생 방향이 결정된 것이다.
   
   
손정의는 1957 8 11 일본 규슈 사가현 도스시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손정의라는 이름은 정의롭게 살라 뜻이 담겨 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국철 선로 공터에 한국인이 하나둘 모여들어 이루어진 곳으로 번지수조차 없었다. 손정의의 할아버지 손종경은 한국 대구에서 열여덟 일본 규슈로 옮겨왔다. 치쿠호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다가 뒷날 도스시로 이주해 소작농이 되었다. 손종경은 자신이 거둔 곡식을 내다팔 때도 폭리를 취하지 않았다. 농사짓는 들인 비용에다 가족들이 입에 풀칠할 정도의 금액만 붙여 팔았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라 여겼던 것이지만 손정의 집안은 가난에서 벗어날 없었다. 부모님이 낮에 일을 나간 사이에 할머니 이원조가 손정의를 보살펴 주었다. 손정의의 아버지 손삼헌은 가계를 돕기 위해 중학교를 졸업한 생선 행상을 시작으로 양돈과 양계에 손을 댔고, 때로는 밀주를 만들어 내다파는 무슨 일에서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음식점과 파친코점, 부동산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손정의는 어린 시절부터 재일 한국인이라는 신분의 벽을 느껴야 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너 아이가조센진!”이라고 비웃으며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다치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으나, 교사가 되려면 일본 국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귀화하자고 졸라댔으나 소용없었다. 국적으로 인생이 좌우되어야 하다니…. 어린 마음에 더없이 상처였다.
   
   1973
4 손정의는 규슈 명문학교인 구루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기 성적은 300 30 정도였다. 학교에서 60 안에 들면 도쿄대에 합격할 있었다. 무렵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지망하려 했다. 그런데 1학년 여름방학 미국 캘리포니아 영어 연수는 그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일본에서 최고가 되려면 먼저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공부해야 !’ 1974 2 손정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마치 대망을 이루기 위해 도사번을 과감하게 떠난 료마 같았다. 인간으로서 자유와 가능성을 추구할 있는 미국은 그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신천지였다.
   
   
손정의는 미국에서 고교 과정을 3 만에 마쳐 모두를 놀라게 했다. 6개월 어학코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세라몬테고 10학년(고교 1학년)으로 편입했는데 교과 과정이 너무나 쉬워 성이 차지 않았다. 그는 먼저 일주일간 10학년 교과서를 모두 읽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11학년으로 올려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교장선생님은 순순히 들어주었다. 11학년 교과서도 사흘 동안 핵심을 파악하고 나서 12학년 교과서까지 사흘 만에 훑어보고 다시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이제 고등학교 과정은 필요 없으니 대학에 가려 합니다.” 대입 검정고시에 도전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으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합격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는지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대입 검정고시는 만만치 않았다. 손정의의 영어실력이 너무 떨어져 문제를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감독관에게 말했다.
   
   “
아직 영어에 서툽니다. 일영사전을 놓고 문제를 있게 해주세요.” 감독관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손정의가 끈질기게 요구하자 마침내 교육위원회 허락을 받아 주었다. 그래도 문제 하나하나를 사전 찾아가며 풀려니 시간이 너무 들었다. 손정의는 시험 시간을 연장해 달라고 다시 부탁했고 첫째 날은 11, 둘째 날은 자정이 넘어서까지 시험을 끝에 마침내 합격하여 대학입시 자격을 손에 넣는다. 미국에 1년도 되어 고교 과정을 마친 손정의는 1975 9 홀리네임스대학에 입학했다. 2학년을 마친 1977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 경제학부 3학년으로 편입했다.
   
   
손정의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사업자금을 마련하여 회사를 움직이는 노하우를 터득하고자 했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려니 들이는 시간에 비해 손에 쥐는 돈이 턱없이 적었다. 문득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래, 발명으로 돈을 벌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起業)
   
   
손정의는 날마다 하루에 하나씩 기록한 250가지 발명품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엄선한 끝에음성장치가 부착된 전자번역기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음성발신기와 사전, 액정화면을 결합한, 합성음이 들어간 전자사전이었다. 키보드로 일본어 문장을 입력하면 영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소리가 되어 나오는 형식이었다. 아이디어는 있지만 손정의 혼자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마침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는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한 명문이었고, 무렵에도 일본보다 훨씬 앞선 신기술 연구자들과 독일어·프랑스어 언어학자를 비롯하여 인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본 손정의는 버클리대학 우주물리학 교수 포레스터 모더를 찾아갔다. 그는 세계 최초로 음성발신 기술을 상용화한 세계 최고 권위자였다. 손정의에게는 당장 그에게 보수를 지급할 돈이 없어 프로젝트가 끝난 성공보수로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모더가 수락하자 손정의는 그를 중심으로 컴퓨터 조립 기술자,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설계자들을 모아 팀을 꾸렸다. 누가 봐도 팀의 중심은 모더였는데, 모더는 손정의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런 프로젝트는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이 매우 중요하네. 자네가 계획한 일이니 자네가 총괄을 맡게나.” 학생에 지나지 않는 손정의가 분야 전문가를 지도하게 것이었다. 손정의는 모더의 배려에 감사했다. 다행히 구성원들도 손정의의 말에 따라주어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국적 차별의 벽에 좌절했었던 손정의로서는 참으로 뜻밖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샤프, 스무 손정의의 재능 알아보다
   
   
마침내 1978 9 23 번역기 작동에 성공했다. 손정의가굿 모닝 입력하고 번역 버튼을 누르자 독일어로구텐 모르겐이라며 소리가 나왔다. 팀원들은 모두 듯이 기뻐했다. 며칠 가로 20, 세로 15, 두께 5㎝의 음성전자번역기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이제 기업에서 상품화하기만 하면 되었다.
   
   
손정의는 모더 교수와 함께 잠시 일본에 돌아왔다. 출발 전에 미리 소니·샤프·캐논·도시바·카시오·마쓰시타 가전업체 수십 곳에 편지를 보내 놓았다. 손정의는 전자번역기의 성공을 확신했으나, 일본 기업들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카시오 측은 제품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문전박대했다. 이후 번도 카시오를 방문하지 않을 만큼 손정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샤프와는 원만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마침내 손정의는 샤프의 사사키 다다시 전무와 만나게 된다. 이미 환갑을 넘은 사사키의 눈에 스물을 넘긴 손정의는 그대로 햇병아리였다. 그러나 사사키는 번역기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손정의에게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했다.
   
   
사사키는 손정의와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손정의는 계약금 2000만엔을 쥐고 당당히 미국으로 돌아갈 있었다. 2000만엔으로 개발팀원들에게 성공보수를 지급하여 약속을 지켰고, 자금을 바탕으로 1979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유니손월드 세운다. 손정의의 개발팀은 IC카드를 바꿔 끼우면 영어·독일어·프랑스어 5 국어로 번역할 있는 전자번역기 개발에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IQ3000’으로서, 샤프에서 세계 최초로 판매한 휴대용 전자번역기였다. IQ3000 개발로 손정의는 1억엔이라는 큰돈을 손에 넣을 있었고 번역기는 뒷날 전자수첩으로 발전한다.
   
   1979
여름 손정의는 샤프와의 교섭 문제로 일본에 왔다. 무렵 일본에서는 대형 식당이나 볼링장 등에 설치된인베이더(Invader)’라는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기계의 가격을 알아보니 대당 100만엔이었는데 미국에서는 대에 50만엔에 있었다. 손정의는 게임을 면밀하게 살펴본 인기가 사그라질 것임을 내다보았다. 인기가 꺼진다면 게임 기계들은 업주들에게는 쓸모없는 짐덩이가 것이었다. 그때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기계들을 사다가 미국에 내다판다면 큰돈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손정의의 예상대로 그로부터 인베이더 게임의 인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소식을 들은 손정의는 얼른 일본으로 돌아와 제조회사와 소유주들과 교섭을 벌였다.
   
   “
대당 5만엔에 제가 사들이겠습니다. 너무 헐값이라 생각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만, 쓸모없는 기계를 보관하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잖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팔기 어려울 겁니다. 대금은 기계로 돈을 뒤에 지불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단 20대를 미국으로 들여왔다. 미국에서도 레스토랑이나 볼링장을 돌며 교섭했다. “게임기는 공짜로 설치해 드리지요. 수입의 50% 제가 갖겠습니다.” 손정의의 끈질긴 설득 끝에 대부분은 기계를 두겠다고 동의했다. 이런 식으로 일본으로부터 350대의 인베이더 게임 기계를 미국으로 들여왔다. 합계 35000만엔이나 되는 기계를 외상으로 매입하여 반년 만에 1억엔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손정의의 사업 스타일을 엿볼 있다.
   
   1980
2 손정의는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돌아왔다. 미국에 세웠던 유니손월드는 부사장 루훙량에게 맡겼다. 이듬해 후쿠오카 남쪽 오노조시의 낡은 건물 2층을 빌려, 미국에서 세웠던 회사와 같은 이름의 기획회사 유니손월드를 세웠다. 자본금은 1000만엔, 직원은 겨우 명뿐이었다. 이때부터 그는야스모토 마사요시라는 이름을 버리고손정의 불리기를 자처한다. 회사를 등록할 때에도 한국 이름을 적었다. 친척들은 물론 주위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일본에서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느냐?” 그러나 손정의의 의지는 확고했다.
   
   “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긍지를 지키려 합니다. 그리고 국적을 차별하는 사람을 오히려 안쓰럽게 여길 일이지, 스스로 괜히 위축될 일은 아니에요.” 손정의는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진 미국에서 공부하며 국적에 대한 피해의식 따위는 버린 오래였다. 그러나 뒷날 또한 국적으로 인해 사업적으로 차별과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신화의 깃발을 올려라!
   
   
유니손월드는 일본에서 무슨 사업을 펼쳐갈지 조사하기 위해 세운 성격이 강했다. 어떤 업종이든 몇십 노하우가 쌓인 다른 회사들을 단번에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정의는 직원 앞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 “나는 5 100억엔, 10 500억엔, 뒤에는 수조엔 규모의 회사를 세울 것입니다.” 직원은 사장의 허풍쯤으로 여겨 흘려듣다가 이내 대놓고 듣기 싫은 티를 내더니 두어 만에 회사를 떠났다. 그로부터 1년여, 손정의는 꿋꿋하게 시장을 조사해 나갔다. 마침내 소프트웨어 도매업에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후쿠오카는 소프트웨어 사업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가 여의치 않았다. 손정의처럼 기반이 거의 없이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키려는 사람에게는 정보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샤프의 사사키 전무에게 상담하니 그는 손정의에게 도쿄행을 권했다. “최신 정보를 바로바로 얻으려면 역시 도쿄가 낫지 않겠나.” 이윽고 1981 여름 손정의는 도쿄로 옮겨 꿈을 현실로 펼쳐나간다. 그해 9 묘가 요시데루·다카하시 요시토의 경영종합연구소와 함께 500만엔씩 출자하여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명을 일본소프트뱅크로 정했다.
   
   
손정의는 소프트웨어 유통업을 해나가려면 먼저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와 거래를 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년 10 도쿄와 오사카에서 번갈아 열리는 전자 전시회를 주목했다. 1981년에는 오사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전국의 업자가 모두 모이는 곳이니 손정의의 일본소프트뱅크를 알리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장소였다. 손정의는 자본금 1000만엔 가운데 800만엔을 전시회에 쏟아 붓는 초강수를 두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었다. 그가 빌린 부스는 마쓰시타전기나 소니와 맞먹을 만큼 규모였다. 전시 장소를 확보하자 손정의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돌아다니며 설득했다.
   
   “
장소 마련과 설치 비용은 전액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귀사는 전시할 소프트웨어만 가져오시면 됩니다.” 번도 들어본 없는 일본소프트뱅크라는 회사에서 이처럼 전례 없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거니 제작사들은 반신반의했다. 사기꾼 취급을 하는 곳도 있었다. 순순히 응하지 않자 손정의는 더욱 설득에 열을 올렸다.
   
   “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무료 특판입니다. 그저 전시할 제품을 내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귀사가 부스를 조그맣게 열어 봤자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의 널따란 부스에서 다른 회사 소프트웨어와 함께 전시된다면 저절로 사람들의 눈길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 대규모 제품 전시는 틀림없이 화제가 것입니다.” 오사카 전시회에서 거래된 액수는 30만엔에 불과했지만 소니나 마쓰시타전기 같은 회사 부스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소프트뱅크 부스를 찾아왔다. 손정희의 일본 출전은 성공적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달쯤 , 죠신전기 사장 죠구 히로미츠가 일본소프트뱅크 사무실을 찾아왔다. 손정의를 처음 죠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사카 전시회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업체의 사장이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20 중반의 젊디 젊은 청년이라니! 더구나 임대한 사무실에는 책상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초라하기 이를 없었다. 죠구는 일본소프트뱅크에 소프트웨어 대규모 판매장을 맡기려는 교섭을 벌이러 왔으나, 너무나 젊은 사장과 사무실 분위기에 실망해 망설이지 않을 없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손정의는 차근차근 앞으로의 비전을 설명해 나아갔다.
   
   “
이제 컴퓨터 시대가 열립니다. 매장을 크게 열어 대대적으로 홍보해야만 주목을 있습니다.” 죠구가 손정의에게 지금 어느 업체들과 거래 중이며 자금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상품을 갖추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없다뿐이었다. 죠구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으나 손정의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은 대부분 규모가 크지 않고 좋은 상품도 쉽게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만 전문적인 지식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사장님 앞에 열정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저에게 독점권을 주시면 일본의 훌륭한 소프트웨어가 모두 모여 있는 일본 제일의 판매점을 만들어내겠습니다.”
   
   
마침내 죠구는 껄껄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맨손으로 독점하겠다…. 좋아, 배포를 한번 믿어보겠네.” 


 


나는 한국인, 소프트뱅크 손정의 ()



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imgnews.naver.net%2Fimage%2F053%2F2016%2F01%2F13%2F2389_42_99_20160113110045.jpg%3Ftype%3Dw540%22&type=w22014 7 일본 도쿄에서 열린소프트뱅크 월드 2014’ 행사에서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왼쪽) 중국 알리바바그룹 마윈 회장이 포옹하고 있다.photo 박미정 조선일보 기자

한편 손정의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에도 눈을 돌렸다. 무렵 일본의 50여개 소프트웨어 회사 가운데 단연 으뜸은 삿포로에 본사를 허드슨이었다. 허드슨은 대리점 판매와 통신판매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손정의는 거래를 모두 끊고 소프트뱅크와 독점계약해 달라고 청했다. 허드슨 경영자인 쿠도 유지와 쿠도 히로시 형제는 고개를 저었다. “독점을 주면 우리 매출은 크게 떨어질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매출이 떨어지고, 중간마진을 우리가 챙기기 때문에 수익률도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 손정의가 모든 것을 걸고 확실하게 팔아주겠다고 약속드립니다. 매출은 수십 오를 것입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지만 불타는 열정에 쿠도 히로시의 마음이 흔들렸다.

당신을 믿어보겠소. 착수금 3000만엔을 마련할 있겠습니까?” 당시 허드슨의 매출과 맞먹는 큰돈이었다. 오사카 전시회에서 자금을 거의 버린 손정의였지만 물러설 없었다. 그는 일단 승낙하고 동업자 묘가 요시데루와 다카하시 요시토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사람은 자본금 1000만엔 가운데 800만엔을 이미 써버렸는데 어디서 3000만엔을 구하느냐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손정의의 집요한 설득에 마침내 동업자들은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그만 손을 떼겠습니다. 우리 지분을 모두 사주시오. 혼자 운영하는 당신도 편하겠지요.” 그들은 액면가의 3배인 1500만엔을 요구했다. 허드슨에 예탁할 금액을 합치면 무려 4500만엔이었다. 손정의는 승부를 내야 때라고 판단하고 그에 따랐다.

손정의의 예상이 맞아떨어져, 죠신전기 컴퓨터 부문 매출은 이전의 배로 껑충 뛰었으며 뒤로도 전국 1위를 이어갔다. 허드슨의 매출도 함께 치솟았다. 처음부터 거래처를 확실하게 손에 넣은 손정의는 세이부백화점과 제일가전 소매점에도 뛰어들었다. 일본소프트뱅크의 평판이 저절로 높아지며 따로 홍보를 해도 주문이 들어올 정도였다. 1 사이에 다섯 번이나 사무실을 확장이전했고, 100여개 회사에서 2000개가 넘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했으며 판매가맹점도 300곳이 넘었다.

무렵에는 소프트웨어 저작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빌려주거나 복제해도 위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작사나 유통사들 모두 도저히 버텨낼 방법이 없었다.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는 소프트웨어 저작권이 법률로 인정되고 있었는데, 일본은 그보다는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마침내 1982 5 손정의의 제안으로 허드슨CSK, 나이가이 데이터 어시스트, 밀키웨이 12 회사가 모여 일본소프트웨어협회를 발족한다. 초대 회장에 손정의 자신이 취임하고 사무소도 소프트뱅크 내에 두었다. 1982 끝무렵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소프트웨어에 저작권을 인정했다. 일본 최초의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관한 사법부 판결이었다.

모래알처럼 쏟아지는 소프트웨어들 가운데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1980 즈음 소프트웨어 개발사는 대부분단칸방 회사 불릴 정도로 영세했다. 대부분 젊은 컴퓨터 매니아들이 수작업으로 개발하여 카세트테이프나 플로피디스켓에 복사하고, 손으로 매뉴얼과 함께 비닐봉지에 넣어 통신판매하고 있었다. 자갈밭에 간간이 보석이 섞여 있는 정도였다. 소프트뱅크 창업기에는 소프트웨어의 질은 고려하지 않았다. 개발사와 판매점을 하나라도 확보하여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가 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죠신전기와 허드슨과의 독점계약으로 소프트뱅크의 이름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개발사와 판매점들이 알아서 연락을 해왔다. 처음에는 거래처에 대한 선별 작업은 하지 않았다. 어떤 개발사, 어떤 제품이라도 무조건 유통했다. 무렵에는 얼마나 많은 소프트웨어를 취급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어떤 제품이 보석인지 금세 안다. 불량 재고품이 창고에 쌓여 갔다. 개발사 측에 반품하기도 어려웠다. 하나같이 영세업체들이어서 반품은 도산이나 마찬가지였고, 반품도 하기 전에 어느새 도산해 버린 곳도 수두룩했다. 결국 팔다 남은 소프트웨어들은 폐기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손정의는 직원들을 폐기장에 데려가 현장을 보여주고, 다음 직원들을 모아놓고 1만엔 지폐를 꺼내 보였다.

제가 1만엔짜리 지폐를 찢어버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고선 지폐를 반으로 쫘악 찢어 버리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지폐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에 불을 지피려는 , 손정의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폐기처분된 상품은 몇천만엔어치입니다.” 한순간 긴장감이 흐르고 직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부터 회사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무작정 아무 소프트웨어나 받아들이지 않고 선별작업을 강화한 것이다. 뒤로도 불량 상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소프트뱅크는 순항을 계속 이어 나아갔다.


PC’ ‘MZ창간

무렵 컴퓨터 잡지들은 손정의를 경계하는 업체들의 부탁을 받고 일본소프트뱅크의 광고를 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손정의는 아예 1982 5PC’ ‘MZ 동시 창간했다. ‘PC NEC 퍼스널 컴퓨터에, ‘MZ 샤프의 MZ시리즈에 맞춘 정보지였다. 기종별 정보지라는 콘셉트도 손정의의 아이디어였다. 창간호 80% 반품되는 실패를 겪었지만 1억엔을 과감히 투자하고 책값을 내린  TV 광고 공격적으로 과감히 홍보를 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10만부가 사흘 만에 팔려나갈 만큼 대성공이었으며, 이후 3 뒤에는 잡지 9종을 매달 60만부씩 발행할 만큼 성장했다.

1982
손정의는 중증 B 만성간염 판정을 받는다. 평소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로해지곤 했지만 회사를 일구느라 잠이나 식사가 불규칙한 탓이려니 생각했다. 확실한 치료법이 없어 B 만성간염은 불치병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5 정도….”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겨우 25 젊은 나이인데! 손정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렵 일본소프트뱅크는 손정의로 통했다. 손정의는 거래처는 물론 사원들에게도 입원 사실을 숨겼다. 몇몇 간부사원들은사장님은 미국 유니슨월드 일로 미국에 있다 둘러댔다. 외부에서도 손정의와 가까운 사람 외에는 일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샤프의 사사키 전무는 손정의를 대신해 회사를 이끌 인물로 일본경비보장( 세콤) 부사장 오모리 야스히코를 소개해 주었다. 뒷날 손정의의 참모로 불리며 소프트뱅크 대표이사에 오르는 미야우치 겐은 오모리의 권유로 일본소프트뱅크에 들어온다. 손정의는 회사 일에서 손을 떼고 치료에 힘쓰며 병상에서 경영서, 역사서, 자기개발서 4000여권의 책을 읽었다. 1984 3 손정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도쿄 미나토구의 도라노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전문의 구마다 히로미츠가 있었는데, 그의스테로이드 이탈 요법으로 손정의는 가까스로 회복할 있었다. 손정의는 생명의 은인 구마다에게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1986 2 손정의는 사장으로 복귀했다. 그가 없는 동안 경영을 맡았던 오모리는 회장으로 물러났다가 3 뒤에는 회사를 떠났다.

아스키 니시 가즈히코는 손정의의 가장 라이벌이었다. 그는 손정의와 마찬가지로 스무 젊은 나이에 컴퓨터의 가능성을 꿰뚫어보았다. 무렵 게이츠는 세계 컴퓨터업계의 총아로 떠올라 있었다. 니시는 미국에서 게이츠를 만나 친분을 쌓고, 마이크로소프트 BASIC 독점판매권을 손에 넣고 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에 오르며 일본 컴퓨터업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손정의와 니시는 1983 6 정면으로 부딪친다. 무렵 일본 컴퓨터소프트웨어는 호환성이 없어 불편했다. 니시는 회사들마다 MSX 사양의 컴퓨터를 개발하고 마이크로소프트 BASIC으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끔 통일하려 했다. 소니, 도시바, 산요, 캐논, 파이어니어 유명한 회사들도 참여했다. 그러나 손정의는 이런 움직임에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아스키와 마이크로소프트만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니시에게, 회사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독자적인 통일규격을 만들겠다고 받아쳤다. 일은 매스컴에서도 크게 다룰 만큼 화젯거리였다. 창업한 겨우 2 지났지만 일본소프트뱅크는 소프트웨어 유통에서 압도적인 보유율을 쥐고 있었고 개발 회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MSX 전쟁은 6 26 손정의와 니시의 회담으로 결말이 난다. 니시가 양보하여, 모든 하드웨어 회사에 기본 사양을 공개하고 로열티를 받지 않기로 합의했다. 전부터 좋지 않았던 사람 사이는 일로 인해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그와 달리 게이츠는 손정의와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1995 그는 자신의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손정의에게 보낸다. 책에 게이츠는 손정의를 위해 이렇게 썼다. “당신은 못지않은 뛰어난 승부사입니다.” 이것은 손정의에 대해 알고 있어야 있는 말이다. 말은 손정의에게 기쁨을 주었다. 손정의는 사업을 펼칠 때마다 게이츠에게 의견을 청했다.


세계로 세계로

손정의는 일본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던 1994 6월스트리트저널세계 최대 컴퓨터 관련 출판사인 지프 데이비스가 출판 부문과 전시회 부문 매각에 나섰다 기사가 실렸다. “바로 이거다!” 손정의는 무릎을 쳤다. 그는 인수합병 분야 세계 최대 기업인 모건스탠리를 고문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에 회계감사를 맡긴 입찰 준비에 들어갔다.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관련 정보를 끌어모으는 한편 뱅크오브뉴욕, 맨해튼, 시티 미국 은행과 일본 은행에서 융자받아 16억달러를 마련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손정의는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1994 10 25, 입찰을 시간 앞두고 사무실에 모여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투자회사포스트먼 리틀 단독교섭권을 얻어 지프 데이비스를 차지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지프 데이비스 측에서 유력 매수처인 소프트뱅크가 자금이 부족하다는 루머를 듣고 입찰 전에 거래를 마무리 지어 버린 것이었다.

포스트먼 리틀이 제시한 금액에 1억달러, 아니 2억달러를 얹어드리겠습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손정의가 거듭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쉽고 분했지만 이미 돌이킬 없는 일이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빼앗기다니! 호텔방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는미국식 인수합병이란 제대로 배웠구나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손정의는 마음을 다잡고 먼저 전시회 부문을 인수하기로 했다. 1994 11 2 소프트뱅크는 22072000달러로 지프 데이비스 전시회 부문을 인수했다. ‘컴덱스 전시회 부문도 8억달러에 인수하여 미국 전시회시장의 75% 손에 넣었다.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 인수도 포기하지 않았다. 손정의는 지프 데이비스를 사들인포스트먼 리틀 테드 포스트먼을 찾아갔다. “내가 이걸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팔라고 하는 거요?” 예상대로 포스트먼은 어이없다는 콧방귀를 뀌었다. 뒤로도 손정의는 끈질기게 인수 교섭을 벌였다.

저는 얼마에 사서 얼마를 벌어들이느냐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윌리엄 지프 만든 위대한 출판사를 손에 넣고 싶을 뿐입니다. 출판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포스트먼 리틀은 투자회사이니 언젠가는 지프 데이비스를 팔겠지요. 그렇게 년을 낭비하느니 지금 바로 저에게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파시는 어떻겠습니까?” 번이고 찾아가 진심을 담아 계속 조르자 마침내 포스트먼의 마음이 움직였다. 1995 1 19 소프트뱅크가 21억달러에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을 인수했다는 발표가 났다. 금액은 손정의의 예상 금액과 차이가 없었다. 실로 집념의 사나이라 하겠다.


소프트뱅크 손정의·알리바바 마윈의 역사적 만남

손정의는 캘리포니아대학 시절유니슨 월드 세운 적이 있다. 동업자였던 루흥량은 1995 유니테크텔레콤에 자본을 투자해 중국 통신네트워크 사업에 진출했고, 2000년에는 벤처캐피털 홍콩 현지법인소프트뱅크 차이나펀드 세웠다. 무렵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는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기업 운영 환경도 체계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손정의는세계 제일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을 제패하는 것이 세계 제패의 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먼저 소프트뱅크 차이나펀드 담당자가 선정한 중국 관련 기업 경영자와 만났다. 그들의 수만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손정의에게는 사람 보는 눈과 기업 장래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다. 수많은 경영자를 만나면서 길러진 능력이다.

1999
10 31 베이징 푸화빌딩에서 손정의와 마윈은 투자자와 경영자로 처음 만난다. 만남은 모건스탠리 아시아지역 투자분석가 서닐 굽타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으며, ‘6 만의 담판으로 일컬어지며 IT 역사상 명장면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마윈은 손정의 앞에서 자신이 세운알리바바 개요, 현재 진행 중인 사업, 앞으로의 사업 방향 등을 설명해 나갔다. 그런데 6분도 지나지 않았을 손정의가 손을 내저으며 중단시키더니 대뜸 묻는 것이었다.

당신의 회사에 투자하겠습니다. 얼마가 필요하신가요?”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기에 마윈은 의아해했다.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성공 가능성을 꿰뚫어보고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윈의 대답 또한 뜻밖이었다. “지금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윈은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달러 규모의 엔젤기금을 받아 놓고 있었다. 놀란 손정의가 물었다. “투자자를 찾고 있는 아니었나요? 그럼 찾아왔습니까.”

당신을 찾아온 아니라, 누가 나를 만나보려 한다기에 것일 뿐입니다.” 마윈의 성격을 뚜렷이 있는 대답이었다. 기백과 결심이 손정의는 마음에 들었다.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B2B모델이 야후 포털사이트 모델, 아마존 B2C모델, 이베이의 C2C모델에 이어 인터넷4모델임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또한 알리바바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성공을 예감했다. 여러 협의를 거친 끝에 소프트뱅크가 2000만달러를 알리바바에 투자하고 지분 30% 갖기로 확정되었다. 마윈에게 손정의는 이상적인 투자자였다. 손정의는 멀리 내다보고 장기적 발전에 주목할 알았으며, 단기간 이익을 내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손정의는 마윈에게 가지 중대한 역할을 했다. 투자를 받은 뒤에도 알리바바는 좀처럼 흑자를 내지 못했다. 수익 모델이 필요했기에 마윈은 일본에 가서 인터넷 메신저와 온라인게임시장을 살펴보았다. 일본 방문 계획을 손정의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았는데, 일정 마지막 손정의에게서 자신을 만나고 가라는 전화가 왔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마윈이 손정의의 사무실에 들어가자 손정의가 대뜸 말했다.

마윈, 알리바바와 이베이의 플랫폼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있나요? 다들 이베이가 넘지 못할 산이라고들 하지만, 우리 야후재팬은 해냈습니다. 알리바바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손정의는 야후재팬을 포털사이트만이 아닌 C2C전자상거래사이트로 운영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는 이베이와 어떻게 싸워 물리쳐 시장점유율 70% 이루어냈는지 마윈에게 들려주었다.

이베이 경영진은 아시아를 모르고 그들의 전략은 아시아 시장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요. 승산은 충분합니다. 자금은 얼마든지 지원할 테니 한번 승부를 걸어보세요.” 마윈은 그동안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순간의 감격을 두고두고 회고한다. 만남에서 마윈은 전자상거래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달았고, 알리바바를 2 야후가 되게끔 돕겠다는 손정의의 진심을 확인했다

마침내 2003 5 10 오늘날의 알리바바그룹을 있게 타오바오닷컴 탄생한다. 마오는 대대적인 홍보를 위해 손정의에게 자금을 요청했고, 약속대로 손정의는 8200만달러를 투자했다. 중국 인터넷업계 사상 가장 금액이었다. 거액의 투자자이면서도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경영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고 마윈에게 모두 맡겼다. 손정의와 마윈은 반농담으로 서로첫눈에 반했다 말한다. ‘영혼의 반쪽이라고까지 한다. 그야말로 보기 드문 두터운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