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타계 10주기 '아산' 정주영을 회고하다

[이코노미플러스] 타계 10주기 '아산' 정주영을 회고하다

2011.02.03 05:14 / 수정 : 2011.02.03 07:24

한국기업세계화의 원조 선구자
도전과 개척으로 일군 신화창조

현대아산사옥 구내복도 벽면에 게시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진 옆으로 여직원들이지나가고 있다. 활짝 웃는 얼굴의 정주영 회장 생전 모습이 시공을 초월해 그들과 교감하는 듯 하다.
 국내 최고경영자들이(CEO) 가장 존경하는 한국의 기업인은 누굴까? 또 경영학자, 경제학자들이 첫 손가락에 꼽는 기업인은 누굴까? 물론 정답은 없는 질문이다. 사람마다 높이 평가하는 덕목과 가치가 다를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설문결과를 보면 대체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를 최고로 꼽는 답변이 가장 많이 나온다. 기업경영의 실제와 이론에 밝은 전문가들이 정주영 회장을 최고의 기업인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뭘까?  

“정주영 회장은 한국경제의 세계화를 몸소 이끈 선각자이자 선구자였습니다.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남보다 앞서 세계시장을 개척해 다른 한국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으신 분이죠. 정회장은 늘 ‘당신, 해봤어?’ 하시면서 앞장 서서 도전을 독려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주력 수출품과 서비스 상당수는 그분의 창의와 도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동차, 선박과 해양설비, 종합건설, 중장비, 대형엔진, 해운업 등이 바로 그런 예들입니다.”

음용기(70) 이노티브 회장의 말이다. 음회장은 현대건설로 입사해 현대미포조선, 현대종합상사 사장 등을 역임한 옛 현대그룹 전문경영인 출신이다. 아산 정주영회장이 그룹의 사세를 크게 늘려가던 전성기 시절을 함께한 산 증인인 셈이다. 음회장은 환갑이 넘은 2000년에 벤처기업 이노티브를 창업했다. 정주영 회장의 개척정신을 고스란히 흡수했던 ‘현대맨’답게 나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창업이라는 새 도전에 나섰던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CEO 200명을 대상으로 국내 CEO들의 특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CEO들은 CEO의 덕목으로 결단력(43.3%), 성실성(22.5%), 도전정신(17.5%), 친화력(10.8%) 등을 중요하게 꼽았다. 가장 존경하는 CEO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정주영 회장이라고 답변한 CEO들이 가장 많았다. CEO들이 중요시한 덕목 중 어느 한 가지도 모자람이 없었던 기업가가 정주영 회장이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기업가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핵심은 도전정신이 아닐까. 도전정신은 기업가가 목표를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성취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게끔 하는 원초적 동력이기 때문이다. 허영도 울산대 경영학부 교수의 말이다.

“정주영 회장은 한국경제 개발 초창기, 그 어려웠던 시절에 남다른 도전정신으로 기업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당대의 시대적 환경과 세상의 변화를 읽고 자신의 사업차원을 넘어 한국 경제발전에 꼭 필요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내는 직관력이 탁월했습니다. 물론 그것을 결국 성공하고야 마는 실행력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충분히 존경 받을 만한 위 대한 기업가였습니다. 그를 널리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나 흘렀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특히 정 회장의 생전 모습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도 그를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꼽아 눈길을 끈다. 카이스트(KAIST) 혁신 및 기업가정신 연구센터의 2009년 ‘한국형 기업가 정신 모델 정립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국내 기업가 1위가 정주영 회장으로 나타났다. 대학생들이 정주영 회장을 꼽은 이유로는 도전정신, 추진력, 결단력, 실천력,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 국익과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 등이 많이 언급됐다.

근면ㆍ검소ㆍ친애 솔선 ‘현대문화’로 승화

 또 카이스트 연구진은 표본기업가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눴는데, 정 회장에 대해서는 ‘전략가형’이자 ‘기회추구형’ 기업가로서 변혁과 효율을 추구한 리더의 범주에넣었다. 특히 연구진은 정 회장의 근면성실의 리더십과 한국 경제발전 신화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산 정주영 회장은 근면, 검소, 친애를 현대그룹의 3대 사훈으로 삼았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 솔선해 사훈을 신봉하고 실천했다. 한국 최대 재벌 총수였지만 구두 한 켤레를 10년 동안 신는다 든가, 밑단이 해진 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닌 사람이 바로 그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남다른 성실과 신용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궜지만 청년시절 다져진 생활습관은 평생을 관통했던 것이다.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저축을 하면 자연히 신용이 생기고, 자신도 모르게 성취감이 쌓여서 사람이 크게 되고 나중에는 기적 같은 큰 일도 다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80년대 어느 날 현대그룹 간부대상 특강에서 강조한 말이다.

현대그룹 사훈은 단지 현판 속의 글씨로 박제돼 있지 않았다. ‘왕 회장’이 앞장서서 실천하다 보니 임직원들에게도 사훈이 생활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정재영(64) 필 컨설팅 대표(현대중우회ㆍ현대중공업 퇴직자 친목모임 사무총장)는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현대 출신 사람들은 대개 근면, 검소하고 서로 아껴줄 줄 아는 성품들을 가졌습니다. 정 회장님이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자연스레 따르게 된거죠. 저는 현대 시절 아침 6시 이전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뱄는데 그만둔 지 12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대로예요. 500명이 넘는 중우회 회원들이 대부분 그렇더군요. 회장님은 장발을 싫어하셨는데, 머리 길면 샴푸, 비누, 물 많이 쓰게 되는데 뭐가 좋으냐는 이유였죠. 당연히 직원들도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다녔지요.

언젠가 중우회 회원들이 단체로 모임을 가졌는데, 주변에서 ‘다들 예전에 군대 계셨던 분들이냐’고 물어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회원들은 평생 회사 유니폼만 입고 살아서인지 옷사치도 안해요. 그러고 보니 외제차도 거의 안모는 군요. 어쩌면 회장님께 서늘 강조하셨던 애국심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비범한 직관력과 실행력이 최대 특징

 정주영 회장의 생전 별명 중에는 ‘왕회장’, ‘불도저’가 가장 유명한 축에 든다. ‘나를 따르라’식의 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불가능은 없다’며 저돌적으로 밀어 붙이는 추진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할 수 있다(Can Do)’와 ‘해봐(Just Do It)’정신, 이 두 가지는 정 회장이 스스로에게도 암시하고 임직원들에게도 주입시킨 현대정신이다.

김중겸 현대건설사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정주영 회장께서는 ‘현대건설이 언제 해본 사업을 했느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남들이 모두하는 일을 하는 것은 ‘현대정신’이 아닙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을 해나가는 게 바로 ‘현대정신’이죠.”

아산의 선구자적, 개척자적 사업 추진은 오히려 무모한 모험주의로 종종 폄하됐다. 그가 도전한 사업들 상당수가 세상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결국 그런 일들이 ‘기적’으로 불렸다. 허영도 교수는 “정회장을 가리켜 흔히 ‘무대포’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의 설명이다.

“정주영 회장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직관력과 실행력입니다. 그는 어떤 일이든 기획하고 나면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로 밀고 나갔습니다. 불안감이나 회의는 단 1%도 떠 올리지 않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죠.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일단 해보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고 반드시 달성해내고야 말았죠. 올림픽 유치, 사우디 주베일산업항공사, 조선소 설립용 차관도입 등은 그런 실행력의 결정체들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단지 기업가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유의 진취적기상과 개척자정신으로 여러 방면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역임했다. 역대 최장수 전경련 회장이었다. 이 시기 그는 재계의 대표자로서 한국 외교의 최일선 민간대사로 크게 활약했다. 특히 1981년 올림픽유치 위원회위원장을 맡아 일본 나고야를 물리치고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것은 한국 스포츠 외교사에 기적과 같은 업적으로 남아있다.

“나 정주영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누구보다도 안락하고 호화로운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맞고 있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외면한 채 나 혼자만 편하게 살 수 는 없습니다. 나는 남은 여생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고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평생 땀 흘려 이룩한 부와 타고난 천부의 건강과 많은 경험을 바쳐 참신하고 양심적이며 정의감에 불타는 애국 동지들을 규합하여 국가를 위기에서 구출하자는 일념에서 새로운 정당을 출범시키려는 것입니다.”

기업가 넘어 한국을 움직였던 거물

정주영 회장이 1992년 1월 배포한‘나의 깨끗한 정치 신념’이라는 소책자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그해 2월 국민당을 창당했다. 정치 무대에도 전장을 던진 것이다. 한 달 보름 만에 치른 14대 총선에서 국민당은 31개의 의석을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정 회장은 여세를 몰아 대권에도 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노욕에 사로잡힌 재벌이 권력까지 가지려 한다”는 반대여론의 벽을 결국 넘지 못했다. 이 실패로 정 회장은 다음 정권으로부터 혹독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5년의 암흑기. 하지만 그는 오뚝이였다. 국민의 정부들어 햇볕정책이 본격 추진되면서 정회장은 생애 마지막 사업카드를 들고 컴백했다. 민족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목표로 한 대북사업이었다.

“어릴 적 가난이 싫어서 판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나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이제 그 한마리가 천마리의 소가 되어 그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1998년 6월 ‘통일소’로 명명된 소떼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하면서 84세의 노(老) 기업가 정주영이 남긴 말이다.

김성수 경희대 국제ㆍ경영 학부명예교수는 <아산 정주영의 생애와 경영이념>이라는 논문에서 아산 정주영을 이렇게 규정했다. “아산은 모험적인 개척가(開拓 家)이다. 새로운 일, 어려운 일에 더욱 승부를 거는 도전과 개척주의 경영이념의 신봉자이기도 하다. 언제나 인간미 넘치는 보통사람의 행동양식으로 근검과 절약, 신념과 인내, 신뢰와 신의를 소중히 한 위대한 기업가다. 그는 훌륭한 기업가가 가지고 있는 덕목을 도전과 개척주의 정신으로 실천 한대표적 창업자임을 증명하였다.”

기업가 정주영의 하이라이트 베스트 10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60년이 넘는 기업가 인생에서 일반의 통념을 훨씬 뛰어넘는 기념 비적인 사업성과를 수없이 쌓아 올렸다. 현대그룹은 고정회장의 경영 업적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10가지를 간추려 사이버 박물관에 올려놓았다. 이를 간추려 옮긴다.

▶국내최초해외건설시장진출(1965)

정주영은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길은 수출뿐이라며 1965년 국내최초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당초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공사에 응찰했을 때 만해도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마침내 수주에 성공했다. 정주영의 해외진출은 현대의 수출주도형 사업구조와 세계화 전략에 밑거름이 되었다.

▶착공 290일 만에 경부고속도로완공(1970)

정주영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간접자본시설이 확충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68년12월 반대 여론 속에서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을 시작했다. 1969년 9월 착공해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428km가 개통됐다. 불과 290일 만이었다. 그의 ‘할수있다’는 의지가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최단기간 완공을 실현시켰다.

▶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배를 진수시키다(1973)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의 창업 당시 일화는 유명하다. 정주영이 조선업에 진출하고자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정주영은 몇몇 국가와 끈질긴 협상 끝에 영국과 스위스에서 1억달러의 차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수주 실적을 요구했다. 정주영은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와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들고 그리스로 날아가 선주인 리바노스회장에게 유조선2척을 수주했다. 그 후 2년 3개월 만인 1973년 울산조선소를 완공했고, 완공식은 처음 수주한 배 2척의 명명식과 함께 거행됐다. 조선소건설과 동시에 배를 진수시킨, 세계조선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국내 최초로 독자기술의 자동차 생산(1976)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정주영은 이듬해 미국포드와 자동차 조립계약을 체결하고 ‘코티나’ 자동차를 조립ㆍ생산했다. 이후 ‘자동차입국’을 꿈꾸며 적극 투자한 끝에 1976년 고유 모델 ‘포니’를 생산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자체모델을 생산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된 순간이다.

▶20세기 최대역사 주 베일산업항공사(1976)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사우디 주 베일산업항. 공사금액 9억3000만 달러는 1976년 당시 환율로 4600억원. 그해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세계적인 건설업체 10개사가 각축을 벌였지만 일주일 동안 씻지도 않고 견적서를 준비한 현대가 극적으로 공사를 따냈다.

▶‘정주영공법’으로(1984) 서해안간척지개발

정주영은 80년대 초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에 착수했다. 서해안의 지도를 바꾸는 대역사였다. 엄청난 규모의 바닷물을 막아 농토로 전환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특히 최종 물막이공사가 가장 난제였다. 정주영은 노후화된 대형유조선을 이용해 엄청난 압력의 물의 흐름을 막아 둑을 완성하는 ‘유조선공법(일명 정주영 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여의도의 48배에 해당되는 서해안을 간척했다.

▶포니 엑셀로 미국시장진출성공(1986)

정주영은 현대자동차창업 10년 만인 1976년에 고유 모델인 ‘포니’를 생산해 해외시장에 선보였다. 또 10년이 지난 1986년에는 ‘포니엑셀’로 자동차시장의 메카인 미국 진출에도 성공했다. 정주영은 ‘한국은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라는 국가 이미지를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서울올림픽유치와 성공적 개최(1988)

정주영은 1981년 민간기업인 최초로 올림픽 유치위원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당시 한국이 일본 나고야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뒤 늦게 유치위원장을 맡은 정주영은 특유의 발상과 추진력으로 각국 올림픽위원들의 마음을 잡았다. 적극적인 맨투맨 로비와 정성을 담은 꽃바구니 선물로 한국과 한국인에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낸 것. 결국 88올림픽 개최지는 서울로 결정됐고, 정주영은 이후로도 성공적인 올림픽개최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세기의 이벤트 ‘소떼몰이’ 방북(1998)

정주영은 1989년 민간기업인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후 1998년 6월에는 ‘통일소’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을 방문했다. 이 ‘소떼몰이 방북’은 1991년 베를린 장벽 붕괴기후 사회주의 국가의 꽁꽁 닫힌 빗장을 연 보기 드문 세계적 이벤트로 지구촌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대북사업 본격화(1998~)

정주영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겼다. 그는 84세의 노구를 이끌고 1998년 10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사업을 성사시켰다. 그해 11월 18일, 분단 반세기 만에 남측 국민이 금강산을 방문할 수 있는 역사적인 문이 열렸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남북 간 대규모 물적ㆍ인적교류의 물꼬를 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