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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도세자는 조선 왕조 최악의 연쇄살인마였다 - 모두 1백여명 살해, 하루에 6명도 살인

사도세자는 조선 왕조 최악의 연쇄살인마였다 - 모두 1백여명 살해, 하루에 6명도 살인

아들 정조가 관련 기록 대부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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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대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던 사도세자. /이미지= 영화 <사도>

사도세자가 죽인 무고한 사람만 100여 명
 
영화 <사도>는 근래 개봉한 우리나라 사극 사상 보기 드물게 역사적 사실과 고증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하지만, 영화 <사도>에서는 사실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은 부분도 있다. 바로 사도세자의 살인 문제다. 영화에서는 사도세자가 한 차례 살인을 하는 것으로 그렸다.
 
하지만, 실제로 사도세자는 죽기 전까지 100여 명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 살인자’다. 영화 <사도>는 시나리오와 내용의 상당 부분을 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2010년 쓴 《권력과 인간》이란 책을 참조하고 있다.
 
정병설 교수는 책에서 “사도세자가 죽인 무고한 사람 100여 명 정도 된다”고 분석했다. 정교수는 이를 영조가 사도세자를 세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면서 쓴 ‘폐세자반교’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세자의 살인 행각을 모두 그렸다가는, 현재 관객들로부터 애틋한 동정심을 얻고 있는 세자의 캐릭터가 졸지에 사이코패스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사도세자는 옷을 입으려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관(김한채)을 베고는 그의 머리를 들고 궁궐을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1757년 6월 어느 날 벌어진 일인데, 사실 이날 사도세자는 김한채를 포함 6명의 내인을 죽였다.
 
이것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첫 살인 행각이지만, 정병설 교수는 “그 잔혹함과 살상 규모가 커서 이 사건이 첫 살인일까 의심하게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실제 사도세자 관련 일을 기록한 현고기(玄皐記)에는 세자가 사람을 많이 죽인다는 소문을 전하면서, 칼 만드는 장인이 세자에게 칼을 바치러 갔다가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가 기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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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것도 네 탓이다." 영조는 세자에게 지나치게 엄격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겼고, 부왕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쌓여 정신병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미지= 영화 <사도>
 
옷에 대한 강박증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인 직접적인 동기는 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의대증’이라고 하는 일종의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옷에 대한 강박증을 가졌는데, 옷을 한번 입으려면 옷이 열 벌, 스무 벌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때리거나 죽이곤 했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사도세자의 병을 일종의 ‘충동조절장애’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사도세자가 죽기 전해인 1761년 1월에는 자기가 아끼는 후궁인 빙애를 때려죽이기에 이르렀다. 빙애에게는 돌 지난 아들인 은전군이 있었는데, 이 은전군도 당시 사도세자의 칼에 맞았고 우물에 던져졌으나 요행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내관 중에 서경달이라는 이는 내수사의 물건을 늦게 가져왔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으며,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도 죽였다. 1760년 7월에는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왼쪽 눈을 다쳤다.
 
1758년 2월, 사도세자가 내관 김한채를 죽인 사건이 영조에게 보고되었다. 영조가 세자에게 “한 일을 바로 아뢰라”고 하자 세자는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하고 대답했다. 이날 대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어찌 그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어찌하여 상하였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권력과 인간》에서 인용)
 
한마디로 울화병이 심하다는 소리인데,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분을 이기지 못해 우물에 투신하여 자살하려 한 이야기가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세자가 숙종의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 침방 내인인 빙애를 자기 처소로 데려온 것이 발각되어 심하게 꾸지람을 듣고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우물에 몸을 던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시종들이 급하게 구해서 살아났지만, 이런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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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했을 때 영조는 이미 세자를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이미지= 영화 <사도>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
 
세자에게는 불안장애,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와 더불어 1760년부터는 헛것을 보는 정신분열증까지 생겼다. 아버지를 욕하거나, 급기야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하는 등 세자는 몸과 마음이 전혀 제어되지 않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병설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사도세자가 자신의 여동생인 화완옹주와 근친상간을 벌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김용숙 교수의 견해를 소개했다. 그는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도 협박했는데, 정신을 잃은 세자가 옹주에게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다”고 부연했다. 김용숙 교수는 “가학증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면 그것이 사디즘 및 근친상간으로 이어진다는 심리학적 견해를 바탕으로 사도세자가 화완옹주와의 근친상간을 추측하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사도세자는 나인들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성폭행을 한다거나, 여승과 기생을 궁에 불러들여 음란한 행위를 하는 등 그 기행이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장차 왕이 될 세자였으며,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사실상의 또 다른 임금이었기에 누구 감히 세자의 일탈과 기행, 살인 행각을 영조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세자의 살인과 기행은 1762년 일명 ‘나경언의 고변(告變)’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세자가 죽기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나경언은 대궐의 별감인 나상언의 형으로, 별감은 궁궐에서 호위나 수송 등 각종 심부름을 담당하는 직업이다.
 
나경언은 열 가지에 이르는 세자의 죄상을 영조에게 직접 일러바쳤다. 영조는 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친 나경언을 무엄하고 망측하다 하여 다음날 죽여버리고, 고변서는 태워버렸다. 정병설 교수는 이 고변서에 분명히 세자가 영조를 해치려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영조는 세자를 꾸짖을 때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하고,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으니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할 일이냐?”하며 네 가지를 들었다. 절반이 넘는 고변서의 나머지 조항이 전해지지 않지만, 나경언이 처음 형조에 고변서를 바칠 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세자의 반역 혐의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 일로 세자는 부왕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고, 영조와 세자 사이의 긴장이 극에 달했다. 결국 세자의 친어머니인 선희궁이 영조에게 나아가 '대처분' 즉, 자신의 친아들을 “죽여달라”고 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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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영화 <사도>

사도세사의 어머니, "제 아들을 죽여서 나라를 보전하소서"
 
사실 이때 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전 두 번이나 칼을 들고 영조를 죽이겠다며 창경궁 수구(水口)를 통해 청계천을 따라 영조가 머무는 경희궁으로 가려고 하는 등 한마디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자는 이 무렵 툭하면 “칼로 결판을 내겠다.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세자의 친어머니가 “차라리 세자의 몸을 없애 나라를 보전해 달라”고 영조에게 세자의 죄상을 낱낱이 이른 것이다. 이때 선희궁이 아들의 일을 고하며 한 말이 한중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정리(情理)의 못 하올 일이오되,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이 하옵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大處分)을 하오소서.”
 
당시 선희궁이 영조에게 고한 말은 영조가 세자를 죽이며 반포한 ‘폐세자반교’에 전한다. 이를 통해 세자가 죽인 사람이 100여명에 이른다는 것이 드러난다. 《권력과 인간》에서 인용한 폐세자반교의 일부다.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에 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刑具)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 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쫓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영조)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 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 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비록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정조에 의한 아버지 미화작업

이 무렵 세자는 정신병이 도져 도저히 세자라고 할 수 없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궁밖에서 데리고 온 여승, 기생과 잔치를 벌이며 한곳에서 뒹굴고 자고, 자기 거처를 무덤처럼 꾸며놓고 관을 짜서 그 안에 들어가기도 했다.
 
1762년 윤 5월 13일, 양력으로는 7월 4일, 영조는 드디어 세자를 불러내 창덕궁 휘령전에 대령시켰다. 영조는 이 자리에서 “그대들 역시 신령의 말을 들었는가? 돌아가신 정성왕후가 지금 나에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며 세자가 반역을 꾀했다는 사실을 혼령의 말을 빌어 대신들에게 공표했다.
 
분노한 영조는 칼을 바닥에 두드리며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고, 세자는 머리를 땅에 찧어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도 가감 없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영조는 “내가 죽으면 300년 종묘사직이 망한다. 네가 죽으면 종사는 보존할 수 있으니 네가 죽어야 한다. 내가 너 하나를 베지 않고 종묘사직을 망하게 해야 하느냐?”며 계속해서 자결할 것을 거듭 명령했다.
 
이때 갑자기 뒤주가 등장했고, 영조는 세자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했다. 뒤주에 들어간 세자는 “부주(父主: 아바마마) 살려주소서”하며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다음날에는 세자를 모셨던 환관 박필수와 여승 가선, 평양 기생 5명이 참형을 당했다. 뒤주에 갇힌 세자는 결국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이 조선 왕실 사상 가족 간에 벌어진 최고의 비극적인 사건의 전말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일국의 왕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당대부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과 억측, 소문이 난무했을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썼고,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에 대한 나쁜 기록은 대부분 지우고, 아버지가 어질고 똑똑했다는 좋은 기록을 행장 등에 남겼다. 더구나 정조는 영조에게 부탁해 아버지와 관련된 기록을 모두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영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미화작업,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사도세자의 기행은 상당 부분 덮어지거나 희석되었고, 오늘날까지 사도세자를 대할 때 일반인들이 느끼는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사도세자 사건을 철저히 영조의 시각에서만 본다면 아들을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영조는 70세가 다 되었는데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내일 죽어도 아무 이상할 것이 없는 고령이었다.
 
세자의 반역 시도나 의지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영조는 자기가 갑자기 죽은 후에 정신병에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세자가 왕이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 고변이 있자 세자를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이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영조는 자신이 죽고 세자가 왕이 되는 순간 역성혁명으로 나라(왕조)가 망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있다. 다행히 세손이 똑똑했고, 왕재로서 손색이 없었다. 세손이라는 대안이 생긴 이상 정신병에 걸려 살인과 기행을 일삼는 사도세자는 이미 살아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구제가 불가능해진 세자는 그렇게 생모와 부인, 신하들의 침묵 하에 삶을 마감해야 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