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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전문업무 계속해 보람" VS "뒷방 늙은이 취급, 명예퇴직이 낫다

임금피크제는 새로운 게 아니다. 일부 금융기관과 대기업 등에서는 이미 10년전부터 시행해 온 제도다.

특히 금융권이 앞장섰다. 중간층의 인사 적체가 심해 '항아리형' 인력 구조를 이루고 있는 금융권의 경우 인건비 부담에 대한 고민이 컸던 탓에 임금피크제를 다른 업종에 비해 적극 받아들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나이 들어서도 기존의 전문적인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노사 상생의 방안이라는 호평이 있는 가 하면, 별 실효성이 없는 껍데기 같은 제도라는 혹평도 나온다.

한마디로 중장년층의 진정한 고용 안정책이자, 청년고용의 돌파구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아직 풀어야할 숙제가 만만치 않은 셈이다.

◇정년연장·청년고용 효과…"노사 '윈윈'"

국내 공공기관 중 임금피크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은 신용보증기금(신보)이다. 2003년 7월부터 실시했다.

신보는 만 55세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임금을 단계별로 삭감하는 대신 정년(만 60세)을 보장하는 방식을 시행해 오고 있다. 신보의 임금피크제는 일반 직원에서 별정 직원으로 보직을 전환할 때 적용되는 데, 대상자가 맡는 일도 주로 채권추심이나 소송수행 업무 등 전문 업무여서 헤드렛일이나 시키는 다른 회사의 임금피크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노조의 반발이 극심했던 도입 초반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도 전문 영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이었다.

이후 금융권에서는 신보의 사례가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2005년부터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우리은행, KB국민은행, 하나은행, 기업은행 등이 잇따라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이들 대부분은 임금피크 대상을 만 55세로 정하고 정년을 만 60세까지 늘린 뒤 매년 임금을 순차적으로 깎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중 우리은행은 매년 임금피크제 대상자 250~300명 중 절반 정도가 임금피크를 선택하는 등 은행권에서는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은행의 경우 임금피크를 선택하지 않는 대상자에 대해서는 회원사나 자회사 등에 재취업을 유도하는 전직 지원제도를 병행하고 있다. 근로자에게 정년 연장을 보장해주고 은행으로서는 인건비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임금피크제는 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줄여 신규채용 여력을 가질수 있게 되고, 근로자 입장에서는 정년을 보장받아 명예퇴직에 따른 부담을 덜 수 있게 돼 노사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는 제도라는 평가가 있다.

고용노동부가 2014년 기준 근로자 100명 이상 사업장 9034곳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 도입 현황 및 효과'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은 퇴직자 비율이 16.1%에 그친 반면 그렇지 않은 기업은 39.1%로 두배 이상 높았다. 30세 미만 청년층 비율도 임금피크제 기업은 50.6%로 미기업 43.9%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권 관계자는 임금피크제에 대해 "평생 쌓아온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어린 은행원들이 실수하는 부분이나 잘 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다"며 "자신들의 업무 노하우를 전수하고 직원들을 이끄는 등 은행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현실은 '뒷방 늙은이 격' 전락…실효성 의문

그러나 이런 좋은 사례들만 있는 게 아니다. 상당수 은행들에선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면 대개 일반 업무에서 후선 지원업무로 전환된다. 수은에서는 보통 거래 기업의 상담사로 파견을 나가거나 고객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산은에서는 기업여신 분야 등의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이들은 20년 이상 일하면서 영업점 관리 노하우나 다양한 인맥, 상품영업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백전 노장들이다. 한직이나 맡아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단순히 몇년 더 일 할 수 있는 시간만 늘려준다고 해서 고용 안정 등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겠냐는 회의론이 불거지는 이유다.

사실상 임금피크 대상자들이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면서 임금피크제 대신 명예 퇴직을 선택하는 인원이 늘어나고 있다. 명예퇴직을 선택했을 때 받을 수 있는 퇴직금 규모가 임금피크제로 받는 임금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기업은행 등 은행권 대부분에선 매년 임금피크제 대상자들 중 정년연장을 선택하고 회사에 남는 규모가 절반이 채 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임금피크제 자체에 대한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은행에서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 A씨는 "임금을 줄여가면서 회사에 붙어있으면 눈치가 보여 차라리 희망퇴직을 선택했다"며 "평생 일해 온 직장에서 찬밥 신세로 전락하느니 명예롭게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유명무실 논란이 일자 임금피크제를 자체적으로 손보고 나선 곳도 있다. KB국민은행는 최근 5500명을 대상으로 27개월 분의 월급을 미리 받고 희망퇴직을 선택하거나, 월급은 깎이더라도 임금피크제로 남아 기존에 하던 업무를 이어서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임금피크제를 노조와 합의했다.

이번 합의 내용에 따라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은 월급의 50%가 깎이는 대신 기존의 연장선에서 업무를 계속할 수 있고 또는 영업 현장에서 뛰면서 성과 보수를 챙길 수 있게 된다. 기존의 틀을 바꾸고 새로운 형식을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를 두고서도 조직의 특성과 영업점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사실상 임금피크제 직원들이 지점장 등을 지낸 선배인데 일반 직원들과 함께 녹아들어 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