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3.06 03:02 | 수정 : 2015.03.06 07:36
"광부, 딱 1년 만 하자" 삼척行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3배
모든 게 외상, 쌀·연탄은 공짜
하지만 탄가루 몸에 박고 사는 인생
매일매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1974년 4월 어느 날 서른 살 먹은 한창석은 삼척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창석은 전남 구례군 문척면 사람이다. 구례구역에서 조치원, 조치원에서 제천, 제천에서 태백, 이렇게 꼬박 하루 걸려 삼척 문곡역에 도착했다. 탄(炭)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들이 오갔다. 아스팔트 도로에 발을 내딛는 순간 구둣발이 도로 속으로 발목까지 처박혔다. 아스팔트가 아니라 탄가루가 늪처럼 쌓인 황톳길이었다. “여자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던 ‘막장 도시’ 삼척이 그렇게 구례 촌놈을 맞았다. 삼척 장성과 황지는 훗날 삼척에서 분리돼 태백시가 되었다.
석 달 전 창석은 광양 처녀 옥례와 결혼했다. 장인은 탄광에 가겠다는 사위를 극구 말렸다. 칠순에 접어든 부모님도 결사반대였다. 나이 마흔 다 돼서 얻은 외동아들이 막장에 간다니. 하지만 초등학교를 2학년 때 관두고 열다섯 살 이후 서울 공사판을 전전한 청년이 돈 벌 곳은 막장밖에 없었다. 창석은 “구경이나 하고 오겠다”며 열차를 탔다. 일곱 살 아래 각시는 집에 남겨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부는 수출 주도형 개발 정책을 펼쳤다. 석탄 생산은 국부(國富) 창출 동력이었다. 대한민국에 연료는 무연탄이 유일했다. 민둥산에는 산림녹화 계획이 세워져 땔감도 베지 못했다. 발전소는 석탄을 썼고, 공장도 석탄을 썼고, 가정집도 연탄을 썼다.
1970년 겨울은 따뜻했다. 연탄을 때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이상 난동(暖冬)은 3년을 갔다. 게다가 정부는 석유를 대체 연료로 적극 권장했다. 석탄 산업의 위기였다. 그러던 1973년 12월 중동 산유국들이 원유 가격을 일제히 인상했다. 한국 유가도 12월 4일 자정에 전격적으로 30% 인상됐다. ‘똥값’이 됐던 석탄이 다시 ‘금값’으로 올랐다. 정부에서는 다시 석탄을 주력 에너지원으로 격상했다.
한창석이 태백행 열차를 탄 것은 그다음 해였다. 두 달 뒤 따라온 각시는 시커먼 흙길을 보며 몸서리를 쳤다. 신랑이 말했다.
“어차피 1년이다. 죽으라고 돈 벌어서 서울 가서 잘살자.”
막장 생활의 대가는 일반 공무원 월급의 세 배였다. 인감증만 있으면 모든 게 외상이 가능했다. 인감증은 증명사진과 인감도장이 찍힌 재직증명서다. 쌀과 연탄은 공짜로 나왔다.
창석은 굴진반에서 일했다. 선두에서 갱도를 뚫고 전진하는 게 굴진(掘進)이다. 막장에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고선 1m50㎝짜리 도화선을 꽂았다. 점화는 담뱃불로 했다. 안전거리인 80m 후방까지 잰걸음으로 1분 20초가 걸렸다. 창석은 그래서 막장에서 담배를 배웠다.
발파가 이뤄지고 먼지가 가라앉으면 채탄반 사람들이 갱목을 등에 지고 들어갔다. 갱목은 동발이라 불렀다. 하나에 쌀 반 가마 무게의 동발을 어깨에 메고 좁은 굴을 네 발로 걸어갔다. 동발을 위와 양옆에 세우면 옆으로 지굴(枝窟)을 뚫고 탄을 캤다. ‘노보리’라고 부르던 지굴은 어깨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채탄반은 노보리로 기어들어가 갱을 넓힌 뒤 다시 동발을 세우고 곡괭이와 삽으로 탄을 캤다.
광부들은 쥐들과 밥을 나눠 먹었다. 쥐들은 친구였다. 쥐가 있으면 거기는 메탄가스 없이 공기가 맑고 위험이 없다는 뜻이었다. 탄가루 묻은 계란말이와 김치에 맨밥이지만 광부들은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작업복 속에서 수건을 꺼내 짜내면 물수건처럼 땀이 쏟아졌다. 장화를 벗어도 마찬가지였다. 갱도를 나올 때는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퇴근하면 막걸리 한 사발과 삼겹살로 폐 속 탄가루를 씻어내렸다. 창석은 술도 막장에서 배웠다.
창석은 그날을 기억한다. 멀리서 굉음이 들리더니 갱도가 무너졌다. 발파 작업이 진행 중이던 옆 갱도와 너무 가까웠다. 동발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안전등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창석은 피투성이가 된 이마를 누르며 무작정 후퇴했다. 왼쪽 이마에 꿰맨 흉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탄맥(炭脈)에 스며든 물길이 터져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실려 나온 동료들의 시신(屍身)도 여러 번 보았다.
“죽은 혼을 내보내기 전에는 작업하지 않는다.” 사고가 나면 광부들이 갱도로 들어갔다. 막장에서 서로를 구조할 수 있는 사람은 동료밖에 없었다.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탄을 골라내는 선탄부로 채용됐다. 여자들은 울어대는 아이들을 뉘어놓고 귀를 막으며 일터로 갔다. 가슴이 찢어졌다.
세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석탄은 공급이 수요를 대지 못했다. 공장마다 석탄을 달라고 아우성쳤고, 가정집에서는 연탄불이 빨리 꺼진다며 불평했다. 온돌방에도, 공장 굴뚝과 발전소 터빈에도 광부들의 한숨이 타들어갔다. 창석은 1년 365일 일했다. 어느 해부터 큰 달은 하루 쉬었고 또 어느 해부터 한 달에 두 번 쉬게 되었다.
쉬는 날이 오면 태백시를 관통하는 황지천변은 광부 가족들로 붐볐다. 여자들은 작업복을 빨았다. 안 그래도 탄가루투성이인 개울물이 시커멓게 변했다. 남자들은 납작한 돌 위에 삼겹살을 굽고 막걸리를 먹었다. 돼지고기와 막걸리는 몸속 탄가루를 씻으려는 절박한 의식이었다. 속도 모르는 외지인들은 광부들이 대낮부터 취해 있다고 욕을 해댔다.
가끔 사람들은 슬레이트 지붕을 잘라서 돌 대신 썼다. 그러면 굽는 속도가 빨랐다. 사람들은 시멘트와 석면 증기에 명줄이 짧아지는 줄도 모르고 슬레이트 위에 삼겹살을 얹었다. 태백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던 해, 창석은 진폐의증을 선고받았다. 진폐증은 폐에 탄가루가 쌓여 조직이 굳는 병이다. 의증은 진폐증 진단의 전 단계다.
“다들 탄가루 몸에 박고 사는데 뭘.” 마누라는 남편 죽는다고 울었지만 창석은 담담했다. 오히려 진폐증 진단으로 광산에서 쫓겨날까 두려웠다. 똑같은 이유로 정기 검진을 거부했던 많은 사람은 훗날 돌이킬 수 없는 중증 환자가 되어 죽었다. 창석은 지금 진폐증 7급 환자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쁘고 한없이 목이 마르다. 치유 가능성은 제로다.
1978년 12월 2차 석유 파동이 터졌다. 배럴당 10달러 선이던 원유가 40달러까지 치솟았다. 대한민국에서 석탄은 다시 한 번 주된 에너지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석탄 증산은 애국이었다. 창석은 한국 경제의 기반을 닦는 산업 전사였고, 돈 벌어다 주는 가장이었으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교육열 충만한 아버지였다. 물려받은 가난은 자기와 아내 옥례에게서 끝내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내였다.
탄광촌 집들은 좁은 골목을 경계로 많게는 열 집, 스무 집이 벽 하나를 두고 붙어 있었다. 탄가루가 날릴 통로를 최소화한 구조다. 벽은 얇아서 1호 집에서 레코드판 트는 소리가 10호 집까지 다 들렸다. 10호 집이 라디오를 듣다가 1호 집의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면 경쟁적으로 텔레비전을 샀다. 어느새 창석의 집에도 전축이 들어왔고 안테나가 솟았다. 아이들은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 여자들은 금반지계(契)를 만들고 금딱지에 다이아몬드며 진주를 몸에 감았다.
과소비? 아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만 하다 죽기는 싫었던 것이다. 못 배우고 가난해서 막장으로 왔는데 막장에서까지 문화에서 소외돼 살다 죽기는 싫었던 것이다. 산업 전사라는 이름으로 막장과 전투만 벌이다 죽기는 싫었던 것이다. 광부들은 “이 궁벽한 탄광촌까지 와 주셔서 고맙다”며 장사치들에게 인사하고 물건을 받아갔다. 한 번도 내일을 꿈꿔보지 못한 광부들의 통장은 폐광된 갱도처럼 비어갔다.
세상은 또 바뀌고 있었다. 석유 가격이 안정되자 나라에서는 석탄 대신 석유를 산업 동력으로 선택했다. 가정집은 연탄아궁이를 버리고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를 찾았다. 산업 전사들의 삶은 신산해져갔다.
1986년 영월화력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던 영월 마차리 광산이 무기한 휴광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에너지원은 석탄에서 석유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탄맥도 바닥이 나서 문 닫은 갱도를 다시 열어봐도 탄은 나오지 않았다. 88서울올림픽이 화려하게 끝났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전흔(戰痕)에 신음하는 후진국이 아니었다.
올림픽 폐막 후 두 달이 지난 12월 21일 정부가 석탄 산업 합리화 계획을 발표했다. 경제적 가치가 없는 탄광은 정리한다는 계획이다. 석탄 산업의 사망선고였고, 산업 전사의 부음이었으며, 속칭 ‘노가다’를 양산하는 선전포고였다. 실행은 전격적이었다. 대한민국 탄광 347개 가운데 1989년 한 해에만 125개가 문을 닫았다. 1999년까지 모두 336개가 폐쇄됐다. 2429만5000에 달했던 무연탄 생산량은 419만7000으로 줄었다. 6만명 넘던 광부 가운데 1989년 한 해에만 3만50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석탄이 영원할 줄 알았던 광부들은 그제서야 세상이 바뀐 사실을 깨달았다. 한창석도 그중 하나였다. 창석은 1992년 동해탄광 폐광으로 실직자가 되었다.
창석은 서울지하철 공사장을 옮겨 다녔다. 경기도 안산 건물 공사장에서도 일했고 태백으로 돌아와 ‘쫄딱구뎅이’라고 부르는 코딱지만 한 개인 광산에서도 잠시 일했다. 그가 몸이 아파서 더 이상 일을 나갈 수 없게 되자 아내 옥례가 대신 일을 했다. 산업을 일으키고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찬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이야 관광 도시로 변신 중이지만 태백은 한동안 인적 드문 유령 도시였다.
늙은 광부는 끝내 상장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는데 40년 막장 인생 끝에 남은 건 방 두 칸짜리 집 한 채와 탄가루 가득한 폐 두 개다. 명절 때면 시집·장가가서 대처에 사는 아이들이 찾아와 위로가 된다.
부부는 가끔 서로에게 푸념을 한다. “어이, 산업 전사님. 당신도 탄광이 영원할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돈을 쓰지 않는 건데, 그지?”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 남은 무연탄 광산은 5개다. 막장에서 탄을 캐고 있는 광부는 모두 3427명이다.
<늙은 광부 한창석이 말합니다>
“우리는 목숨을 함께 한 동료였습니다. 서로를 위하지 않으면 함께 죽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화도 함부로 내지 않았고 밥도 나눠 먹고 공기도 나눠 마셨습니다. ‘죽은 혼을 내보내기 전에는 작업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죽음과 함께 싸운 사람들이었어요. 그게 막장, 막장 하며 천대했던 바로 그 막장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렇게 30~40년 같이 살다 보니 하나 같이 진폐증을 앓고 있고 어떤 친구는 벌써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산업전사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이긴 했던 것 같습니다. 막장에서 아이들 넷 다 학교 보내고 시집, 장가 다 보냈으니까요. 아쉽기는 합니다. 신혼 때 살림 차렸던 셋방이 길 건너편인데, 40년이 지나도 나는 마누라랑 여기 살고 있답니다. 꿈이라.. 딸기농사를 하고 싶은데 늙어버려서...배운게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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