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3.05 03:00 | 수정 : 2015.03.05 06:53
[최고령 배달 81세 서완진씨]
12년째 손수레 이용해 배달… 결근·배달 실수 한번도 안해
최고 신문 배달 자부심으로 한 부, 한 부 살포시 집 앞에
"아이고, 됐습니다. 내가 혼자 끄는 게 편해요."
지난달 27일 오전 1시 30분 서울 서초구 조선일보 남서초CS센터 배달원 서완진씨는 "손수레를 대신 끌겠다"는 기자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기자가 쉽게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빨랐다.
30~40대가 대부분인 이곳 배달원들은 대개 오토바이로 신문을 배달하지만, 서씨는 손수레로 매일 200부를 배달한다. 그는 올해 만 81세. 전국의 조선일보 배달원 중 최고령이다. 서씨는 "신문 배달을 하고 나서 더 건강해졌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근이나 배달 실수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배달 일이 힘들지 않으냐"는 물음에 서씨는 "이 일을 하면서 행복해졌다"며 웃었다. 지난 설 연휴에도 자녀들이 '이제 그만하시라' 만류했지만, 서씨는 "내가 살면서 가장 오래 한 것이 이 일인데 나이가 많다고 그만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서씨는 열여섯 살이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고향 황해도 연백군를 떠나왔다. 휴전 후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그는 은행원부터 전차 운전수, 복덕방 직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 그는 "10년 넘게 한 신문 배달이 여태 살면서 가장 오래 한 일이고 절로 즐거운 기분이 드니 내 천직"이라고 말했다.
첫 배달지인 서초동 L 아파트에 도착한 서씨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그와 동행한 기자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틈으로 신문을 던지자 꾸중이 쏟아졌다. "신문을 던지면 안 돼요. 독자분이 현관문을 열다 신문이 문틈에 끼여서 찢어지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그는 "조선일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독자들이 답답하지 않게 최대한 빨리, 신문이 상하지 않게 배달하자는 게 내 배달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씨는 남북 간 이산가족 상봉이 열릴 때마다 상봉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추첨에서 탈락했다. 살아 있다면 일흔한 살이 됐을 여동생의 생사 여부도 모른다. "한번은 적십자에서 여동생을 찾기 위해 북한에 보낼 동영상을 찍겠다고 찾아왔어요. 여동생을 두고 고향을 떠나던 모습이 떠올라서 그날은 참 많이 울었습니다. 허허."
신문 배달이 끝나자 시계는 오전 4시 40분을 가리켰다. 안산 집에 도착하는 7시 30분부터 4시간 동안 조선일보 읽는 게 서씨의 마지막 일과다. 서씨는 "사설면부터 먼저 펼쳐서 모든 기사를 꼼꼼히 읽는다"면서 "조선일보를 안 읽으면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 사람이 많은데, 조선일보처럼 내용이 충실한 신문을 본 이후로는 방송 뉴스나 다른 신문은 볼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새해 소망을 묻자 서씨는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다는 뉴스가 조선일보 1면에 실리는 것"이라며 "여동생을 만나기 전까지 건강하고 즐겁게 신문 배달을 계속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오전 1시 30분 서울 서초구 조선일보 남서초CS센터 배달원 서완진씨는 "손수레를 대신 끌겠다"는 기자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기자가 쉽게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빨랐다.
30~40대가 대부분인 이곳 배달원들은 대개 오토바이로 신문을 배달하지만, 서씨는 손수레로 매일 200부를 배달한다. 그는 올해 만 81세. 전국의 조선일보 배달원 중 최고령이다. 서씨는 "신문 배달을 하고 나서 더 건강해졌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근이나 배달 실수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12년째 일하고 있는 남서초센터는 법조타운이 있는 서울지하철 2호선 교대역 부근 부촌(富村) 골목에 있다. 단일 지국으로 조선일보 전체 지국 가운데 배달 부수가 가장 많다. 서씨가 배달하는 구독 가구 중에는 법원 최고위 인사와 유명 배우, 국회의원도 있다. 2003년 한 인척의 소개로 이곳에서 신문 배달을 시작한 서씨는 집이 안산이다. 그는 "매일 밤 10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밤 11시 30분에서 12시면 센터에 도착한다"고 했다.
"배달 일이 힘들지 않으냐"는 물음에 서씨는 "이 일을 하면서 행복해졌다"며 웃었다. 지난 설 연휴에도 자녀들이 '이제 그만하시라' 만류했지만, 서씨는 "내가 살면서 가장 오래 한 것이 이 일인데 나이가 많다고 그만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서씨는 열여섯 살이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고향 황해도 연백군를 떠나왔다. 휴전 후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그는 은행원부터 전차 운전수, 복덕방 직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 그는 "10년 넘게 한 신문 배달이 여태 살면서 가장 오래 한 일이고 절로 즐거운 기분이 드니 내 천직"이라고 말했다.
첫 배달지인 서초동 L 아파트에 도착한 서씨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그와 동행한 기자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틈으로 신문을 던지자 꾸중이 쏟아졌다. "신문을 던지면 안 돼요. 독자분이 현관문을 열다 신문이 문틈에 끼여서 찢어지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그는 "조선일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독자들이 답답하지 않게 최대한 빨리, 신문이 상하지 않게 배달하자는 게 내 배달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씨는 남북 간 이산가족 상봉이 열릴 때마다 상봉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추첨에서 탈락했다. 살아 있다면 일흔한 살이 됐을 여동생의 생사 여부도 모른다. "한번은 적십자에서 여동생을 찾기 위해 북한에 보낼 동영상을 찍겠다고 찾아왔어요. 여동생을 두고 고향을 떠나던 모습이 떠올라서 그날은 참 많이 울었습니다. 허허."
신문 배달이 끝나자 시계는 오전 4시 40분을 가리켰다. 안산 집에 도착하는 7시 30분부터 4시간 동안 조선일보 읽는 게 서씨의 마지막 일과다. 서씨는 "사설면부터 먼저 펼쳐서 모든 기사를 꼼꼼히 읽는다"면서 "조선일보를 안 읽으면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 사람이 많은데, 조선일보처럼 내용이 충실한 신문을 본 이후로는 방송 뉴스나 다른 신문은 볼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새해 소망을 묻자 서씨는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다는 뉴스가 조선일보 1면에 실리는 것"이라며 "여동생을 만나기 전까지 건강하고 즐겁게 신문 배달을 계속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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