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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外

흑백 인종차별 심했던 미국 남부 1955년, 백인에게 자리 양보 안 한 '로자'

흑백 인종차별 심했던 미국 남부 1955년, 백인에게 자리 양보 안 한 '로자'
흑백분리법 어긴 죄로 체포되자, 킹 목사 '버스 안 타기 운동' 주도… 마침내 누구나 원하는 자리 앉게 됐죠

그가 흑인 인권 위해 헌신한 덕분에 이제 흑인도 당당히 대통령 될 수 있죠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 아무리 붐벼도 많은 사람이 앉지 않고 비워두는 자리가 있어요. 바로 지하철 한 량의 양쪽 끝에 있는 배려석이에요. 버스 앞좌석도 마찬가지예요. 이 자리에는 '노약자나 장애인, 임산부를 위해 양보해 주세요'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지요. 우리 사회를 더욱 따뜻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1950~1960년대 미국 남부에서는 배려석의 의미가 지금과 달랐다고 해요. 만약 피부색에 따라 이 자리 주인이 정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까요?

서부 개척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어요. 하지만 노예선을 타고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정반대였지요. 특히 노예들의 노동으로 목화 농장을 꾸려나가던 미국 남부에서는 더욱 그랬답니다.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연설하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연설하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킹 목사는 여기서“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을 남겼어요. /Corbis 토픽이미지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남부의 흑인들은 차별받았어요. 1950년대에는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되 교육·교통수단·직업 등에서는 차별하지 않는다(Separate but Equal)'는 알 수 없는 법까지 만들어졌지요. 흑인은 백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어요. 바로 옆에 백인 학교를 두고도 멀리 떨어진 흑인 학교에 다니거나 심지어 두꺼운 종이로 만든 교실에서 공부하기도 했지요. 가격이 더 비싼 흑인 전용 상점에서 장을 보고, 식당과 커피숍, 버스, 기차 등 모든 곳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인종차별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1955년, 앨라배마주(州) 몽고메리시(市)의 한 버스 안에서 역사적 사건이 벌어져요. 그날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몹시 피곤했어요. 그녀는 백인 전용 좌석 뒷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 따라 버스에 탄 백인이 많아지자, 운전기사가 다가와 말했어요. "백인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일어나시오." "아니, 내가 왜요? 이 자리는 백인 좌석도 아니잖아요." 운전기사와 승강이를 벌이던 로자는 결국 흑백분리법을 어긴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버스는 운전석 뒤 넷째 줄까지는 '백인 전용 좌석'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어요. 버스 맨 뒷부분은 흑인 좌석, 가운데는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좌석이었어요. 하지만 당시엔 백인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흑인들은 버스에서 모두 내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버스 요금을 낼 때도 흑인은 앞문으로 타서 요금을 내고, 다시 내려 뒷문으로 타야만 했어요. 짐이 잔뜩 있는 흑인 노인에게 젊은 백인은 당당히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로자 파크스가 체포되고 나서, 이 지역의 목사였던 마틴 루서 킹의 주도 아래 '몽고메리 버스 안 타기 운동'이 벌어졌어요. 몽고메리 지역의 흑인들은 버스 승차를 거부하고 걸어서 출근했지요. 자동차를 가진 흑인과 동행하거나 흑인이 운영하는 택시를 타기도 했습니다. 텅 빈 버스가 돌아다녀도 사람들은 타지 않았어요. 흑인 5만명이 참가한 이 운동은 무려 381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지요. 이 기간에 흑인들은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직장에서 해고되기도 했어요. 버스 타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1956년 12월 21일, 흑인들은 버스에서 원하는 자리에 마음껏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킹 목사는 강력한 흑인 지도자로 떠올랐고, 미국 내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시민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답니다.

(왼쪽 사진)로자 파크스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요구를 거절하여 체포됐어요. 이후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시민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른쪽 사진)1955년 미국 앨라배마주(州)의 버스 안 모습이에요. 당시 버스 앞쪽은 백인 전용 좌석이었다고 해요.
(왼쪽 사진)로자 파크스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요구를 거절하여 체포됐어요. 이후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시민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른쪽 사진)1955년 미국 앨라배마주(州)의 버스 안 모습이에요. 당시 버스 앞쪽은 백인 전용 좌석이었다고 해요. /위키피디아·버밍햄 공립도서관
킹 목사는 인도의 간디가 주도했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크게 감동하였다고 해요. 그래서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인권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성경에 나온 대로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도 생각했고요. 그가 실천한 비폭력 운동은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꿔 놓지는 못했어요. 버밍햄에서는 평화로운 시위를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려 막기도 했고, 훈련된 개들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공격하기도 했지요. 백인 중심 사회에서 여전히 흑인은 차별받고 위협당했으며, 죽음의 고비도 수차례 넘겨야 했어요. 하지만 자유를 향한 평화 행진은 곳곳에서 이어졌고, 킹 목사는 백인이 주는 고통에 그저 견뎌내는 것으로 맞섰지요. 그러자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이 가슴으로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1963년은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해 킹 목사는 워싱턴에 있는 하얀 링컨 동상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어린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어요. 미국 내 인종 갈등과 흑인 인권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인종 평등, 나아가 평화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었지요. 하지만 평화로운 운동은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흑인 인권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이다가도 또 어느 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듯 보이는 날이 계속 이어졌거든요. 미국 곳곳에서 흑인들이 공격당하고, 흑인을 도우려던 백인 목사까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킹 목사 역시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州) 멤피스에서 연설을 준비하다가 반대편 발코니에서 날아든 총알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오늘은 킹 목사가 암살당한 지 46년째 되는 날이에요. 이제 미국은 흑인도 당당히 대통령이 되는 나라가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들이 과거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바칠 만큼 절실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