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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지혜/교육

다섯 자녀를 수재로 키운 포항 농부 황보태조씨의 교육법

다섯 자녀를 수재로 키운 포항 농부 황보태조씨의 교육법


2000년 겨울, 포항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은 남자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막내아들의 입학식에 가는 길이었다. 그는 27년 전 기억을 떠올리면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삶의 장면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1973년 그는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있었다.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신축공사장 막일꾼으로서였다. 농사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알음알음으로 막일을 찾아 서울까지 왔다. 뙤약볕에서의 막일은 힘겨웠지만 그는 이렇게 다짐하며 버텼다.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이 건물은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공부할 곳이지? 그러니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튼튼히 지어야지.’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4녀1남 중 맏딸과 막내아들이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포항 구룡포에 사는 농부 황보태조(68)씨 이야기다. 두 자녀뿐 아니라 다섯 자녀가 모두 의사와 약사가 됐다. 첫째 딸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의학박사 학위를 땄고, 둘째 딸은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대전 설여성의원 원장으로 있다. 셋째 딸은 경북대 의대를 거쳐 서울 라마르의원 미아점 원장으로 있고, 넷째 딸은 대구 가톨릭대 약학과를 졸업해 대구 수정약국 대표로 있다. 막내이자 외아들은 서울대 의대 졸업 후 공중보건의로 근무 중이다.

아버지 황보태조씨를 주목하는 건 다섯 자녀를 모두 의사, 약사로 길러낸 이력 자체가 아니다. 고등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인 가난한 농부가 자신만의 교육철학으로 아이들을 우뚝 서게 했다는 점이다. 그 흔한 유치원은 물론 학습지 한 번, 과외 한 번 없이 이룬 성과다. 그는 14년 전 자신만의 교육철학을 담아 ‘꿩 새끼를 몰며 크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최근, 이 책의 개정판이자 손주들 이야기를 보태 ‘가슴 높이로 공을 던져라’를 냈다.

황보태조씨와 황보숙씨
황보태조씨와 황보숙씨

기자는 지난해 12월 초,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올림’의 이성수 대표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책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는 황보씨의 교육철학을 이렇게 압축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에 비춰 아이들이 학교를 즐거운 곳으로, 공부를 재밌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지요. 게다가 딸들에게 쓰던 교육법이 아들에게 먹히지 않자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냈으니 그야말로 ‘인재시교’의 표본입니다.”

황보씨에게 전화하자 그는 난색을 표했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예. 아들(아이들)이 다 커놔서 바쁘기도 하고, 또 아이들마다 성격이 천차만별이라 우떤(어떤) 아는 숫기가 없고 우떤 아는 괜찮고 그럽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물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셋째 딸 황보숙(38)씨가 흔쾌히 취재에 응하기로 했다는 전화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12월 26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황보숙씨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는 세 살짜리 딸, 다섯 살짜리 아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엄마가 쉬는 날인 목요일에는 어린이집을 가지 않는 날이 많다고 했다. 황보숙씨는 “솔직히 친구들도 다 의사인데 나만 특별한 것처럼 비쳐지는 게 부담스럽다. 하지만 아버지의 교육철학이 긍정적 영향을 줄 것 같아서 응했다”고 맑게 웃었다. 아버지 황보씨는 “우리 딸이 원장이에요. 꼭 원장이라고 써 주세요”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 황보씨는 노모가 계시는 포항과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한다. 지난 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으나 가을부터는 이 자녀 저 자녀 집을 다니면서 손주들 돌봐주는 재미에 산다.

황보태조씨 가족은 포항시 구룡포읍 눌태리라는 작은 산골마을에서 살았다. 그의 집은 이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했다고 한다. 3300㎡(1000평) 남짓한 밭과 작은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다. 사교육은 그의 살림살이로서는 먼 나라 얘기였다. 하지만 그의 다섯 아이들은 어딜 가나 공부박사로 주목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집 애들은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한대?”라며 부러워했다.

산골마을에서 다섯 아이를 공부의 신으로 키운 비결이 뭘까? 아버지 황보씨만의 뚜렷한 공부철학이 있다. 바로 ‘공부놀이’다. ‘한문놀이, 학교놀이, 글자놀이, 구구단놀이…’ 식으로 모든 공부를 ‘놀이’로 바꾼 것이다. 다른 농부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 마시며 노닥거릴 때 그는 아이들 곁에서 공부놀이를 했다. 틈만 나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재미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할 수 있을까?’를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그만의 기막힌 ‘공부놀이법’들을 개발했다. 먼저 과자상자를 이용한 글자놀이. 서울 봉천동 달동네에서 작은 가게(일명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시절, 창고이자 거실이자 온가족의 침실인 방이 공부방이었다. 방 한편에 쌓인 ‘라면땅, 가나초콜릿, 나하나볼’ 등 상자들을 보면서 글자 찾기도 하고, 비슷한 글자 알아맞히기 놀이도 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글자놀이를 했다. 아무도 공부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문공부는 ‘같은 반 친구 이름 외우듯’ 했다. “이 두 글자는 韓國인데, 이 친구 이름은 한국이라고 부르니 잘 기억해 두어라” 하는 식이다.

모든 공부의 놀이화. 여기에는 그만의 사연이 있다.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척들 손에 자란 그에게는 어른다운 어른이 없었다. 맞아가면서 공부했고, 학교는 무서운 곳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둔 이후 공부에 대한 한이 깊었다. “나중에 내 아이들이 생기면 공부를 원없이 시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재미있는 것, 학교를 신나는 곳으로 인식하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공부공포증을 없애기 위해 ‘오늘은 익히고 내일은 잊어버려라’라고 말한다. ‘나는 자꾸 잊어버려. 나는 안돼’ 이렇게 생각하면 자신감을 잃고 공부 자체가 싫어진다. 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은 하나마나한 말이고, 아이들을 짜증나게 만든다.”

또 하나 강조한 것은 ‘독서’다. 독서습관이 붙지 않은 아이는 공부를 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위해 그는 한 달에 몇 번씩 구룡포읍에서 포항시내 서점까지 24㎞의 거리를 다녔다. 책 선정의 기준 역시 ‘재미’였다. 텔레비전 어린이 연속극에 나오는 책은 꼭 사다주었고, 쉽게 읽히는 책 위주로 골랐다. “처음부터 무리하면 실패한다. 소를 길들일 때에도 목에 지울 멍에를 굵고 무거운 것으로 시작하면 소는 목을 흔들며 거부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자식농사에 성공한 그는 유기농 토마토 농사로 성공한 농부이기도 하다. 농사를 지으며 그가 스스로 터득한 자녀교육법은 수십 년간 교육철학에 매진해온 교육심리전문가들의 결론과 신기하리만큼 유사했다.

영어공부는 어떻게 시켰을까.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그는 ‘엄마가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듯 글자공부보다 듣고 따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녹음테이프다. 첫째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녹음기를 사서 교과서 영어테이프를 매일 들려주었고,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차를 한 대 사서 등교길에 영어 교과서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차로 12분 거리인 등교시간은 한 단원을 들려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막내는 자연스럽게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했고, 영어를 ‘공부’가 아닌 ‘언어’로 인식하게 됐다.
황보태조씨와 황보숙씨
황보태조씨와 황보숙씨
황보태조씨의 공부놀이는 손주들에게서도 톡톡히 효과를 봤다. 여섯 명의 손주를 둔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를 위해 ‘검산 노래’를 만들었다. “한두 개는 틀렸으니 찾아봅시다. 보물찾기 하듯 찾아봅시다”라는 가사의 짧은 노래. “시험을 본 후 검산을 꼭 해라”라는 뻔한 말은 귓등으로 들렸지만 할아버지의 검산노래는 귓속과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얼마 전 손주는 “할아버지 노래대로 검산했더니 진짜 틀린 문제를 발견했어요”라고 말했다 한다.

황보숙씨는 인생의 궤도를 대대적으로 틀어 의사가 된 경우다. 그는 포항공대 화학과에 수석 입학, 졸업해 반도체 관련 회사에 다니다 28세에 경북대 의대로 편입했다. 황보숙씨는 “반도체회사 시절 해외출장이 잦아서 좋기도 했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원했다. 둘다 의사인 언니들의 영향도 컸다. 프랑스 출장 당시 의료복지 분야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의대 쪽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펌프질이 방점을 찍었다. “얘가 겁을 냈다. 내가 그런 데는(의지 북돋워주는 데는) 달인이다. ‘너는 된다. 틀림없이 하면 된다’고 부추겼다.” 여기에서 아버지 황보씨의 또 하나의 교육철학이 드러난다. 절대긍정 마인드. 그는 “칭찬보다 더 좋은 거름은 없다”며 말을 이었다. “똑똑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자식의 성적표를 보고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막 화를 내면서 ‘내가 발바닥으로 공부해도 그 정도는 하겠다’라고 하더라. 그런 말을 듣고 어떤 아이가 공부를 재미있어 하겠나.”

인터뷰 도중 아버지 황보씨는 연신 딸을 추켜세웠다. “우리 딸 말 잘하지요” “원장이라니까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늘 웃고 매사에 긍정적인 황보태조씨. 이건 아버지로서의 모습이다. 한 인간으로서 황보태조씨는 딴 모습이라고 한다. “성질이 고약하다. 화도 잘 내고. 그런데 아이들을 대할 때에는 성질대로 하면 안 된다.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성질도 죽였다. 아이들에게 말할 때에는 할 말 못할 말을 미리 골라낸다. 농부가 쌀 속에서 돌을 골라내듯 말이다.”

승승장구 황보태조식 자녀교육에 브레이크가 걸린 순간이 있다. 바로 막내아들을 낳고서다. 누나들에게서 효과를 거둔 글자놀이법이 아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는 실패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첫째, 남자 아이라 누나들과 성정이 다르고, 둘째, 또래 형제가 없어 글자놀이에 흥미를 붙이기 어렵고, 셋째, 로봇 이름 짓기 놀이는 인형놀이에 비해 가짓수가 적다. 이후 그는 ‘편지놀이’를 개발했다. 아들이 아내에게 편지로 먹고 싶은 단어를 써 주면 아내가 장에 다녀오면서 편지에 있는 물건을 사다주는 것이다. ‘이 글자에 이런 의미가 있구나’라는 것을 깨우친 아이는 신기해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자놀이에 빠져들었다.

아버지 황보씨는 “요즘 엄마들은 공부에 정 떨어지게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송편도 속을 넣어야 맛있고, 떡도 고물을 묻혀야 맛있고, 쓴 약에는 당의정을 입힌다. 공부놀이를 통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마음밭을 일구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가 시켜서 하는 공부는 당장 효과가 있어 보이지만 아니다. 커 봐라. 절대 공부 안 한다.”

황보숙씨도 아버지처럼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배운 교육철학의 핵심을 ‘관찰력’이라고 했다. “엄마가 돼 보니 알겠다. 어렸을 때 내가 뭘하든 아버지가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무언가를 시키려는 건 부모의 욕심이다. 한 걸음 뒤에서 아이가 노는 것을 관찰하면서 관심 분야를 찾아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이다. 공부는 그 다음 이야기다. 집중력 있는 일을 아이 스스로 즐겁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공부는 저절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