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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여행

걸어서 한양 답사 [5] 부암동 백사실 계곡

입력 : 2013.12.20 09:42

가을이 떠나간다. 한여름 푸르던 이 강산 산천초목들이 울긋불긋 색동옷을 갈아입더니 어느새 낙엽으로 뒹굴기 시작하는 계절이 지금이다. 해마다 10월 즈음에 전국을 만산홍엽(萬山紅葉)으로 불태우고는 떠나가는 가을.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또한 인산인해를 이루던 전국의 산과 계곡은 어느새 황량한 느낌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올해 단풍을 못 보았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설악산까지 갈 것도 없다. 서울 시내에도 어디 못지않게 멋진 단풍과 숨은 비경(秘景)이 있으니 바로 부암동 백사실 계곡이다.

부암동 백사실 계곡

종로구 부암동, 지금의 자하문 고개 넘어 홍지문과 세검정을 연하는 지역을 말하는데 이곳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 자락이 중첩되어 경치가 좋은 곳으로 조선 시대부터 왕족과 사대부들의 별장과 정자가 곳곳에 있었으며, 그중 백사실(白沙室) 계곡은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백사실 계곡은 서울 시내에서 그리 멀지도 않거니와 누구나 찾아가기에 편리한 접근성은 물론, 주변에 볼거리도 많은 곳인데 특히 이 가을 단풍이 멋진 곳이기에 한번 다녀온 이야기다.

커다란 부암(付岩 부침바위)이 있어 부암동이라고 불렸는데 유래를 적어놓은 돌. 상명대 앞 로터리에 있다.

부암동 백사실 계곡으로 가려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자하문 고개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자하문 고개(A)에서 버스를 내려 북악스카이웨이 방향으로 접어들어선 후 왼쪽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커피숍 '산모퉁이'(B)가 나오는데 조금 더 꺾어 올라가면 도로도 끝나고(C)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 된다.

백사실 계곡 찾아가는 길. 자하문 고개로 올라가지 않고 터널을 통과하면 D지점부터 걸어 올라가야 한다.

지하철역 3번 출구에서 여기(C)까지 택시를 타고 올라오면 5천 원 미만으로 오르막의 어려움이나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씨가 좋고 걷기를 좋아한다면 2~30분 걸으면서 올라가기를 권하는 바이다.

또 하나의 커피숍과 주택들, 절(卍), 산후조리원 등을 지나면서 다시 도로가 이어지지만, 곧 산길 내리막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각자(刻字)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로 이곳이 백사실 계곡이다.

白石洞天(백석동천) 刻字(각자)바위.

이곳 말고도 무슨 무슨 동천(洞天)이라는 각자를 많이 볼 수 있다. 동천은 하늘 아래 좋은 마을, 즉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니 북악산을 뜻하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하면 '북악산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란 뜻쯤 되겠다.

(사진 위)6각형 정자의 주춧돌만 남아있는 연못 터. 정면 높은 곳은 건물터가 남아 있다. (사진 아래)연못 위 높은 단에 남아있는 건물터. 돌출된 부분은 누마루였던 것으로 보이며 제법 큰 규모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白沙室) 계곡이라 부른다. 각자바위 아래에는 둥그런 연못과 육각형 정자가 있었던 흔적, 그리고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사실 계곡의 단풍.

이곳 백사실에는 도롱뇽이 살고 있는 계곡 물줄기가 있다 해서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혹자는 사대문 안에 유일한 청정구역이라고 표현하는데 죄송하지만, 이곳은 사대문 밖이다. 분명 한양 성곽과 자하문 밖이다.

아무튼, 이곳은 물 맑고 산 좋고 아름다운 곳이다. 필자가 추천한 까닭은 이곳의 단풍이다. 주변 단풍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이처럼 경치 좋은 곳에 사대부들이 심신 수양과 휴식, 학문 등을 위해 지어놓은 정자나 별장을 별서명승(別墅名勝)이라고 한다. 부암동에는 이 밖에도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터, 반계 윤웅렬 별서, 세검정, 창의문(자하문), 탕춘대 터 등 왕족과 사대부의 별장과 정자가 곳곳에 있다.

최근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 결과 추사 김정희가 백석동천 일대를 소유했었다는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백사 이항복과 추사 김정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하니 상세한 결과를 기다려본다. 서울시 일대에는 이 백석동천 말고도 성북동의 성락원이 있다고 하나 성락원은 개방하지 않아 보기 어렵다고 한다.

백사실 계곡도 이제는 많이 알려져서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차분하게 찾아가 휴식을 즐기면서 가볍게 준비해간 김밥 한 줄에 커피 한잔으로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무분별한 방문객들에 의한 자연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도롱뇽이 산다는 청정 계곡물에는 한여름에도 발을 담그지 못하게 하면서 보존하려고 애쓰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둘러본 백사실 계곡. 다시 올라오기에는 많이 아쉽다. 그래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얼마 안 걸었는데 숲은 끝나고 계곡 줄기 건너에 절집이 하나 보인다. 삼각산현통사(三角山玄通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현통사 입구, 좌측 석벽에 걸린 一鵬愛國詩(일붕애국시).

고려 시대부터 현통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 절집은 70년대 들어 모양을 갖춘 근대 사찰이다. 일주문은 없이 두 명의 금강역사가 그려진 문짝이 달린 대문이 세워져 있고, 왼쪽 바위에는 한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일붕(一鵬) 서경보 스님이 지은 시(詩) '일붕애국시(一鵬愛國詩)'를 새긴 돌판이 박혀있어 눈길을 끈다.

일붕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라니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역사나 규모 있는 건축물, 보물 등 문화재가 보이지 않아 대수로운 곳은 아닌 듯싶었다.

백사실 계곡을 찾은 사람들이 지나는 경로에 있어 구경삼아 들르기도 하지만, 부득이한 용변을 보기 위해서도 들를 수 있는 곳인데 야속하게도 이 절의 화장실은 잠겨 있었다.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니 '공사중'이라고 한다. 산을 찾는 시민들에게 해우소를 개방하는 보시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아쉽다.

야속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제월당(霽月堂)의 '月' 자가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왜 누웠을까?

절집 아래로 흐르는 계곡 물은 이내 복개천으로 덮여버리고 주택들이 산 중턱까지 어지럽게 올라와 있었다. 아마도 무허가 주택들이 난립했다가 양성화로 뒤늦게 승인받아 기정사실화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아래로는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백사실 계곡이 무색하다.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보상 후 철거시키고 자연 그대로 복원하여 시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백사실 계곡을 벗어나 큰길가로 내려서니 세검정(洗劍亭)이 나타난다. 인조반정 때 반군들이 모여 검을 씻었다는 세검정, 1941년 화재로 소실되어 1977년 복원하였다.

세검정 모습.

이곳은 주로 무신(武臣)들의 휴식처였으며 근처에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가 있어서 실록의 편찬이 끝나면 사용한 종이를 씻는 세초(洗草)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세검정에서 상명대학교 앞 삼거리 쪽으로 내려가다가 파출소에서 잠시 화장실을 빌려 썼다. 경복궁역에서 자하문을 거쳐 백사실 계곡을 둘러보고 이곳까지 내려오는데 중간에 쉬는 시간 포함 약 2~3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아쉽게도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 종교 시설인 절집에서도 화장실 사용은 거부한다. 종종걸음으로 하산하는 모습이 측은하다.

이광수 별장터. 조선일보 부사장 때 지었다고 하며 당시 건물은 남아있지 않아 1970년대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길을 건너 상명대 아래쪽 골목을 올라가니 '이광수 별장터'가 있다. 마침 내부 공사 중인지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밖에서만 들여다보고 공사를 마치면 다시 와 보기로 했다.

(사진 위쪽)오간수문(五間水門)과 홍지문(弘知門)

다시 큰길로 내려와 홍제천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홍지문(弘知門)과 탕춘대성(湯春垈城)이 나온다. 한양 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한 보조 성곽과 성문이며 바로 옆 홍제천 위로는 5개의 수문인 오간수문(五間水門)이 놓여있다.

홍지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작은 절집을 만난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쉬운데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보호각 아래 큰 바위에 모셔진 백불(白佛), 즉 하얀 부처님이 눈에 띈다. 예전에는 보호각이 없이 노출된 바위에 흰색을 칠한 부처님이 눈에 확 띄곤 했는데 보호각을 짓고는 그것도 부족해 가림막을 주렁주렁 달아놓으니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곤 한다.

고려 시대 마애불로 이성계도 한양 도읍 때 이곳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머리에는 고려 시대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옥천암 마애불. 보도각(普渡閣) 안에 모셔 놓았으며 보호각 외에도 가림막과 낮은 담장으로 불상이 잘 안 보인다.

이렇게 경복궁역에서부터 자하문 고개로 올라와 백사실 계곡을 둘러본 후 다시 세검정 쪽으로 하산하여 이광수 별장과 홍지문, 보도각 백불을 둘러보기까지 반나절이면 족하다.

시간이 좀 더 있으면 대원군 별장 석파정이나 안평대군 집터 등 주변에 좀 더 둘러볼 곳도 있고 이름난 커피점이나 맛집들도 많아서 산책 겸 답사, 걷기를 병행하여 다녀오기에 좋은 곳이다. 게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절정이며 봄, 여름에는 신록이 우거지고 계곡 물이 맑아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나 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멋진 곳이기에 이렇게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