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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면접관이 상사·동료 딸 합격시키고 성적 조작까지 대구과학원은 ‘非理백화점’

다들 바쁘실텐데 일일이 서류 검토하시기도 그렇고 요약본 보시고 적합한 응시자를 3배수 정도 체크해 주십시오. 꼭 필요하시면 컴퓨터를 통해 자료를 보실 수도 있고요.”

심사위원 5명 자리에는 엑셀파일로 정리된 인쇄물이 놓였습니다. 전시기획·전시운영·교육연구·경영기획·운영지원·홍보협력 등 모집 분야별로 책임급·선임급·원급으로 구분돼 응시자 이름·나이·학력·경력이 한 줄씩 정리돼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2~3시간 동안 응시자 341명의 정보를 훑어보고는 적격자 이름 앞에 체크를 했습니다.

잠시 후 과학관 직원이 칸칸이 비워져 있는 ‘채점표’를 주며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라고 했고, 심사위원들이 서명을 하자 채점표를 거둬갔습니다. 지난달 21일 열린 국립대구과학관의 직원 공개경쟁채용 서류전형 장면입니다.


	조작 흔적이 있는 대구과학관 서류전형 심사집계표. /최민의 의원실 제공
조작 흔적이 있는 대구과학관 서류전형 심사집계표. /최민의 의원실 제공


대구과학관측은 임의로 채점표에 점수를 채워넣어 4일 뒤 1차 합격자 67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면접도 똑같은 방식으로 치러 24명을 최종합격시켰습니다.

대구과학관측은 “심사위원들의 추천(체크)을 많이 받은 응시자 순으로 합격을 시켰고, 채점표는 거기에 맞도록 점수를 채워넣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 심사위원은 “내가 체크한 응시자가 합격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는 엉터리 심사였다”며 “과학관 관장과 인사담당자가 심사위원으로 함께 참여해 ‘빨리 빨리, 쉽게 쉽게’ 분위기를 만드는 바람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정부와 대구시가 총 1160억원을 들여 이달 개관하는 대구과학관은 ‘非理 백화점’

연봉 4000만~8000만원에 정년이 61세까지 보장되는 국가기관의 직원 24명은 이렇게 뽑혔습니다. 문제는 최종 합격자 발표 직후 터졌습니다. 합격자 24명 가운데 현직 공무원 5명, 고위 공직자 자녀 7명, 기자 부인 2명 등 14명이 포함돼 ‘특혜 의혹’에 휩싸인 것입니다. 대구시민들은 뭘 하는 곳인지, 어디에 있는 곳인지조차 모르는 ‘대구과학관’이 요즘 대구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의혹을 받고 있는 합격자 중 현직 공무원은 미래창조과학부 소속 김모(58) 서기관과 권모(53) 사무관, 특허청 김모(49) 사무관, 대구시 이모(53) 사무관과 정모(54·6급) 주무관 등입니다. 대부분 대구과학관 설립업무를 보던 공무원들이고, 특허청 김 사무관은 옛 교육과학기술부 출신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최종 합격도 하기 전에 명예퇴직을 신청했습니다. 이미 내정돼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 부분입니다.

공직자 자녀들은 더 어처구니 없습니다. 대구과학관에 매년 40억여원씩을 지원하고, 운영 및 관리를 맡고 있는 대구시 신성장정책관실 책임자인 곽모(56) 서기관의 딸(21), 같은 부서의 김모 서기관의 딸(25)이 나란히 합격했고, 모 구청 배모(54·부이사관) 부구청장의 아들(29)과 영주시청 전 사무관의 아들(32)도 포함됐습니다. 이어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간부의 자녀 3명도 합격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대구에 근무하는 기자 부인 2명도 합격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대구과학관.
대구과학관.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사회단체는 성명을 내고 대구과학관 공채 무효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지난 4일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해 “대구국립과학관의 직원 공개 채용에서 관련 공무원이 직무와 연관 있는 기관에 자녀를 취업시키려고 한 사실 만으로도 시정(市政)을 크게 실추시켰다”며 곽 서기관을 직위해제 시키고 특별감사를 지시했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도 지난 10일부터 감사를 진행 중입니다. 곽 서기관과 배 부구청장의 자녀 2명은 이미 채용 포기 의사를 밝혔습니다.

“공무원 자녀는 시험도 못봅니까.”(합격자 부모)

“부모가 공무원이라는 것만으로 부정 채용됐다는 것은 억울합니다.”(합격한 공무원 자녀)

대구과학관과 대구시를 찾아갔더니 의혹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딸이 합격해 구설수에 올라 직위해제를 당한 곽 서기관은 “사표를 쓰겠다”며 거세게 항의했다고 하고, 같은 부서 김 서기관은 “실력으로 합격했다. 여론에 밀려 입사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배 부구청장은 자신의 SNS에 “아버지의 꿈을 위해 아들의 꿈을 접게 했다”는 내용의 글로 억울함을 표시했습니다.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결국 경찰이 나섰고, 각종 특혜 정황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선정부터 문제였습니다. 1차 서류전형·2차 면접 때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외부 추천 절차도 없이 과학관 직원들끼리 임의로 정했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 공무원 1명, 대구시 공무원 1명, 대구과학관 관장과 인사담당자, 외부 인사 등 5명이었습니다.

외부 추천없이 승진 심사위원 구성

대구시 신성장정책관실 소속 서기관 2명의 자녀들을 채점할 때 심사위원은 직속 부하인 사무관이었습니다. 이번에 합격한 미래창조과학부 김 서기관은 자신이 추천한 미래과학부 공무원을 심사위원으로 앉혔습니다. 그는 “응시자였기 때문에 채용과정은 하나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합격한 한 공무원은 “사실 관련 업무를 잘 안다고 스카웃 제의를 받아 응시하게 됐다. 공채였지만 이미 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면접에서 떨어진 한 응시자는 “5명씩 면접을 봤는데 면접관 질문에 대답 한마디 못한 사람이 합격한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과학관 직원들이 임의로 채점표를 작성하고, 심사위원들의 채점 결과를 파기해 버린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또 모집분야만 나눠놨을 뿐 전공은 무관하게 뽑았습니다. 전시가 주 목적인 과학관에 법학과·불문학과·조경학과 등 관련 없는 전공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채용과정에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형 과정의 녹취나 녹화, 회의록 등도 없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심사위원들 중에는 고위 공직자로부터 청탁 전화를 받은 사람도 있었고, 일부 응시자들이 사전에 정보를 공유한 정황도 있어 수사 중”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10일 대구 달성경찰서에서 '대구과학관 채용 비리 사건'과 관련, 기자브리핑이 열렸다. 홍사준 수사과장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최재훈 기자
지난 10일 대구 달성경찰서에서 '대구과학관 채용 비리 사건'과 관련, 기자브리핑이 열렸다. 홍사준 수사과장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최재훈 기자

최근 대구과학관 채용 서류를 분석한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11일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한 응시자는 서류전형에서 255점을 받아 1위를 했지만 집계과정에서 점수가 245점으로 고쳐져 결국 탈락했고, 이 분야에 공무원 자녀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응시자는 ‘책임급’으로 지원해 서류·면접을 통과했는데, 한 단계 아래 등급인 ‘선임급’으로 합격됐고, 지원 분야와 무관한 경력이 3~7개월밖에 안되는 응시자들도 합격했다고 했습니다.

과학관의 한 직원은 “서류전형이 끝나고 심사집계표를 만들어 관장에게 보고했는데,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져 일부 직원들이 일요일에 불려나와 서류를 뜯어고치는 등 난리를 피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윗선에서 지시하는대로 서류를 꾸미고 있는 분위기였다”고 전했습니다.

대구과학관은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11만70087㎡ 부지에 연면적 2만3996㎡ 지하1층·지상3층 규모로 지어진 과학전시관입니다. 특별법(과학관 설립 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미래창조과학부와 대구시가 1160억원을 들여 지었고, 이달 개관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습니다. 운영비 분담을 놓고 정부와 대구시가 갈등을 빚는 바람에 건립공사 도중 5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됐었고 작년 10월 준공 이후 다툼이 끝나지 않아 9개월 동안 문을 못 열고 있었습니다. 매년 100억여원이 드는 운영비를 정부는 ‘국비 60%, 시비 40%씩 부담하자’고 주장했고, 대구시는 전액 정부에서 부담하라고 맞섰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 과학관은 9개월 동안 텅 빈 채 건물 관리비 등으로 예산 7억여원만 낭비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구시가 운영비 40%를 부담키로 합의하고 올 4월 조청원(60) 전 국립중앙과학관 관장이 초대 관장으로 부임해 본격 개관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싸우던 사이에 정(情)이라도 든 것일까요? 아니면 대구시가 운영비 부담을 떠안으면서 별도의 보상(?)이라도 약속한 것일까요.

청소년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 미래 창조적 인재를 키워내겠다던 대구과학관은 문도 열지 못한 채 ‘비리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채용 비리 의혹이 앞으로 얼마만큼 사실로 드러날지두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