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두뇌 유출 막으려면 성과 압박 마라”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이 말하는 ‘브레인리턴 500’


	[주간조선] “두뇌 유출  막으려면 성과 압박  마라”

2010년 국가과학자로 선정됐고, 발표한 논문의 30% 이상이 네이처·셀 등 권위 있는 학술지에 게재된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영국왕립협회 펠로십 멤버이자 응집물질 물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가브리엘 애플리(Gabriel Aeppli)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교수.

명성만으로도 쟁쟁한 세계적 석학들이 한데 모인 프로젝트가 있다. 기초과학연구원이 진행하는 ‘브레인리턴 500’ 프로젝트다.

‘브레인리턴 500’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1개 연구단에 배정되는 1년 평균 연구 지원금은 100억원에 이른다. 2017년까지 50개의 연구단, 500명의 과학자를 모으겠다는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한국으로 과학자를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한인 과학자는 물론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외국인 과학자들을 포섭하는 것이 목적이다. 왜 이런 프로젝트가 시작됐을까.

지난 8월 27일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은 “근본적인 원인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얼마 전에 미국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한 유망한 한인 과학자를 만났어요. 연구 지원 자금으로 대학에서 200만달러(약 22억3000만원)를 받았다더군요. 미국에서는 능력만 있다면 50만달러, 100만달러 받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에요.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원한다면 그만큼 대우해줘야 해요. 경제적인 부분은 물론 연구 풍토, 핵심 연구 분야까지 바꿔야 합니다.”

◇외국 체류 한국인 과학자 "해외 머물겠다" 54.7% "돌아가겠다" 37.1%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이하 과기평)이 지난해 11월 우리나라 국적으로 외국에서 일하거나 대학원에 다니는 과학자 3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해외에서 머물겠다는 인원은 187명(54.7%)으로 국내로 돌아오겠다는 127명(37.1%)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연구재단의 통계를 봐도 2001년 한국에 들어온 외국 박사 취득자가 1496명이었는 데 반해 2012년 한국에 온 사람은 610명에 불과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원)의 ‘세계경쟁력연감’에 따르면 우리나라 두뇌유출지수는 2013년 4.63으로 조사 대상 59개국 중 37위였다. 두뇌유출지수는 숫자가 클수록 우수 인력이 국내에 체류해 국가 경제에 나쁜 영향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치는 그나마 2011년 3.68(44위), 2012년 3.40(49위)으로 계속 낮아지다가 올해 들어 나아진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문제에 있다. 과기평이 작년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공계 박사학위 취득자의 평균연봉은 7074만원. 2007년 EU가 발표한 미국 과학자 평균연봉 6만3000유로(약 9500만원)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이다.

미국에서도 이공계열 1, 2위를 다투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지난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수영(33)씨도 같은 얘기를 했다. “가족과 친구가 있는 한국에서 취직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안이 온 한 대학 연구실에서는 많아야 5000만원을 제시하더군요. 같은 시기에 미국의 한 재단에서는 6만달러에 연구 지원금 10만달러를 주겠다고 했어요.” 김씨는 올해 1월부터 미국 워싱턴주의 시애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오세정 원장은 경제적 문제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떠난 ‘성과’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실 과학자가 가장 활발하게 연구에 집중하는 시기는 박사학위 취득 후 10~20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에 돈을 어떻게 마련하나를 먼저 생각해야 하죠. 기껏 해봤자 1억원 주면 많이 주는 상황에서 실험 기자재를 사고, 실험실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만 4~5년이 걸리고 나면 과학자로서 황금기가 지나게 됩니다.”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연구 환경의 영향도 크다. 과기평의 지난해 설문조사 결과를 봐도 외국에서 학위 취득 중인 대학원생들은 비자율적인 연구 환경을 국내 복귀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외국에서 재직 중인 과학자들이 자녀 교육 환경, 연봉 수준에 이어 세 번째로 꼽을 정도다.

오세정 원장은 미국의 예를 들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이나 기타 연구재단들을 보면 처음 연구 지원비를 설정할 때는 매우 까다로운 심사를 거칩니다. 기준에 맞는다고 생각하면 아낌없이 투자하지요. 그리고 나서는 결과 보고를 받지 않습니다. 만약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작년 강수경 서울대 수의대 교수가 무려 17편의 논문에서 연구 결과를 조작해 파문이 일었던 사건 역시 연구 성과를 올려 연구비를 선점하려는 풍토에서 발생한 것이다.

◇한국의 정보·전자·통신 분야 기술, 세계 수준보다 11점이나 낮아

흔히 우리나라에는 우수한 인재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막상 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에 비해 많이 부족한 편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발표한 ‘KISTI가 바라보는 미래유망기술 탐색’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기술 수준은 정보·전자·통신 분야에서 69.8점. 세계 수준의 81.6점보다 11점 넘게 적은데, 기술 격차 역시 3~4년이 발생한다.

그나마 IT 분야는 나은 편이다. 최근 과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에너지·자원 분야의 기술 격차는 6.3년, 환경·기상 분야는 6.1년, 우주·항공·해양 분야는 6.3년, 재난·재해 분야는 8.8년에 이른다.

유영성 경기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두뇌 유출, 투자 유출 심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격차가 고급 인재가 부족해 생긴 일로 분석했다. 특히 미래 유명산업 분야의 인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유 연구위원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바이오의약 분야에서 2020년까지 필요한 인력은 연평균 2275명. 그러나 연 887명의 인재만이 이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환경기술 분야의 격차도 커 연평균 1809명의 인력이 필요하지만 공급될 인원은 729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뇌 유출로 인한 성장동력 부족으로 개발도상국이 중진국 단계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장기간 정체해 버리는 ‘중진국 함정’이 좀 더 오래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유영성 연구위원은 “중진국 함정에 빠진 가장 직접적 원인은 잠재성장률이 계속 하락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1981~1990년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10.62%. 그러나 1991~2000년에는 6.43%로 떨어졌다가 2013년 현재 3.01%에 그치고 있다.

유 연구위원은 “예전에는 선진국을 모방해 기술 수준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장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신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유망 산업을 선도하는 능력이 부족해 잠재성장률이 계속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당장 연구성과 내기 어려운 기후변화, 뇌과학, 에너지 등 ‘선도적 연구 분야’에 집중

브레인리턴 500’ 프로젝트는 충분한 경제적 지원, 자율적 연구 풍토, 선도적 연구 분야 개발을 이뤄낼 대안 중 하나다. 2017년까지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들로만 50개 연구단을 모은다는 계획하에 지금까지 선정한 연구단은 19개.

이 중 재외 한국인 과학자가 단장인 연구단이 3개, 외국인이 단장인 연구단이 3개다. 연구단을 꾸릴 시간이 2년 정도 주어지기 때문에 현재는 구성 중인 연구단이 많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막대한 연구비뿐만이 아니다. 연구 주제에 대한 자율성은 당연히 보장이 된다. 오세정 원장은 “3년마다 ‘묶음예산’으로 연구비를 지원하기 때문에 연구에 대한 보고서 역시 3년에 한 번 제출하면 된다”며 “연구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연구단의 상당수가 당장 연구 성과를 내기 어려운 기후변화, 뇌과학, 에너지 등 ‘선도적 연구 분야’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연구 성과만을 가지고 지원이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단을 선정하는 위원회는 16명의 평가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구재단인 독일의 막스프랑크재단에서 디렉터로 재직했던 외국인 과학자도 있고, 외국에서 더 명성이 높은 한국인 과학자도 포함돼 있다.

심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단의 연구가 세계 과학계를 선도해 나갈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 오 원장은 “지금까지 우리 과학계는 외국 수준을 뒤쫓아가는 것에 그쳤지만 이제는 세계 트렌드를 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서울대에서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급과 SCOPUS(국제학술인용색인) 등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의 수는 2011년 5576.6편으로 세계 어느 대학에 못지않은 수준이다. 그러나 오 원장은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브레인리턴 500’에서는 전체 연구단의 3분의 2 정도를 아직 우리나라에서 취약한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단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오 원장은 “돈이 많이 필요하지만 쉽게 추진하기 어려웠던 분야를 중심으로 외국 과학자까지 적극 영입해 지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기존의 많은 연구재단과 달리 ‘브레인리턴 500’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연구단은 원래 가지고 있던 직책, 대학교수 등을 유지하며 연구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 과학자를 유치하는 데도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과학계의 관행을 깨고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고 파격적인 독립성을 보장할 예정이기 때문에 장애물도 만만치 않다. 오 원장에 따르면 현재 가장 난점은 행정적인 부분이라는 것.

“취지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예산 집행기관에서는 분명한 성과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결과 보고서나 기관 평가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 프로젝트가 하게 될 일은 분명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일 겁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성공적인 결과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과학계의 패러다임을 바꿔, 몇십 년 몇백 년 뒤 성장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