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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밤을 잊은 그대에게 시그널 음악:Paul Mauriat - La Reine De Saba (시바의 여왕)

 

 

 

클래식랜드 가꾸는 일흔셋의 피터팬
15년 걸려 구축한 오디오
메인시스템 웨스턴일렉트릭 1928년 美서 만든 희귀본 히틀러의 오디오로 유명한
독일산 클랑필름도 갖춰… LP만 1만5000장 달해
나는 비주류다
경희대 출신 첫 TBC 입사 아나운서 된 후 6년 동안
프로그램 하나 못맡고 시보 알리는 콜사인 전전

 

 

 

 

 

황인용은 스스로를 말할 때 '주제넘게', '아는 게 없어서', '내가 무슨' 같은 말을 습관처럼 붙였다. 일흔 넘은 어른이 줄곧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게 조금 불편할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가 열 살쯤 선배 정도로 느껴져서 하마터면 '형님'이라고 부를 뻔했다. 1940년 경기 파주에서 태어난 황인용은 올해 73세다. 방송을 떠나 파주 헤이리에 '카메라타(Camerata)'라는 음악감상실을 연 지 올해로 10년이 된다. 차 한잔하며 음악이나 듣자는 그를 찾아간 것은 지난 19일이었다. 정오를 조금 앞둔 시각 카메라타의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니 신문을 읽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벨벳 소재 재킷에 줄무늬 터틀넥을 받쳐 입었고, 짙은 색깔의 진 바지에 나이키 스니커즈를 신었다.

 
 
200㎥(약 60평)쯤 되는 홀의 정면에는 거대한 스피커 3조(組)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위압적이었으나 거기서 흘러나오는 하이든 현악 4중주는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천장에서 볕이 쏟아지는 창가 자리에 20대 남녀가 나란히 앉아 간지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카메라타는 '동호인 모임'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좌석 배열이 바뀌었군요.

"그래요. 스피커를 향해서 극장식으로 놓았더니 사람들이 좀 불편하게 생각해요.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게 느껴지나 봐요. 그래서 카페식으로 바꾸었어요."

이 건물은 건축가 조병수의 작품으로 창문이 천장으로 나 있어 밖에서는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할 수 없다. 여기엔 황인용의 취향도 대폭 가미됐는데, 이를테면 화장실 세면대는 1970년대 초등학교 화장실에 있던 시멘트 세면대 모양 그대로다. 모든 테이블에는 연필이 가느다란 노끈에 묶여 있고 노끈 다른 쪽엔 조약돌이 묶여 있다. 그 조약돌은 메모지 위에 놓여 서진(書鎭) 역할을 한다. 그 옆엔 연필깎이도 하나씩 놓였다. 음악감상실의 모든 가구와 소품이 홀로 튀지 않고 오로지 음악과 여유로운 시간을 위해 복무하도록 설계된 느낌이었다. 입장료(성인 1만원)를 내면 커피를 비롯한 여러 가지 차를 셀프서비스로 마시도록 했으니, 이곳은 음악 카페가 아니라 음악감상실로 부르는 게 맞는다.

―요즘은 연중무휴로 운영한다면서요.

"처음엔 문 열고 싶을 때만 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곳이 약간 공공성을 띠게 되면서 맘대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됐어요. 그래서 매주 월요일에 쉬었는데, 멀리서 오신 분들이 허탕을 치는 일이 생겨요. 한 번은 목포에서 전화가 와서 '어제 목포에서 일부러 갔는데 닫혀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1년 365일 열어요. 설이나 추석에도 못 쉬어요. 그때 사람들이 더 많이 오니까요."

카메라타에는 여러 조(組)의 오디오가 있는데, 모두 1950년대 이전에 제작된 것들이다. 메인 시스템이라고 할 '웨스턴 일렉트릭'은 1928년 미국에서 극장용으로 제작한 앰프와 스피커로 구성돼 있다. 두 번째 시스템인 '클랑필름' 역시 '히틀러의 오디오'로 이름난 1930년대 독일 제품이다. 이런 빈티지 오디오는 한 세트를 한꺼번에 구할 수 없어 황인용이 지금의 시스템을 갖추는 데 15년가량이 걸렸다. 스피커들 오른편으로 DJ 박스가 있고, 그 안에 육중한 앰프와 턴테이블들이 그득했다. 그 뒤로는 LP 1만5000장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1920~30년대 제작된 오디오로 카메라타를 꾸민 황인용은 "오디오를 하면서 좋은 소리를 찾다 보니 점점 더 옛날 제품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며 "이 오디오를 듣고 나서는 '이제까지 무슨 오디오를 들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소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지금도 늘 생각한다고 했다. / 파주=이태경 기자
 
―이런 시스템을 갖추려면 정말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겠군요.

"내가 1980년에 국내 아나운서로는 처음으로 프리랜서가 됐어요. 그랬더니 월급이 여러 배 뛰었지요. 그때 첫 월급을 받자마자 세운상가로 달려가 쿼드(영국산 앰프)와 탄노이(스코틀랜드산 스피커)를 장만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해온 거예요."

―항상 여기 나와 있습니까.

"별일 없는 한 나와 있어요. 바로 옆 건물이 집이기도 하고…. 여기 와 있으면 참 마음이 편해요. 생각해보면 인생이 전부 남의 덕에 사는 거예요. 에디슨이 축음기를 만들고, 1920~30년대에 오디오 장인들이 저런 기막힌 오디오를 만들었잖아요.

또 천재 작곡가들이 만든 곡들을 훌륭한 연주자들이 녹음하면 나는 듣기만 하면 되잖아요. 내가 만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 남의 덕이라고요.”

그는 대화 도중 음악이 끊기면 어김없이 일어나 DJ 박스로 갔다. 그곳에서 새 음반을 골라 음악을 틀고 화이트보드에 곡명을 썼다. 바쁠 일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이상한 직업이었다.

“긴장할 필요는 없지만 항상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해요. 이게 라디오 DJ 할 때부터 직업병 같은 건데, 이 음악 다음에는 어떤 음악을 틀어야 하나, 그런 걸 생각해야 하죠. 이 음악이 끝나면 성악을 한 곡 틀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야, 피아노 트리오 들은 지가 꽤 됐지? 아니, 현악 4중주가 좋겠네, 이런 식이죠. 방송에서는 5초에서 7초 정도 블랭크(blank)가 생기면 방송 사고로 쳐요. 여기서는 가끔 일부러 음악과 음악 사이에 조용한 시간을 조금 더 둬요. 그 잠시의 정적을 나는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요.”

 

"2000년 국회의원 출마할 뻔… 배달된 돈상자 보고 겁나 포기했어요"

'카메라타' 문 연 지 10년 황인용

기막힌 우연과 인연
다들 기피한 노인프로그램 '장수만세' 떠맡아 인기 얻고
'심야방송 DJ는 아나운서로' 정부 정책 덕에 이름 날려

호프집 DJ로 팝과 만남
73년 부업하면 잘리던시절 집 살때 얻은 빚 갚으려
6개월동안 아르바이트 그때 팝송 배워 도움됐지

남의 덕에 산다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와 천재 작곡가들의 곡과
훌륭한 연주자들 녹음… 나는 그저 듣기만 할 뿐

―파주가 고향이시죠.

“파주군 임진면 사목리가 고향이에요.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파주 전체에 축음기는커녕 라디오도 한 대 없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파주에서 유명한 한학자이셨는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시경·서경·대학·중용 같은 책을 암송하셨어요. 다른 집 아버지들은 농사를 지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모 심는 법도 모르셨어요. 그래서 ‘나는 좀 특별한 집안의 아이인가’ 하는 일종의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비주류가 되면서 지금까지 내 인생은 줄곧 비주류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전쟁이 났지요. 내가 초등학교만 네 군데 다녔어요. 마정초등학교 다니다가 6·25가 났고, 1952년엔 피란민 학교에 다녔어요. 그리고 아버지 서당을 따라서 청석초, 교하초등학교로 전학 다니다가 졸업했어요.”

―피란을 멀리 떠나지는 않았나 봅니다.

“어머니와 여동생, 나 그렇게 셋이 갔어요. 아버지는 손에 흙 한 번 안 묻힌 분이었지만 어머니는 여장부이셨죠. 1·4 후퇴 때 중공군이 밀고 내려온다고 해서 피란을 가는데, 아버지가 ‘나는 힘들어서 못 가니 엄마하고 갔다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셋이 천안 이모 댁으로 피란 갔어요. 그런데 이모 댁이 이미 피란민으로 가득 찬 거예요. 이모가 별로 반가워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닷새 만에 파주로 돌아왔어요. 어머니가 ‘가자. 죽더라도 아버지하고 같이 죽자’ 하셨죠. 석탄 열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와서 또 파주까지 걸어오는데, 일산에서 전투가 벌어진 거예요. 전쟁을 뚫고 역피란을 온 거죠.”

―피란 시절에는 주류, 비주류가 따로 없지 않습니까.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다니니까 친구가 없어요. 서울 용산중학교에 진학했는데 그때까지 전차 타는 법도 몰랐어요. 중학교에 가보니 다들 남산, 수송, 덕수초등학교 나온 애들인데 나만 파주야. 경희대(법학과)도 학자금 꿔준다고 해서 간신히 들어갔고…. 나는 학맥이 아예 없어요.”

―방송인으로 유명한 분인데 비주류라고 하는 건 좀….

“방송에서도 나는 비주류였어요. 골든아워에 프로그램을 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학창 시절엔 학비 버느라고 책을 읽거나 교양을 쌓을 틈이 없었어요. 효제초등학교에서 숙직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밤에 야구 방망이 들고 순찰만 하는 경비원이죠. 먹고 잘 데가 없어서 그랬어요. 그래서 지금도 청취자들에게 미안한 게 나 정도의 독서량을 갖고 아나운서랍시고 아는 척했던 거예요. DJ 할 때는 노래가 딱 끝나면 뭔가 멋진 말을 하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하여튼 내 인생 전체가 비주류인데, 오디오도 저런 앤티크 쪽으로 몰려간 게 비주류적인 성격을 말해주는 거예요. 자동차도 일본 자동차라면 도요타는 아예 관심이 없고 스바루에 관심 갖는 식이죠.”

그는 2000년형 재규어 승용차를 탄다. “유럽 차에서도 벤츠나 BMW에는 관심이 없다”는 그는 지금 타는 모델이 마음에 들어 4년을 기다린 끝에 2년 남짓 탄 중고차를 구해 10년 넘게 타고 있다.

―TBC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할 정도면 꽤 실력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아나운서 시험도 정말 우연히 본 거예요. 학비 버느라고 대학 2년을 휴학했었는데, 먼저 취직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신문에서 시험 공고를 본 거예요. 친구가 나더러 ‘너 목소리가 좋고 낭송도 잘하니 아나운서 시험을 보라’고 권했어요. 그래서 시험을 보긴 했는데 1차 합격자 12명에 뽑힌 거예요. 두 명 중에 나하고 성대 출신이 한 명, 나머지는 전부 서울대·연대·고대예요. ‘이거 힘들겠구나’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카메라 테스트를 한다는데 어차피 떨어질 것, 하면서 손짓 발짓 섞어서 막 얘기를 했죠. 나처럼 용기없는 놈이 말이에요. 그랬더니 최종 합격자 3명에 뽑힌 거예요.”

―그러면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은 경희대가 참 자랑스럽지만… 그때는 의식적으로 늘 코너에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에서도…. 아나운서 되고 6년이 되도록 프로그램 하나 맡기지 않더라고요. 만날 5분짜리 라디오 뉴스나 하고, 콜 사인이나 하고.”

―콜 사인이 뭡니까.

“시보(時報) 알려주는 것 말이에요. ‘여기는 동양방송입니다. HLKC’, 아니면 ‘잠시 후 다섯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같은 거요. 지금은 다 녹음해서 자동으로 틀지만 그때는 전부 생방송으로 했어요. 그러니까 만날 술이나 마시고…. 그때 조선일보 사람들도 대머리집에서 자주 만났는데, 사직동에 있던 막걸릿집인데 광화문통 매스컴 쪽 사람들이 전부 그 집에서 막걸리를 먹었어요. 항상 외상으로 먹었는데, 이 주인 양반이 아나운서실 문을 딱 열고 나타나면 그날이 특근비 나오는 날이야. 그 양반이 언론사 특근비 나오는 날을 줄줄이 외웠어요. 꼼짝없이 다 털리는 거지, 뭐.”

―그래도 인기 프로그램을 많이 했잖습니까.

“라디오는 그렇죠. TV는 그렇지 않았어요. 시골서 자라서 서울 간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요. 근사한 것과 명예에 대한 동경 말이죠. 나도 아나운서라면 시사 프로그램을 맡아서 사회에 영향도 미치고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 인생의 우연과 인연이 만나는 걸 보면 기가 막혀요. 내가 알려진 프로가 ‘장수만세’인데, 그것도 완전히 비주류, 변두리 프로그램이에요. 노인네 프로니까. 선배들이 다 하기 싫다는 게 나한테 왔어요. 근데 아버지가 한학을 하셔서 노인들 공대하는 방법이 나한테 체화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장수만세’에서 노인 출연자들 모시는 게 아주 자연스러웠죠. 할 말 없으면 같이 웃으면 되고. 노인 모시고 사는 가족 세 팀이 출연하는 프로였는데, 나중에는 꽤 인기가 있었다고요.”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그것도 우연이죠. 그때 심야 방송을 모두 연예인들이 할 때인데, 동아방송에 이장희가 딱 버티고 있으니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청취율이 안 올라가요. 그런데 심야 방송에 청소년들이 너무 매달리니까 정부에서 ‘심야 방송 DJ를 아나운서로 바꾸라’는 지시가 왔어요. 그래서 모든 심야 방송 DJ를 아나운서로 바꿨는데 ‘장수만세’로 얼굴이 좀 알려진 나로 바꾸게 된 거죠. 그걸 8년이나 하다 보니까 TBC 마지막 방송도 내가 하게 됐던 거고요.”

 
요즘 황인용은 카메라타에서 '음악 속의 역사, 역사 속의 음악'이라는 강연 시리즈를 월 2회 열고 있다. 그는 "주제넘지만, 요즘 내가 인문학 강연 듣는 데 푹 빠져있다"며 "많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새로운 걸 공부하는 일이 무척 즐겁다"고 말했다. / 파주=이태경 기자
 
―팝 음악을 좋아했습니까.

“좋아하긴 했지만 팝송 DJ를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아나운서가 뭐 팝송이나 소개하는 프로를 하나, 그렇게 생각했죠. ‘밤을 잊은 그대에게’도 못한다고 일주일을 도망 다니다가 맡았다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또 우연이 작용했어요. 1967년에 결혼해서 73년인가 300만원 주고 집을 샀는데 50만원 빚을 얻어서 샀어요. 그런데 그 돈을 갚을 길이 없는 거예요. 그때 명동에서 생맥줏집을 하던 사람이 나더러 ‘우리 집에서 DJ를 하면 월 10만원씩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 아나운서가 부업 하면 그날로 목이 달아날 때였거든요. 그런데 내가 주제넘게 빚 갚겠다고 그걸 한 거죠. 6개월 동안 해서 빚만 갚고 그만뒀어요. 그때 나름대로 팝송도 배우고 DJ를 배운 게 나중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할 때 도움이 된 거죠.”

―명동에서 부업을 한 게 탄로 나지 않았나요.

“들키지 않았어요. 딱 한 번 누가 아나운서부장을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들킬까봐 구석에 숨어서 말은 안 하고 노래만 틀었죠.”

―프리랜서가 되기로 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내 인기가 높아져서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하면서 동시에 아침 프로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를 진행했어요. 그때 라디오는 하루에 19시간 방송할 때인데 4시간을 내가 했어요. 그러면서 시사 프로그램 욕심도 있지, 야구 중계도 배워야지, 눈코 뜰 새가 없는데 월급은 40만원으로 똑같애. 그때 허참, 임성훈 같은 사람은 아나운서가 아니어서 수입이 꽤 괜찮았다고요. 만날 라디오 PD들하고 술 먹으면서 ‘뭐 이런 경우가 있나’하고 한탄했죠. 그랬더니 PD들이 ‘프리랜서를 하라’고 바람을 넣어요. 마침 내가 강부자씨하고 친해지면서 프리랜서가 뭔지 알게 됐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황인용 프리랜서 선언한다’는 기사가 났어요. 회사에서 야단이 났는데, 홍진기 회장이 부르시더니 ‘다른 방송사엔 출연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하셨죠.”

황인용은 1997년 IMF 외환 위기까지 TV 아침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나 이후 사실상 방송계를 떠났다. 요즘은 간간이 EBS 다큐멘터리에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정도다.

―그래도 멋진 인생을 살아온 것 같은데요.

“나는 강철 같은, 바위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요. 최근에 아문센보다 36일 늦게 남극에 도착한 로버트 스캇 평전을 읽었는데,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못하니까 알려지지 않았죠. 남극 정복 후 귀환하다가 침낭 속에서 죽었어요. 그 사람이 죽어가면서 쓴 편지를 보면 인간의 강철 같은 의지를 엿볼 수 있어요. 그런데 나는 무슨 의지로 살아왔나, 아나운서라면 청와대 가서 무슨 인터뷰도 하고 했어야 하는데, 만날 서민 프로그램만 했죠. 내 인생에도 고비가 몇번 있었는데 나는 항상 살살 피해왔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인수분해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서 중3 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영어나 일본어도 어떤 고비를 넘기지 못해서 결국 잘 못하고, 뭔가 절실하게 부딪쳐보면서 고비를 넘긴 적이 없어요. 방송 MC라면 적어도 자기 이름을 붙인 쇼 하나쯤은 하다가 은퇴를 했어야 하는 건데….”

―‘2000년 새천년민주당 입당’이란 이력도 그래서 남아 있는 겁니까.

“그게 바로 정치에 대한 공명심 때문에 그랬던 건데, 결국 그것도 의미 없게 됐죠.”

―국회의원 출마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랬죠. 청와대 특보를 8번이나 만났으니까요. 그런데 겁이 나더라고요. 배짱이 없는 거지. 우선 어머니가 너무 심하게 반대를 하셨어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우셨다니까. 우리 어머니는 정치 하면 감옥 간다는 등식을 믿는 분이었어요. 솔직히 나는 국회의원 딱 한 번만 하자. 한 번만 하면 돈 먹을 일도 없고 내 소신대로 독불장군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포기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돈 상자를 보니까 겁이 나서 못했어요. 어느 날 그쪽에서 돈이 가득 담긴 상자를 가져 와서 ‘이걸로 일단 사무실을 차리라’고 하더군요. 그걸 보는 순간 그 상자에 ‘노예’라고 써 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저걸 받으면 돈의 노예, 당의 노예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덜덜 떨렸어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돈을 돌려주고 이틀 뒤에 유럽으로 날랐죠.”

―그런데 왜 탈당은 안 했습니까.

“그게 또 내가 숫기가 없고 주관이 뚜렷하지 않아서 그래요. 뭐 입당원서도 그쪽에서 대신 썼으니까 굳이 또 탈당계를 낼 필요 있나 하는 거죠. 사실 나같이 숫기 없는 놈이 주제넘게 방송으로 간 것도 우연이고, 각광받는 걸 즐기면서도 도전은 하지 못했어요.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이중적인 면이 있잖아요. 정말 나는 어떤 게 진리인지 이 나이 되도록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황인용 늙어서 감상실 마련하고 보기 좋다, 할 수도 있죠. 내가 이걸 이루려고 절약한 건 맞지만 꼭 이루고야 말겠다고 치열하게 한 건 또 아니에요. ‘이오지마의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얻은 명성과 내면세계 사이의 차이 때문에 자괴감이 들 때가 있어요. 결국 인간은 남의 덕으로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황인용의 말대로 인간은 타인이 이뤄놓은 것들 덕분에 점점 더 윤택하게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황인용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영팝스’를 들었고 아침 프로그램을 보며 울고 웃었다. 또 카메라타에 들러 사색에 빠지거나 연애를 하거나 사랑을 주고받는다. 예전과 똑같은 음성과 표정, 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보니 노인 분장을 한 젊은 황인용 같은 착각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