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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삶 (1911-1995)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삶 (1911-1995)

한국의 슈바이처, 작은 예수, 바보천사, 살아있는 성자, 푸른 십자가, 아름다운 의사… 聖山(성산) 張起呂(장기려) 박사를 칭송하는 말들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데, 작가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을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진정한 의미의 봉사의 삶을 살다 간 ‘참의사’였습니다. 서울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내 최초로 초기 간암 환자를 간 절제술로 완치시킨 장기려 박사는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950년 12월 아내 金鳳淑(김봉숙)과 5남매를 북한에 남겨 두고 차남 家鏞(가용)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이듬해부터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환자를 위해 자신의 피를 뽑아 주고, 입원비를 지불할 수 없는 환자에게는 밤에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감동적인 일화를 너무도 많이 남겼습니다. 하나같이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입니다. 그가 생전에 남긴 글엔 빈민을 위해 살아온 그의 뜨거웠던 삶이 엿보입니다.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보험 제도가 없던 시절에는 부산에서 <靑十字(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국내 의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업적에도 청빈한 삶을 고집했던 장기려 박사는 1975년 정년퇴임 이후에도 집 한 채 없이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4평 남짓한 옥탑방 관사가 전부였고, 정작 고인 스스로는 죽어서 묻힐 땅 한 평도 마련하지 않을 만큼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면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로 살았으나 외롭지 않았고, 평생 부족한 것 없이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삶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장기려 박사는 김일성 주석의 맹장수술을 담당한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때 수술대에 누워있는 김일성 주석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의사이기 때문에 수술하기 전에는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장군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자기 자신에게 주는 聖山三訓(성산삼훈)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사랑의 동기 없이는 언동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여야 합니다.

셋째, 잘못된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믿고 해결하도록 합니다.

1995년 12월25일 성탄절에 별세하여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고요히 잠든 그의 묘석에는 그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란 아홉 자의 한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의사로서의 삶보다는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사랑과 섬김 그리고 희생의 정신으로 이웃을 위하여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 삶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을 사랑의 의사로 살아 온 사람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빛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습니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와 부인과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면서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45년을 홀로 살았습니다. 장기려 가족의 헤어짐은 단순히 일가족의 이산을 넘어 민족 분단의 상처가 우리 민족 전체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아로새겼는가를 생각케 합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이게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40년 넘게 남쪽에서 살아오는 동안 그의 홀아비(?) 신세를 면하게 해줄 몇 차례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장기려는 “결혼은 오직 한 번하는 것이오. 내가 결혼할 때 주례 목사님이 百年偕老(백년해로)하라고 하셨는데, 이북에 아내가 살아 있고, 아직 백년이 아니 되었는데 어찌 재혼을 생각하겠소?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림을 어찌 저버리겠습니까?” 하며 완곡하게 거절하곤 하였답니다. 그렇게 청혼을 거절하고 돌아온 날 밤에는 아내가 꿈속에서 웃었다지요.

그런 그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은 것인지, 장기려 박사는 1988년 북한에 있는 그의 가족들이 모두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한국전쟁 때 열일곱 어린 나이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간 큰아들 택용은 약학박사가 되어 국제회의에 가끔씩 참석한다는 소식이었고, 큰 딸 신용은 식품공학사, 성용은 핵물리학박사, 인용은 이론 물리학박사, 진용은 교사로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미국에 살고 있는 조카딸 장혜원이 여기저기 알아본 바에 따르면, 팔십이 넘은 아내가 아직도 건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 소식에 접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답니다. 그가 이제껏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 누군가가 북쪽의 가족들을 기려 대신 보살펴 주리라는 소망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그는 한없이 감격하였던 것이지요. 그의 조카딸은 가까스로 북에 있는 가족들의 편지와 육성을 담은 녹음 테이프도 가져다주었습니다. 큰 딸 신용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언니가 보내준 두 장의 사진을 보고 저희들은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사진과 가용 오빠의 사진을 만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언니, 더 슬픈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못 알아보시는 것이었어요. “가용이구나. 너희 아버지 모습이 많이 들어 있어.”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가용 오빠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던지, 아버지의 사진을 보시곤 가용 오빠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또 한 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어요. 저희들이 이 사진이 가용 오빠고, 처음 보는 사진이 아버지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어요. 언니, 사실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젊어 꼬부랑 할머니가 된 우리 어머니가 못 알아보실 만도 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시더니 “우리가 사진으로 이렇게 만나다니요?”그러시곤 한참을 우셨어요.

장기려 박사는 이 편지 대목에서 아내가 울었듯이 한참 울었답니다. 아내보다 젊어 보인 것이 너무 미안했답니다. 그가 북의 아내에게 띄운 편지는 우리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합니다.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을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시지요. 낸들 왜 가 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 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 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 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당시 장기려 박사는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5남매가 잘 장성한 모습을 보니 꿈만 같습니다. 우리가 헤어질 때 아내는 36살이었는데 여자 혼자 5명의 자식을 키웠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가. 몰라볼 만큼 늙은 아내의 모습을 보니 너무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서로가 살아 있으리라는 것을, 서로의 사랑이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꼭 보게 될 것 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우리는 크게 놀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 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지요.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측근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끝으로 장기려 박사가 남긴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매우 소박하지만 그의 신앙-마음-삶이 그대로 전해지는 시입니다.

송도 앞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도꼭지엔 언제나 시원한 물이 나온다

지난 겨울엔 연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쌀독의 쌀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세끼 밥을 먹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다

언제나 그리운 이가 있다

고양이 한 마리는 더 키울 수 있다

그 놈이 새끼를 낳아도 걱정할 일이 못된다

보고 듣고 말함에 불편이 없다

슬픔에 울고 기쁨에 웃을 수 있다

사진첩에 추억이 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그리 밉지만은 않다

기쁠 때 볼 사람이 있다

슬플 때 볼 바다가 있다

밤 하늘에 별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