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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 성자 아니면 바보?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를 기리며…

 

여러분은 소설 <무정>의 작가 이광수님의 <사랑>이라는 작품을 아시나요?  한국 근대 문학의 여명을 이룩한 공헌자로 평가되어 지는 이광수의 소설 <사랑> 속에는 주인공 ‘안빈’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극중 안빈은 작가였다가 의사가 된 사람으로 근엄하면서도 너그러운 성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극중 주인공인 안빈의 실제 모델이 장기려 박사였단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실제 소설가 이광수는 장기려 박사를 일컬어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라고 말했다고 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자신보다 남을 위했던 의사

장기려 박사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출생하였으며, 본적은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안동 739번지입니다. 의성학 교, 송도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수석 졸업 후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경성의전 외과에서 처음 의사가 된 후, 진료를 맡은 할머니가 청진기만 대면 병이 낫는 줄 알고 가슴에 청진기를 한 번만 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한 순간부터 “의사 한번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라고 맹세를 하였다고 합니다.

▲ 인자함이 느껴지는 장기려 박사


이후에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 평양도립병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7년 김일성대학의 외과학 교수로 제직 당시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되었고, 차남과 함께 남하하였지만, 아내와 5남매 그리고 다른 가족 들은 북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일생을 외로이 혼자 사셨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재혼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오직 한번 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살았습니다. 특히 남북간 이산가족 방문의 길이 열려, 그의 특별한 위상의 영향으로 북한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할 수 있을 때까지 먼저 가지 않겠다고 거절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평생을 북에 남겨둔 부인과 자식들을 그리워하였으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순간 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할 정도로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후에 북에 남겨둔 가족과의 조우를 거절한 것에 관해 그가 썼던 글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여보,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 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바보 의사 장기려

월남이후 그는 부산에 정착해,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선생과 한상동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입니다. 이때부터 그는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인 동시에 의사로서 일했으며, 서울대, 부산대, 서울 카톨릭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 외과학 교수로 혹은 학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 항상 가난한 사람의 편이었던 장기려 박사<이미지ㅣEBS 캡처>

 

그가 복음병원에 일할 당시, 치료가 불가능 한 병도 고친다는 장기려 박사에 대한 소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치료불가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입원하게 되었고, 수술을 받아 병을 고쳤지만, 가난한 살림탓에 병원비와 약값을 지불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환자들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 전액으로 대신 지불해주었습니다.


이렇다보니 장기려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자 직원들에 의해 무료환자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박탈 당하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장기려 박사는 치료비를 내기 힘든 환자들에게 자신이 병원 뒷문을 야밤에 열어 줄테니 도망을 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1958년에는 부산 서구 토성동에 있는 지금의 부산대학병원 뒤쪽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놓고 2~3년간 무료치료를 해주었으며, 다음해에는 국내 최초로 간대량 절제술에 성공하는등 국내 의학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신분입니다.

 

1968년에는 영세민들을 위해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협동조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료비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설립하였으며, 정부의 의료보험보다 10년이나 앞선 순수 민간의료보험 기구입니다.

 

"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평생 무소유의 삶을 몸소 실천했던 그는 하직하게 되었을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죽었을때 물레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것이 너무 많아요.."

 

▲ 장기려 박사의 묘지(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노년의 장기려 박사는 당뇨병에 아파하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작은 사택에 살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봉사 의료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늘 입버릇처럼 " 의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던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북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과 찍은 단 한 장의 사진만을 가진채 별세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