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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기사야 놀~자] ECB(유럽 중앙은행)는 왜 유럽 재정위기에 적극 개입 않나요?

유럽중앙은행, 돈 못 푸는 건 태생적 한계 때문 〈조선일보 2011년 11월 21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2008년 9월 세계 4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 2조1000억달러(2400조원)어치의 국채와 금융채를 사들여 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 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존 회원국의 재정위기로 수개월째 금융시장이 마비되다시피 해도 화끈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ECB는 연준과 같은 대규모 자금 투입 없이 채권 유통시장에서 재정 위기국가들의 국채를 찔끔찔끔 사주는 식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 풀어 읽는 경제기사

작년 하반기 내내 글로벌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유럽 재정위기의 해결방안을 둘러싸고 ECB(유럽중앙은행) 역할론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유럽 재정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ECB가 미국 연준처럼 유로존 위기국가들의 국채를 더욱 적극적이고 대규모로 매입해야 한다, 유럽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ECB가 최종대부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등의 신문기사입니다. ECB는 미 연준과 달리 왜 이렇게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걸까요.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미 연준과 ECB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언뜻 보기에 두 기관의 구조는 비슷합니다. ECB는 크게 집행이사회와 정책위원회로 구성됩니다. 집행이사회는 ECB 총재와 부총재, 그리고 네 명의 위원들로 구성됩니다. 정책위원회는 집행이사회 구성원과 유로시스템에 가입한 나라들의 중앙은행 총재들로 이뤄지지요. 유로시스템 안에서 ECB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비슷한 역할을, 참가국 중앙은행들은 미 연준의 12개 지역 연방준비은행과 유사한 역할을 맡는답니다.

중앙은행의 역할 중 하나인 통화정책 수립은 ECB의 경우 정책위원회, 미 연준의 경우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합니다. 그렇다면 두 기관은 구조적인 면에서도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구조적인 면에서 두 기관의 다른 점은 주요 사안 결정을 위한 투표권이 나눠지는 방식에 있습니다. ECB는 집행이사들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모든 결정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반면, 미 연준은 다릅니다. 미 연준은 7명의 이사회 이사들이 각각 한 표,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한 표, 그리고 나머지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들이 번갈아 가면서 네 표를 행사하지요. 따라서 미 연준의 경우 중앙의 투표권이 7표, 지역의 투표권은 5표로 중앙 이사회가 지역 연방준비은행을 통제하는 구조입니다. 반면, ECB의 경우 중앙의 투표권이 6표, 지역의 투표권이 17표여서 참가국 중앙은행들이 ECB를 통제하는 형국입니다.

두 기관은 설립목적과 역할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미 연준은 금융제도의 안정을 위해 1913년 연방준비법에 의해 '은행들의 은행'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연준은 물가안정, 완전고용, 적정 장기이자율 수립 등 여러 목표를 설정하지요. 하지만 ECB는 유럽전체의 통화정책수립을 위해 유럽경제통화연합(EMU)의 기구로 1998년 설립되었으며, 물가안정만이 ECB의 근본 설립목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용이나 성장 등의 목표는 물가안정 달성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보조적으로 수행하도록 설정되어 있답니다.

미 연준과 달리 ECB는 왜 적극적으로 국채를 매입하지 않는 것일까요

미국의 경우 1978년 '완전고용과 균형성장 협약'을 통해 미 연준이 재무부와 협력해 통화정책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재무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연준이 사들여 정부 살림살이에 난 구멍을 메우기 위한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유럽에서는 EMU의 참가국들이 살림살이를 엉망으로 하는 경우 EMU의 안정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몇 가지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특정 국가의 구멍 난 살림살이를 메워주기 위해 다른 참가국 또는 EMU가 지원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ECB가 이러한 지원을 하는 것도 금지해 놨답니다. 이런 제약 때문에 ECB가 국채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2010년에 그리스발 유럽재정위기가 터지자 그해 5월에 유럽연합의 행정명령을 통해 채권매입프로그램(SMP)을 가동, 한시적으로 ECB가 국채와 민간채권을 매입하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SMP는 마스트리히트 조약 위반이라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고 있어 SMP를 통한 국채매입은 ECB에 부담이 되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이런 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SMP를 통한 국채매입 때문에 물가가 오를지 모른다는 경제적인 우려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ECB는 왜 금융시장 안정에도 적극적이지 않은 것일까요

금융시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미 연준의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미 연준은 연방예금보험공사, 통화감독기관 등 다른 연방기구와 함께 은행에 대한 규제·감독을 수행하며, 또한 외국에 있는 미국은행들의 해외지점과 미국에서 영업을 하는 외국은행들에 대한 감독도 맡아 하지요. 하지만 ECB에는 회원국의 은행감독에 대한 직접적인 역할이 없답니다. ECB 회원국의 금융감독은 각국의 금융감독기관에 맡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융감독의 중요한 기능은 금융시장에 위기가 발생하여 돈줄이 마르는 경우 돈을 시장에 제공해 주는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역할입니다. 1913년 은행들의 은행으로 설립된 연준은 최종 대부자로서 돈이 부족한 은행들에 돈을 풀어 금융위기를 진화하도록 하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이후 금융위기로 인해 금융시장에 돈이 부족한 경우 은행에 막대한 돈을 제공했지요. 하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ECB가 이러한 최종대부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고 있답니다. 따라서 ECB는 은행들이 자금난을 겪거나 혹은 심지어 고객들의 지급 요청에 응할 수 없는 경우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습니다.

ECB가 미온적인 대응을 되풀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법적·제도적 이유 외에도 ECB가 이번 재정위기에 많은 이해당사자들이 원하는 대로 전면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있답니다. 바로 ECB의 정치적 역할이랍니다. 금융위기 때 미 연준의 역할에서 나타나듯 일반적으로 위기가 발생하면 중앙은행은 우선 시장의 신뢰 회복을 위해 애씁니다. 위기를 부르는 불량한 경제체질 개선 등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임무는 의회와 정부기관에서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유럽에는 이런 임무를 담당할 정치적 기관이 아직까지 없습니다. 따라서 ECB는 연준과 달리 어려움에 빠진 시장과 정치적 기관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 기관도 없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자칫 잘못하면 유로화 발행을 통한 무제한적인 구제금융 제공의 늪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ECB는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이 자기 나라의 살림살이를 건전하게 만들고, 나아가 유럽통합에 더욱 노력하도록 유도하는 수준의 정치적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ECB는 이번 위기 이후 찾아올 새로운 유럽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을 상대하고 있으며, 따라서 향후에도 시장의 불안을 잠재울 확실한 대책들을 내놓을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