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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그때 그사람

박정희의 ‘전향’은 사랑했던 ‘여자’ 때문에


박정희의 ‘전향’은 사랑했던 ‘여자’ 때문에
사랑했던 여자의 단호함. ‘빨갱이가 싫어서 월남했는데 빨갱이의 마누라라니’
2011년 05월 15일 (일)전영준  news@bluekoreadot.com

[푸른한국닷컴 전영준 발행인]

20011년 5월1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이 주도한 군사 쿠테타가 발생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61년 5월 16일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김종필 등 육사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을 한 날이다.

박정희세력들은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조국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독재, 정치보복, 부정부패,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받고 있다.

박정희의 공과(功過))는 각종 문헌과 언론보도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6.25 전쟁 발발 전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남로당원 명단을 알려줘 전향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좌.우로 나뉜 혼란한 사회 상황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좌파사상에 경도되어 ‘공산주의운동’을 할 때인데 사상적으로 투철하고 목적이 분명한 골수 남노당 간부가 전향했다는 것은 의문점이 생긴다.

박정희가 전향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투철한 민주주의관 내지는 국가관때문에 전향했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많은 동지를 죽음으로 몰고 나 혼자만 살겠다고 왜 전향했을 까.

박정희에겐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인 김호남 여사도 아니었고,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도 아니었으며 스캔들에서 나오는 여자들도 아니었다.

박정희는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이현란과 약혼한 뒤 곧 용산의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하기 시작했다.

조갑제 기자가 지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사간 1998년“을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현란의 러브스토리가 리얼하게 나온다.

당시 부친께서 구입해 읽으신 이 책을 필자도 일독을 했다.

필자는 이 책에서 박정희의 러브스토리를 흥미진지하게 읽었다. 그러면서 그의 여성관, 여성편력 이유를 간접적으로 대할 수 있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의 인터넷 검색 및 갖고 있던 자료를 정리하여 박정희의 러브스토리를 알리고자 한다.

1947년 가을, 춘천에서 육사 6기 박경원 대위가 결혼식이 열렸다. 신랑 측 들러리는 김점곤 대위, 신부 고금옥의 들러리는 그의 친구 이현란이라는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이현란은 미인이었다.

몸매는 날씬하고 얼굴은 이국적으로 생긴데다가 성격이 쾌활했다. 용산에 있는 육군 장교 관사로 박정희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 들러리 아가씨가 박 대위와 같이 살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경원이 하루는 퇴근하여 오니 아내 고금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섰던 친구가 아무래도 박정희 씨와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고금옥은 원산에서 출생하여 루시여고를 나온 뒤 교사 생활을 잠깐하다가 월남했다. 이현란과는 여고 시절 동창 사이였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이효 대위가 친구 박경원 대위한테 털어놓은 사정은 이러했다.

"당신 결혼식 날 우리끼리 한잔 했지. 그 자리에서 박정희가 내게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 형, 나도 쓸쓸하게 지내는데 아까 들러리 섰던 아가씨하고 잘 좀 되도록 도와 주시오' 그래서 내가 소개시켜 주었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그 때 스물 두 살이었던 이현란은 고향에서 단신으로 월남한 뒤 이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화여대에 보존되어 있는 이현란의 성적표를 보면 율동 과목의 점수가 가장 높다.이현란은 화사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현란은 생전(1987년)에 '나는 그 때 이화여대 다닙네 해서 포부가 크고 전성기였어요'라고 말하며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토요일 오후에 이효 대위가 자꾸 나가자고 해서 명동 삼호정에 갔다고 한다.

"윤태일, 이한림, 이주일 등 몇 사람이 미리 와 있었습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말대꾸도 못 하고 구석에 앉아 있는데 미스터 박이 소개되었습니다.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이 없었습니다만 일본 육사를 나와서 그런지 박력과 기품이 있었습니다. 그 뒤 미스터 박은 일요일만 되면 기숙사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때 부모는 북에서 못 나오시고 해서 저는 있는 돈을 다 까먹고 있었습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형편에 침착한 미스터 박이 저에게 잘 해주니 여자로서 끌렸습니다. 좀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주위에서) 양쪽을 다 부추겨서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독일에 간 친구 하나만 참석했어요. 피아노책을 사려고 기숙사에서 나오는데 미스터 박이 '이의없죠?'라고 해요. 저는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 했는데 그걸로 응한 걸로 되었습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박정희는 당시 이현란에게 자신이 이미 장가를 들어서 열 살이 넘은 딸까지 두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즈음부터 본처 김호남과 이혼 하려고 애쓴다.

계속되는 이현란의 회고

그분은 신사였습니다. 내가 나이가 어린데도 '식사하쇼'라면서 존대를 했습니다. 인격 있고 무게 있고 말이 없고.'내가 재미없지요'라고 하기에 '말이 핀 꽃에 열매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은 술은 노상 마셔도 정신은 항상 말짱했어요.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요. 내가 술을 싫어하니까 집에서는 안마셨어요. 술 한 상이라도 우리 집에서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저는 누가 오기만 하면 벽장에 숨어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박정희가 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좌익에 빠져들고 다른 편으로는 이현란이란 미인을 만나 난생 처음으로 연애를 사랑에 빠져 있었다.

1948년 여름 뭉게구름이 모여들더니 폭풍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남노당 숙군 수사 때 체포되고 박정희만 살아난다.

숙군 수사 팀에 구속된 박정희 소령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가지 않았다'는 이현란에게 쪽지를 써 다시한번 사랑을 고백했다. 아마도 그것은 진실일 것이다.

박정희의 집착은 대단했다. 만약 이 때 이현란이란 여인이 없었고 박정희가 달아났다면 그의 생애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잡혀와 처형되었든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든지, 월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사형 선고를 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면 6.25동란이 터지고 정부가 후퇴할 때 다른 좌익수와 함께 '처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애절한 고백은 그러나 '빨갱이가 싫어서 월남했는데 빨갱이의 마누라라니'하면서 배신감을 가누지 못했던 이현란에게는 효과가 크지 않았다.

체포되기 전 어느 날 박정희는 이현란의 손을 잡고 한참 쳐다보더니 '참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냥 의아했는데 일이 닥치고 보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려 한 것임을 알았지만 이현란은 '배신감으로 용서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아내로 맞을 때 암시를 주었어야지. 장가를 가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하니 정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이성의 '이'자도 모르는 여자인데 도저히 이해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한반도를 피바다로 몰고 갈 거대한 폭풍의 구름덩어리가 형성되고 있던 이 때 박정희의 가정생활도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현란과의 싸움은 박정희가 손찌검을 하는 정도로 발전하여 용산의 관사촌에서도 알려지고 과원들도 짐작할 정도였다.

이현란이 멍이 든 얼굴을 하고 다니고 옆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현란은 1950년 2월 6일 밤에 몰래 관사를 나와 박정희와 영원히 헤어진다.

두 사람은 싸움을 한 후인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박정희는 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자는데 이현란은 메모를 써 놓고 몸만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메모의 내용은 '그 동안 고마왔어요.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나를 찾지 마세요. 나를 찾으러 오면 투신자살하겠어요'라는 요지였다.

박정희에게 이현란의 가출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성격이 서로 강해서 자주 부딪치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든지 함께 살아 보려고 노력한 쪽은 박정희였다.

이현란의 박정희에 대한 정은 냉담해져 갔지만 박정희의 그녀에 대한 연정은 그럴수록 더 절박해졌다.

직업과 어머니와 미래까지도 모두 잃었던 박정희가 붙들고 있던 유일한 끈은 이현란이었다. 그녀가 떠난 것이다.

박정희는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이현란이 집을 나가 버리자 박정희는 그녀를 찾아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박정희는, 이현란을 자신에게 소개시켜 주었던 이효 소령의 부인 우씨에게 편지를 한 통 맡겼다.

우씨가 이현란을 찾아내 박정희의 편지를 보였더니 그녀는 웃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이현란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가출한 뒤 한 번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자신에 대해서 '교만하다느니 못됐다느니' 험담한다는 소문이 들려 와 화가 났던 이현란은 박정희에게 '비신사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넓은 관사에 혼자 남게 되었다. 서른세 살에 홀아비가 된 것이다.

박정희가 친구들을 배신하여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의 근처에 가지도 않으려 했다.

박정희도 자격지심에서 사람 접촉을 피했다. 어머니도, 친구도, 연인도 떠난 1950년의 봄은 박정희의 생애에서 최악의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