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 연루 한명숙
- 10-12-09 10:49 | 원종관
<용공조작된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의 한명숙> (등록번호: 72127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소장
박정희 유신체제가 종말을 향해 치닫던 1979년 3월 9일 크리스챤 아카데미(원장 강원룡 목사)의 여성사회 간사 한명숙이 ‘중부경찰서의 김형사’라는 기관원에 연행되었다. 3월 13일에는 농촌사회 간사 이우재·황한식·장상환과 산업사회 간사 김세균·신인령 등이 연이어 연행되면서 모두 집을 수색당하고 서적이 압수되었다. 또한 정창렬, 김병태, 유병묵 등 교수들도 뚜렷한 이유 없이 불법 연행되었다. 이어 아카데미의 농촌사회 교육을 받았던 30여 명의 농민들, 대학강사 이은영, 아카데미의 산업사회 교육을 이수했던 노동조합 간부 등이 대량으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고문수사를 받았고, 이들 중 이우재, 장상환, 황한식, 한명숙, 신인령, 김세균 등 간사 6명과 정창렬 교수 1명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이 사회에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으로서의 기반형성을 위해 아카데미 내의 비밀써클 조직을 결성,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단체를 구성하였다”는 것이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어떤 단체인가. 1956년에 발족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한국사회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건강한 중간집단’의 육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한 사회교육 프로젝트를 한국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요청한다. WCC의 지원을 받아 1974년부터 우선 5개년 계획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 강원룡은 그때 이미 한국 사회구조의 병폐를 양극화로 진단했다. 그들은 주로 노동, 여성, 농민, 학생, 교회단체 회원을 수강생으로 하여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강사로 참여하면서 합숙 세미나와 강의 등 정규교육과 함께 현장 방문 및 교육, 소그룹 운용, 활동평가회로 후속교육을 이어나갔다. 교육의 전과정이 그 자체로 의식화교육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유신정권은 노동자와 농민의 의식화를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그들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정권은 의식화운동을 ‘계급투쟁운동’으로, 의식화교육을 ‘사회주의사상을 주입시키는 교육’으로 몰아갔다.
<중앙정보부가 반공법 위반의 증거물이라고 제시한 물품들>
(등록번호:72127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소장
구속된 사람들에 대한 면회조차 차단된 상태에서 4월 3일 11개 교단 대표들이 아카데미사건조사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대책위원회와 각계 인사들은 성명서, 청원서를 통해 이 사건이 고문과 강압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되었다고 주장했고,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크리스챤 아카데미 활동에 타격을 주려는 당국의 의도에 항의했다. 한 달 이상이 지난 후인 4월 16일 당국이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침투한 용공서클 적발’로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 사건은 이우재를 중심으로 아카데미 간사들이 비밀모임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획책했으며, 그 증거는 본인들의 자백과 증거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증거물이란 것은 책자와 세숫대야 그리고 라디오였다. ‘자백’이란 물론 고문에 의해 강제 진술된 것이었다.
애초에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개신교회는 물론 크리스챤 아카데미와도 전혀 관계없는, 간사들이 별개의 반국가단체를 결성하려 한 사건으로 몰아가려 했었다. 이에 대해 대책위원회는 4월 20일자 성명을 통하여 이 사건의 본질을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교육사업에 심한 타격을 주고 노동자 농민운동에 대한 탄압과 위축을 가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간파했다. 말하자면 의식화운동에 대한 계획적인 탄압이었던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4월 16일 발표한 성명은 “당국은 점증하는 민중의 각성을 봉쇄할 목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민생운동을 억압할 명분으로서 새로운 사건을 조작할는지도 모른다”며 정권의 의도를 간파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기증한 변호인 심문 내용노트>
(등록번호: 9823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소장
첫 공판은 기소된 지 2개월, 한명숙 간사가 연행된 지 만 4개월 만인 7월 9일에야 열렸다. 당시 그들의 변호를 맡은 이들은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이돈명, 조준희, 황인철, 홍성우였다.
아래는 메모 형태로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변호인 반대심문기록 일부의 내용이다.
변호사 : 연행된 후 처음 무슨 조사를 받았나?
한명숙 : 우리 아카데미 농촌여성 교육에서 부른 노래의 경위와 출처를 조사받았다. 그 출처가 “북괴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아카데미 교육내용과 아카데미 조직표를 다 대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수사관이 열명도 더 들락날락하며 추궁하고 겁주고 해서 겁에 완전히 질렸었다. 그리고 강원룡 원장의 사상성분, 사생활을 대라고 했다. 공산당이 배후라는 걸 대라고 했으며, 또 “너무 겁내지 마라. 너는 협조만 하면 괜찮다. 네가 목표가 아니다”라고 높은 분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미 아카데미 전체 직원의 생활 등이 제록스 되어 있었다. 1960년대부터 강목사님의 행적이 적힌 것을 다 보여줬다. 그리고 책자가 제시되면서 누구에게 받았냐고 추궁하면서 맞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따귀는 맞았고..
변호사 : 책 이야기 나오면서 맞았나?
한명숙 : (울먹이며 말을 잊지 못함) (그 전후가) 불분명하다.
변호사: 구치소에서 접견할 때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악몽같다며 이야기를 못하곤 했는데 지금 그것을 굳이 묻는 이유는 검찰 이야기와 법정에서의 이야기가 달라서 묻는 것이니 왜 그렇게 됐는지, 어떻게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달라.
한명숙 : 그 기억을 다시 살리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거기서 “공산당이면 죽인다. 너 공산당이지? 네 남편과 어떻게 접선했지? 네 남편과 암호가 든 편지했지? (매를 때리며) 이북에서 누가 내려 왔나? (계속 울면서 답변) 무슨 조직이 있느냐? 답변해라” 따귀를 맞고 구둣발로 짓밟히며 커다란 야전 각목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았는데,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중에 일어나보니 뼈마디 마디는 부어있고, 온몸에 피가 맺히고 멍이 들어 걷지를 못했다. 나중에 지하실로 옮길 때 수사관이 부축해 옮겼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다하겠다”며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빌었다.(울음)
변호사 : 그만 이야기해도 좋다. 본인만 맞았나?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듣거나 보거나 한 적 있나?
한명숙 : 나중에 수사관이 와서 “너는 여자니까 그 정도다. 다른 사람은 다 벗겨놓고 죽었다 살았을 정도로 맞았다”고 했다. 나는 그때 한계상황이었다. 지하실로 옮겨졌을 때 “우리는 간첩만 잡는 사람이다”고 소개하는 수사관에게 넘겨진 후에는 나는 맞지 않고 거기서 상처를 치료했다. 제 방 옆에는 황한식 씨가 있었고 화장실 쪽으로는 이우재 선생이 있었는데 고함소리, 비명소리,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자체가 큰 고문이었다.
변호사 : 그 안에서 충분히 자면서 충분히 정신차리며 답변할 수 있는 분위기였나?
한명숙 : 잠은 거의 못 잤고 정신이 획획 돌았다. (중략)
변호사 : 정식구속은 언제였나?
한명숙 : 4월 3일 구치소로 옮겨졌다.
변호사 : 3월 9일 정보부에 들어가서 계속 그렇게 당했고, 심문을 당했고, 거기서 한 발짝도 못나왔고, 그리고 구치소로 넘어가서 검찰에 송치된 것은 언제 알았나?
한명숙 : 구치소에서 고통이 컸다. 정신적으로 한계상황이었다. 수사과정에서 “이우재가 간첩이었고, 통혁당에 관련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간첩혐의를 벗을까만 생각했고, 수사관에게 “무기(징역)를 받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구치소에 온 뒤에도 강 원장님과 배신의 관계가 성립됐다. 수사관이, 강 원장이 중정에 다녀갔는데, “배신 당했다. 미친 놈들이다”고 화를 냈다고 말하며, “너희는 미련 갖지 마라”고 말할 때 그것이 제일 괴로웠다. 참을 수 없었다. (울음) 몸은 계속 아팠고 방안에서도 일어서면 쓰러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관련자 전원석방을 요구하는 서한> (등록번호: 9824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소장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들이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가한 고문은 다양했다. 무릎에 각목을 끼우고 밟는 고문,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 잠 안재우는 고문, 바늘로 찌르는 고문, 발가벗기고 거꾸로 매다는 고문, 담뱃불로 지지는 고문에다 눈을 감기고 권총을 들이대며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죽이겠다느니, 여자의 옷을 벗기겠다는 등의 정신적 고문을 통해 그들의 몸은 물론 영혼도, 그리고 한명숙도 일부 밝힌 것처럼 인간관계까지도 철저히 파괴했다.
9월 22일 제1심 판결에서 이우재가 징역 및 자격정지 각 7년, 한명숙 각 4년, 장상환․ 신인령이 각 3년 8월, 김세균 각 2년, 정창렬 각 1년 6월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1980년 1월 항소심에서는 ‘용공서클’에 대한 혐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혐의는 벗겨졌음에도 이우재 징역 및 자격정지 각 5년, 한명숙 각 2년 6월로 확정되었다.
평생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에 헌신해 왔으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까지 지낸 온화함과 도덕성의 상징 한명숙 전 총리가 전국이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세밑에 검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선 극단의 두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야권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 중 한명인 전직총리를 흠집내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개혁진영의 발목을 잡으려는 정권차원의 야비한 정치공작’이란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5만 불 뇌물수수 의혹을 밝히려는 순수한 진실규명 차원’이란 주장이다. 법정에서 최종결과가 어떻게 나든, 그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지금 그는 어쩌면 30년 전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조작사건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희망세상> 사료이야기,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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