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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그때 그사람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가 털어놓은 ‘대통령의 사생활’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가 털어놓은 ‘대통령의 사생활’

“궁정동 안가 불려간 여성 200명 넘었다”

 

 

 

 

 

 

 

 

 

 

 

박근혜, 최태민의 자리바꿈

그는 김재규가 우발범이거나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 회복에 나선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김재규는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 외에도 박근혜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박근혜가 지방 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딸이라도 그렇지, 국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국민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제게 되묻기도 했어요. 촌로들이 그렇게 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걸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부추겼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불미스러운 사생활과 자식들에 대한 맹목적 보호가 도를 넘었다’고 했어요. 그런 것들이 국정운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여자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 어쩌나’ 하고 늘 고민했다고 합디다.

당시 김재규는 육사 생도이던 박지만의 행동거지에도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딱 한 가지 사실을 왜곡한 게 있어요. 김재규가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를 제 책에 옮기면서 한 단어를 고쳤거든요. 김재규는 지만군 문제를 지적하면서 ‘육사 2학년 때부터 서울 시내에 외출해 여의도 등지에서 사관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OO’을 하고 다녔다’고 썼어요. 김재규는 ‘OO’이라고 했는데, 이걸 제 책에선 ‘행동’이라고 옮겨 적었어요. 이제 지만씨도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OO이라는 단어는 뺐어요. 제가 그렇게 고쳐도 하늘에 있는 김재규가 ‘잘했다’고 할 것 같아, 고민고민하다 마지막에 고친 겁니다.

“지만군을 유학 보내십시오”

-김재규가 지만군의 행실에 대해서도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나요.

“그렇다고 합디다. 김재규는 ‘육사의 명예나 지만군의 장래를 위해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거나 외국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박정희에게 간곡히 건의했대요. 그런데 박정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통령에게 자식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물론이죠. 김재규는 ‘각하 아들과 딸의 행동이 이렇습니다. 국사에 도움이 안 되니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보고했다고 했어요. 대통령에게 욕을 먹더라도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 직언을 했다는 겁니다. 지만 군의 불량한 행동에 대해서는 구두로 보고했고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일은 서면으로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후에 자식들 문제를 몇 번 언급했는데 박정희가 막무가내로 감싸고돌자 ‘더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 없겠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해요.

-김재규에게서 둘째딸 근령(최근 ‘서영’에서 ‘근령’으로 개명)씨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둘째딸 이야기는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책에 박정희의 사생활과 자녀 이야기를 언급했잖아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썩 달갑지 않게 여길 것 같은데요.

“박근혜 대표가 트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왜죠?

“숨기지 않고 깨놨잖아요. 박 대표는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해요. 박정희의 장점은 취하되 단점은 과감히 버려야지요. 그래야 나라가 발전하죠. 오히려 (박 대표가) 저에게 아주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가 털어놓은 ‘대통령의 사생활’

“궁정동 안가 불려간 여성 200명 넘었다”

 

 

 

 

 

 

10·26사건 현장검증. 김재규의 저격에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이 왼쪽으로 쓰러졌다. 김재규 왼쪽은 김계원 비서실장.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12/14/200512140500039/image/200512140500039_2.jpg

 

-다른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좋지 않은 사생활인데….

“사생활이라 해도 개인이 아닌 대통령의 사생활이잖아요. YS가 다 없애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시절 궁정동에는 대통령 안가가 있었고, 그날 밤 두 명의 여자를 불러들여 벌인 술자리에서 대통령이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게 우리 역사예요. (박근혜 대표는) 오히려 자신이 까발리지 못하는 것을 제가 대신 해준 셈이니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지금 ‘유신’이 좋았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10·26 직전까지만 해도 다들 유신을 치켜세웠어요. 박정희가 죽기 전날까지 유신체제가 좋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박정희가 죽고 나자 제 일성으로 한 얘기가 ‘민주절차 밟고 개헌하겠다. 긴급조치 해제하겠다’였어요. 이게 뭘 뜻하는 겁니까. 유신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끽소리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제가 책을 펴낸 취지는 박 대통령의 나쁜 점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에요. 사실 그대로,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고치자는 뜻일 뿐이에요.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박정희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고 법정에서 여러 차례 진술한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의 특별한 만찬은 절대군주나 봉건영주 시대가 아닌 20세기말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개탄했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현대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당시 김재규도 요정 마담을 첩으로 뒀다는 소문이 떠돌지 않았습니까.

“김재규에게 그 얘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사실이라 해도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에 비밀 안가를 만들어놓고 질펀하게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김재규가 법정에서와는 달리 변호인 접견을 통해 살고 싶은 욕구를 내비친 적은 없나요.

“아뇨. 없었어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어요. ‘유신 기간에 우리 사회에 쌓인 많은 쓰레기를 청소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도와주는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라고 고백했어요. 당시 김재규는 사형당하지 않았더라도 얼마 못 살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안 변호사는 “책을 펴내 26년 동안 미뤄둔 숙제를 해치운 기분이 든다”며 홀가분해했다.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쐈다”고 말한 김재규는 변호인 접견에서 살해 동기에 대해 “독재와 야당 탄압, 부산과 마산의 시민항쟁,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그에 따른 판단력 마비가 또 다른 이유였다”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

10·26 이후 해마다 524일이 되면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공원묘지 맨 윗자락에 자리잡은 김재규 묘역을 찾는다는 안 변호사. 그는 올해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김재규의 묘역을 찾았다.

“제가 변론한 사람이 사형을 당했는데, 그것도 우발범이 아니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그랬다는데….

김재규의 무덤 앞에서 그는 “두 사람이 나누는 무언의 대화는 밝힐 수 없다. 10·26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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