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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가치주는 '수난시대'… 코스피 상승률에도 못 미쳐

"수익률 부진해 죄송합니다" 투자자들에 사과문 보내기도… "하반기쯤 재평가 이뤄질것"

"한마디로 수난(受難) 시대입니다."

주가 2200시대가 열렸지만, 요즘 가치주 펀드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 자동차·화학 등 일부 대형 수출주를 중심으로 증시가 급상승하고 이들 주식에 집중 투자하는 압축형 펀드가 고수익을 내면서 대부분의 가치주 펀드 성적이 중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일부 가치주 펀드는 투자자에 '반성문'까지 보내고 있다.

대표적인 가치투자 전문가로 손꼽히는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본부장은 최근 투자자들에게 "수익률이 부진해 죄송하다"며 사과문 형식의 편지를 보냈다. 허 본부장은 "주가 상승 흐름을 놓칠지 몰라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돈을 빼내서 주가가 상대적으로 비싼 일부 종목에 몰려가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우량한 저평가 가치주들이 더욱 소외되어 버리는 극단적인 쏠림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코스피 지수 상승률도 못 따라간 수익률

가치주 펀드란, 기업의 수익성이나 자산 가치에 비해 주가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 종목에 주로 투자하는 펀드를 말한다. 값이 싸다고 생각되는 종목을 매수한 뒤, 본래 가치 수준에 근접하면 팔아서 수익을 챙기는 방식으로 투자한다. 남들이 아직 몰라보는 '흙속의 진주'에 주로 투자하다 보니, 가치주 펀드는 대형주보다는 중·소형주를 주로 바구니에 담는다.

그러나 최근 가치주 펀드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펀드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가치주 펀드의 연초 이후 수익률은 27일 기준으로 1.71%에 불과하다. 특별하게 어떤 종목에 투자할까 고민하지 않고 코스피지수만 그대로 따라가는 인덱스펀드 수익률(7.68%)에도 훨씬 못 미친다.

유명한 개별 가치주 펀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내 대표적 가치주 펀드로 꼽히는 '신영마라톤(A)'과 '한국밸류10년(1)'의 연초 이후 수익률은 각각 5.78%, 4.07%로, 코스피지수 상승률(7.6%)을 밑돈다. 주가가 사상 처음으로 2200을 돌파하는 등 국내 증시가 들끓고 있는 동안, 가치주 펀드 수익률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 셈이다.

이러다 보니 투자자들도 다른 펀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적이 부진한 가치주 펀드를 외면하고 있다. 한국밸류10년펀드는 올 들어서만 1100억원 넘는 자금이 빠져나갔고, 신영마라톤과 신한BNPP탑스밸류펀드도 설정액이 각각 710억, 510억원 줄었다.

"지나치게 저평가" 지적도

국내 주식시장이 사상 유례없는 2200시대를 맞이했는데도 가치주 펀드가 고전(苦戰)하는 것은 왜일까. 전문가들은 일부 대형 성장주만 집중적으로 값이 오르는 반면, 저평가된 중·소형주는 시장에서 소외를 당하는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어서라고 얘기한다. 특히 최근 증시 수급의 주도권을 쥔 외국인이 대형주를 주로 사들였다. 가치주펀드들이 투자하는 저평가 주식들은 중·소형주가 많기 때문에 대형주 위주로 운용되는 일반 주식형펀드에 비해 수익률이 저조하다는 것이다. 이채원 한국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은 "가치주로 불릴 만한 기업들의 시장가치가 장부(帳簿) 가격 수준이거나 장부 가격을 밑돌고 있다"며 "가치주 저평가가 가치주 펀드 수익률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런 분위기는 언제쯤 반전될까? 이 부사장은 "요즘 같은 때엔 '성장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기업들의 실적이 계속 성장한다는 기대감이 주가를 크게 밀어올려 거품을 만들고 있지만, 성장이 둔화하는 조짐이 나타나면 분위기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주 펀드는 강세장에선 가격이 급등하는 '거품주'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 수익률이 저조할 수 있지만, 반대로 시장이 조정을 받을 경우엔 '거품주'가 없어서 수익률이 다치지 않아 선방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는 "고유가, 물가상승, 환율 등 여러 변수를 감안한다면 비정상적인 주식시장도 제자리를 찾고 하반기쯤엔 가치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가치주 펀드의 수익률 회복이 한동안은 힘들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김태훈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대형 성장형 종목들이 증시를 주도하는 양극화된 시장에서 당분간 가치주 펀드가 부활하긴 쉽지 않다"며 "지금까지 주가가 안 올랐으니 앞으로 오를 것이란 막연한 생각으로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