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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범죄자가 재판받으러 오고 싶어 하는 나라

 

입력 2024.03.25. 03:12
 
 
 
 
 
 
 
권도형 전 테라폼랩스 대표가 23일 출소후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의 한 법원에서 특별경찰에 의해 외국인 수용소로 이송되고 있다./AFP 연합뉴스
 
 

450억달러(약 59조원)의 피해를 일으킨 가상 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주범 권도형 전 테라폼랩스 대표에 대해 그가 도피한 몬테네그로 고등법원이 한국 송환을 결정했는데 막판 변수가 발생했다. 현지 대검찰청이 재검토를 요청하면서 몬테네그로 대법원이 권씨의 한국 송환을 잠정 보류하고 법리 검토에 착수했다. 23일 출소 후 곧바로 한국으로 송환될 예정이던 권씨는 일단 외국인 수용소로 이송됐다. 조만간 한국 혹은 미국 중 어디로 송환될지 다시 정해질 전망이다. 그동안 이 사건의 관할권을 가진 한국과 미국의 사법 당국이 서로 권씨의 자국 송환을 요구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권씨가 한국행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씨의 경우, 국내에서 가상 자산의 증권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어 금융 범죄로 처벌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죄가 날 가능성조차 거론된다. 반면 미국은 각 죄에 따른 형량을 합산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하기 때문에 대형 경제 사범에 대해 수백 년 형도 내려진다. 폰지 사기범 버니 메이도프는 150년형을 선고받았다. 권씨는 미국에서 금융 사기 등 8개 혐의로 기소돼있어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 100년 이상의 형도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경제 사범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기 일쑤다. 지금까지 경제 사범에게 내려진 최대 형량은 김재현 옵티머스자산운용 대표에게 확정된 징역 40년이다. 많은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고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전세 사기의 경우에도 191명에게 148억원 규모 피해를 입히고 4명을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몰고간 ‘인천 건축왕’이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게 최고형이다. 또 다른 전세 사기에서도 무려 355명에게서 보증금 795억원을 편취했는데 주범은 1심에서 고작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국가 핵심 기술을 빼돌려도 형량이 무겁지 않다.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전체의 87.8%였다. 2022년 선고된 영업 비밀 해외 유출 범죄 형량은 평균 14.9개월에 불과하다. 퇴사한 직원이 핵심 기술을 경쟁 업체로 유출하는 것을 막으려고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도 법원에서 인용 결정이 나오는 데 1년 가까이 걸린다. 경제 범죄에 대한 처벌이 이 지경이니 사기꾼이 들끓고 권씨처럼 천문학적 피해를 입힌 범죄자가 한국서 재판받겠다고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