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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직업

처우는 박하고 책임만 커진다...빅5 병원 교수들도 떠난다

 

대학병원 의사들 줄줄이 동네병원行
“교수 때려치우고 싶다” 기고문 올려
국립대병원 의사, 정원보다 1940명 부족
대학병원 의사 연봉, 개원의 절반 수준

입력 2023.11.26
 
 
 
 
 
 
정부가 인력 부족 등으로 위협 받는 소아, 분만, 중증·응급 등 필수의료 지원을 확충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대학병원 의료진 이탈은 심해지는 모습이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서울대어린이병원 모습./뉴스1
 
 

올해 7월 서울 ‘빅5′ 대학병원 중 한 곳에서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5명이 집단 사직해 논란이 됐다. 이 병원은 마취과 교수 4명을 곧 채용했지만, 하반기에도 전임의 교수 2명이 사표를 더 던지면서 추가 공모에 나섰다. 빅5는 국내에서 최고 급여와 대우를 받는 곳인데, 여기서도 교수들이 이탈한 것에 의료계는 충격을 받았다.

 

인천시의료원은 마취과 의사가 부족해 주말에는 응급수술을 하지 못한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외과 전문의는 어떻게 구했는데, 이제는 마취할 사람이 없다”는 자조가 대학병원에서 나온다.

 

대학병원 교수 이탈은 마취통증의학과 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대병원은 지난 2년 동안 소아청소년과 전임의와 임상교수 의사 6명이 사표를 냈고,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올 상반기 소화기내과 교수 2명이 사표를 냈다. 서울대병원에서 사표를 낸 교수들은 30~40대 젊은 교수들이다.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에서 올 들어 교수를 그만 둔 사람이 11명이었다. 전공은 다양했다. 인기과로 분류되는 피부과에서도 이탈이 감지된다. 충남대병원 김현정 피부과 교수는 얼마 전 “교수 때려치우고 싶다”는 기고문을 올렸다.

 

 

◇ 국립대병원 의사 정원 대비 1940명 부족

대학병원의 의사 부족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2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으로부터 제출받은 ‘공공의료기관별 정원 대비 현원’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 소관 17개 국립대 병원의 의사 숫자는 7002명으로, 정원인 8942명과 비교해 1940명이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공의가 부족해 대학병원이 위기라고 하지만, 정작 이들을 교육할 숙련된 의사들이 대학에서 나가고 있단 뜻이다.

 

 

과목 불문, 지역 불문, 나이 불문 의사들이 대학을 벗어나려는 것은 비용 대비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대학병원 교수가 되려면, 6년 가량 의대에서 공부한 후 5년가량 수련의, 전공의 과정을 마쳐야 한다.
 

대학병원 교수라고 하면 몇 년 전만 해도 생명을 살리는 보람과 자부심에 환자와 의사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회적 지위가 있었다. 개원의와 비교하면 박봉이지만, 병원 운영비와 연구비 특진비 등을 추가하면 보상도 넉넉했다. 올해 서울아산병원에서 당일 근무하는 신경외과 의사가 없어서 간호사가 뇌출혈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이 병원 신경외과에는 의사 5명이 상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생명을 살리는 보람보다 의료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졌고, 업무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다. 이대목동병원 미숙아 사망 사건으로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구속되고,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료사고에 법원이 위로금 3억 5000만원 지급 판결을 내면서 불안감이 조성됐다.

 

응급의학과를 나와서 개원한 의사는 “과거에는 심정지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오면, 강심제를 퍼부어서라도 심장을 뛰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심정지가 5분이 넘는다면 뇌손상이 심해서 대부분 목숨을 잃는다”며 “요즘에 심정지 환자를 살렸다가 뇌손상이 오면 의료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고 말했다. 목숨이 달린 고위험 수술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업무 강도는 더 세졌다. 의대 교수들은 대부분 병원 진료를 하면서 의대생을 가르친다. 밀려드는 환자 진료와 수술, 의대 강의와 수련에다 연구 성과까지 꼬박꼬박 내야 한다. 정부가 대학병원의 전공의 숫자를 줄이면서 교수가 온콜(응급 대기)은 물론 야간 당직까지 선다.

 

이는 내과·외과·흉부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등 필수과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김현정 충남대병원 피부과 교수는 “응급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학교에서 중간 평가, 기말 평가, 멘토링 연구수업, 정규수업, 개인상담, 연구비 수주, 논문 제출을 비롯해 전공의 정원을 받으려면 학회 활동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통계연보'

 

 

◇ 개원의 수입 늘면서 동네병원 5년새 급팽창

개원의와 수입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의사 연봉은 1억6000만~1억8000만원, 동네 병·의원 의사 연봉은 평균 3억4000만원 정도다. 대학병원에서는 ‘개원해서 열심히 하면 3년 안에 강남에 빌딩을 세우고, 대충하면 5년 걸린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요즘에는 개원을 하지 않고 ‘프리랜서(페이닥터)’를 뛰는 사례가 인기다.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의 경우, 서울 강남의 성형외과 몇 군데를 돌면서 마취를 하기만 해도 한 달에 5000만원은 거뜬히 벌 수 있다. 성형수술 마취 1건에 200만원의 수당을 받는데, 오전 오후 병원을 달리 해서 1건씩 일주일에 3일을 일하면 월 48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한 마취과 의사는 “한 병원에서 2건을 하면 300만원이라서, 웬만하면 병원을 바꾼다”고 말했다.

 

개원의는 계속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의 전문의 9만3457명 가운데 동네병원(의원) 소속은 4만4754명으로 지난 2017년 3만 8640명에서 6000명(15.8%)이 넘게 늘었다. 동네 의원 숫자도 팽창하고 있다. 전국의 동네 의원 숫자는 2017년 말 3만 1718곳에서 지난해 말 3만 4958곳으로 10.2% 늘었고, 서울은 같은 기간 8372명에서 9469명으로 13%가 늘었다.

 

전문의를 따고도 자신의 전문과목을 포기한 채 돈이 되는 미용·성형 일반의로 개원하거나 진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전문과목을 표시하지 않고 개원한 전문의가 2017년 5781명에서 6277명으로 8.6%가 늘었다.

 

사정이 이러니 정부 안에서도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 만으로는 필수의료 붕괴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강중구 심평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필수의료가 무너진 것은 복합적인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사수를 늘리는 것 외에도 추진해야 할 여러 과제들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