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4.22 1
중앙일보 이하경 주필이 22일자 ‘문재인 정부발 한·일 관계 파탄의 공포’란 제목의 칼럼에서 일본 대사를 지낸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말을 인용했다. 칼럼에 따르면 유 전 장관은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 때 IMF 행이라는 굴욕을 겪게 한 결정타가 일본의 단기외채 회수였다고 보고, “한국을 가장 잘 지켜 주는 게 일본이라고 생각해 왔던 뉴욕·런던·홍콩의 금융시장은 큰일이 난 걸로 보고 앞다퉈 한국에서 돈을 뺐다”고 말했다.
칼럼은 2년 전인 1995년 11월 14일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을 화근으로 짚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난징대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장쩌민은 “어렸을 때 내가 직접 봤는데도 일본은 그런 일 없었다고 잡아뗀다”고 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대통령 외교비서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유 전 장관은 “이 발언이 IMF행을 불렀다”고 했다.
칼럼 서두에 소개한 유명환 전 장관의 인식이 옳다고 본다. 그러면 실증적으로 1997년 IMF 직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짚어보자.
한국 경제가 금융위기로 치닫던 1997년 11월말, 한국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간 자금은 일본 엔화 차관이었다. 일본 은행들은 부실 여신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고, ‘한국에서마저 떼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일본 은행들은 결코 이웃 사촌이 아니었다. 일본 은행들은 다른 나라보다 옆집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계 은행보다 한국을 더 죄어들어 왔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 S&P의 국가신인도 담당인 존 체임버스는 1997년 9월에서 11월까지 3개월 동안 한국을 빠져나간 일본 자금이 9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Barrons, 1998년 1월 26일 ‘Costly Lessons’ 참조) 후에 국회 청문회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그해말 일본 은행들이 한국에서 뺀 돈이 120억 달러에 달했다.
물론 한국의 은행들이 단기 외채를 많이 들여온 것은 잘못이다. 경제는 호황이고 비싼 금리의 장기외채보다는 단기차입금의 금리가 쌌기 때문에 좋은 조건의 돈을 빌렸던 것이다. 하지만 단기 외채의 단점은 한꺼번에 은행들이 만기 연장(rollover)을 해주지 않으면 흑자 부도가 날수 있다. 일본 은행들이 그렇게 한 것은 맞다.
당시 경제 상황을 짚어보는 것도 중요하다.
1990년대 후반에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반도체산업 증설 경쟁이 치열했다. 한국이 반도체가 세계 선두에 서자, 태국과 싱가포르가 실리콘웨이퍼 공장을 증설했고, 말레이시아도 반도체 공장을 지어댔다. 1996년에 D-RAM 반도체 가격이 82%나 폭락했음에도 불구, 대만은 10억 달러 규모의 실리콘 웨이퍼 공장 건설계획을 밀어붙였고, 말레이시아도 정글을 불도저로 밀어 반도체 단지를 조성했다. 그러나 세계 산업 수요가 아시아의 반도체 설비 경쟁을 소화해 내지 못했다. 타이완과 싱가포르 반도체 회사, 한국에서는 아남산업등 약한 고리에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수출 상황도 악회되었다. 무역수지 적자폭은 1995년 100억 달러를 넘었고, 1996년에 206억 달러로 두배 이상 늘어났다. 외환 위기 직전인 1997년 9월까지 무역적자 누계는 103억 달러에 이르렀다.
1997년 10월말 미국 유수 투자회사인 골드만 삭스의 시장 분석가가 한국의 외환보유액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월가 은행들에게 돌렸다. 보고서는 한국의 외환 보유액이 부족하기 때문에 태국처럼 IMF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크며, 원화 환율이 3개월 내에 1달러당 1,150원, 12개월 내에 1,250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 리포트가 나오자 미국과 일본, 유럽등 외국 은행들은 월가 투자회사의 분석과 미국 언론보도를 근거로 한국 시장을 불안하게 바라보았고, 더 이상 손해를 보기 전에 돈을 빼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에서의 달러 엑소더스가 벌어진 것이다. 그후 원화는 월가의 분석보다 더 큰 폭으로 하락했다.
10월 27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국제 외환 투기자들이 홍콩 달러를 공략하자, 홍콩 당국은 단기 금리를 무려 300%까지 인상했고, 항셍(恒生) 주가는 이미 몇주째 곤두박질졌다.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 지수도 최대 낙폭인 554.26 포인트(7.2%) 폭락했다. 10년전인 87년 10월 19일 508 포인트 폭락했던 ‘블랙먼데이’(Black Monday)가 10년만에 재현된 것이다.
당시 뉴욕 월가에는 “홍콩 다음이 한국”이라는 루머가 횡행했다. 외국계 은행들은 한국 시중은행과 기업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일제히 회수하려고 덤벼들었다. 대출기간 3일 미만의 오버나이트 대출마저 끊어버렸다. 1997년 10월 블랙먼데이 이후 열흘동안 외국 은행들은 한국에 대출한 단기 자금 수백억 달러를 회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아마 세계 역사에서 며칠 사이에 이렇게 많은 자금이 빠져나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한 나라를 죽이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단기 자금은 하루짜리에서 만기 1년까지의 대출금을 말한다. 한국 금융기관과 대기업들은 짧은 만기로 돈을 빌려 계속 만기를 연장함으로써 장기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한꺼번에 자금을 회수하면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일본 은행들이 앞장 서서 돈을 빼내가자 미국과 유럽계 은행들이 빌려준 돈을 떼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한국에서 대탈주를 단행했다. 천둥소리에 놀란 양떼들이 좁은 계곡을 서로 밀치며 도망치듯 외국은행들은 한국을 빠져나갔다.
한국 경제규모는 앞서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경제력을 합친 규모이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었다. 동남아 경제는 핫머니의 공격에 의해 무너졌지만, 한국 경제는 선진국 은행들의 갑작스럽고, 일시적인 대탈주에 의해 붕괴됐다.
태국 바트화,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필리핀 페소화 폭락에 미국의 헤지펀드들이 공략한 것은 입증된다. 홍콩 달러도 수차례 헤지펀드의 공격 목표였다. 그러나 한국 원화 폭락 과정에서 미국의 헤지펀드나 외환 투기자들이 선제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원화 폭락의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 은행들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외부채중 절반이 일본에서 빌려온 돈이었다. 외화자금 중 한국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간 것은 일본 차관이었다. 일본 은행들은 부실 여신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고, 한국에서마저 여신이 떼일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 은행들은 다른 선진국 은행들보다 옆집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계 은행보다 한국을 더 옥죄어 왔다.
당시 미국계 헤지펀드들이 한국 증시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일본계 자금이 빠져나가자 함께 이탈했고, 증시 폭락에 일조를 했다. 그러나 증시 폭락이 통화 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지 않았다.
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금융연구소(IIF: Institute of International Finance)가 선진국 은행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니, 1997년 7월부터 그해 12월말까지 아시아를 빠져나간 자금은 1,000억 달러나 됐고, 한국을 빠져나간 자금은 이의 절반인 500억 달러나 됐다. 당시 국제금융계의 분석에 따르면, 그해 10월말에서 11월초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한해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 유럽은행들에겐 한국과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기대와 약속의 땅이었다. 한국에 돈을 빌려주지 않은 은행은 은행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랬던 그들이 패닉 현상을 보이며 탈출했다.
글로벌 은행들 중에서 일본계 은행들이 지리적 여건으로 아시아에 가장 많은 대출을 해주었다. 아시아 국가의 총 해외차관 중에서 일본에서 빌려온 돈은 1997년 6월 현재 전체의 32%나 됐고, 독일 12%, 프랑스 10%, 영국과 미국 8%였다.
국제은행들은 아시아에 대출을 해주면서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자본을 줬다. 장기로 빌려주기보다는 언젠가 빠져 나오겠다는 심사였다. 아시아 국가들은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만기를 계속 연장하면 장기 자본이나 다름없으니 별 걱정없이 국제은행들로부터 단기자금을 빌려 썼다. 이게 화근이었다. 국제 은행들이 그 자금을 장기로 빌려 주었더라면 아시아는 서서히 침체하는 과정은 있었을지언정, 급격히 붕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더욱 한국은 그러했다.
그러면 과연 한국 경제가 정말로 위태했던가.
한국의 GDP 대비 순외채 비율은 호주보다 낮았다. 1인당 외채부담율은 세계 최대 채무국인 미국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영국의 신용평가기관인 피치 IBCA에 따르면 1996년말 기준으로 한국의 대외부채는 1,230억 달러로 연간 외환 거래량의 77%에 이른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800억 달러로 연간 외환 거래량에 대한 비율이 221%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캐나다는 4,210억 달러로 177%에 이른다.
1996년 기준으로 한국이 원금과 이자를 합쳐 1년간 외국 은행에 지불해야 할 돈은 전체 외환 거래액의 6%로, 캐나다 16.7%, 오스트레일리아 12%에 비해 낮았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의 대외 채무 비율이 선진국들에 비해 높지 않음을 입증한다.
다른 통계를 보더라도 한국의 대외채무비율은 건전한 편이었다. 1997년초 수출대비 대외채무 비율은 72%로 한국과 같은 신용등급에 있었던 브라질의 293%에 비하면 대단히 건실했다.
한국은 인플레이션을 잘 관리해왔고, 정부 예산도 균형을 이루어온 나라였다. 엔화 하락으로 경상수지 적자가 커지고 있었지만, 외채를 갚지 못할 나라는 아니었다. 강경식 부총리가 입버릇처럼 말했듯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은 건강했고, 여름 이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이견을 다는 외국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어쨌든 당시 정부와 대기업, 금융기관이 단기외채를 많이 끌어온 것은 실책이었다. 그렇지만 그 실책을 한번도 경고하지 않고 돈을 대주다가 하루아침에 몰려나가는 국제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 자금 시장에서 채권자가 늘 왕이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순식간에 채무자를 지급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채권자의 잘못이다. 선진국 채권은행들은 뒤늦게 한국의 잘못을 집중 공격하며 좁은 탈출구를 향해 벌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대통령이 극도로 싫어하던 정적 박태준씨를 일본에 보내 단기외채를 롤오버(만기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은 거절하고, IMF로 가라고 했다.
당시 데이비드 헤일이라는 취리히 보험의 애널리스트는 “미국이 아마 한국 지원 패키지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며, “그 이유는 한국이 일본 정부가 중심역할을 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6년간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경제적 지배를 싫어한다. 물론 미국의 지배도 싫어할 것이지만, 벼랑 끝에 설 때에는 미국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미국인들은 간파하고 있었다.
일본 자금이 빠져나간후 한국 경제는 급속히 무너졌고, 마침내 미국이 주도하는 IMF에 구조를 요청했다.
▲11월 16일 미셸 캉드시 IMF 총재와 허버트 나이스 아시아 태평양 담당국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11월 17일 원화 환율이 1달러당 1,008.6원으로 1,000원의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한국은행은 더 이상 원화 방어를 않겠다고 발표했다.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는 금융개혁법안 유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임창렬 부총리가 들어섰다.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마침내 IMF에 손을 내밀었다.
▲12월 3일 IMF와 한국 정부는 협약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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