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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년퇴임한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 “자본주의 맹아론은 대한민국 부정으로 이어지는 주장”

 

⊙ 서울대 시절 김근태 아래서 김문수 등과 학생운동, 고문서 통해 조선 후기 경제의 실태 보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 “15~16세기 인구의 30~40%가 노비, 조선은 고대 로마나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보다 심한
    노예제 사회”
⊙ “고종이 개명군주라는 주장은 사료 분석 없이, 사회적 명예를 낚기 위한 학문적 사기에 불과”

  이영훈(李榮薰·66)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2월 말 정년퇴임했다. 그는 지방에 전래되어 오던 각종 고문서들을 분석, 종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경제사 인식을 뒤집는 연구 결과를 많이 내놓은 경제사학자이다. 좌편향 교과서의 문제점을 바로잡은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편찬을 주도했고, 대한민국의 성취를 긍정하는 《대한민국사》를 저술했다. 이승만학당, 정규재TV 등에서의 강연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작년 12월에는 평생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한국경제사》(1,2)를 펴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경제연구소로 이영훈 교수를 찾아갔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 경제사학자들이 1987년 설립한 연구소. 세간에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집단으로 알려져 있는 이 연구소 초창기부터 참여했던 이 교수는 현재 이 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있다.
 
  이영훈 교수의 연구실 책상에는 수십 권의 책자가 놓여 있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명례궁(明禮宮)의 지출기록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명례궁이 뭐 하는 곳입니까.
 
  “궁중의 식료(食料)를 공급하던 궁방(宮房)으로 왕비가 관할했어요. 이 지출기록부는 19세기 궁중의 지출 내역과 시장 사정을 볼 수 있는 자료지요.”
 
  이 교수는 1880년대 초반부터의 지출기록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때부터 책의 두께가 갑자기 두꺼워지고 있잖아요?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치가 심해지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런 것만 봐도 고종이나 명성황후를 치켜세우는 게 얼마나 우스운 얘기인지를 알 수 있어요.”
 
  이영훈 교수는 지출기록부 중 한 권을 꺼내 들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시 설명을 듣다가 그의 젊은 시절로 이야기를 돌렸다.
 
 
  김근태 지도 아래 위장취업하기도
 

  — 대학 시절에 운동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운동권에 발을 담그게 되었습니까.
 
  “대학에 가면 고급스러운 지적(知的) 경험을 할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많이 실망했어요. 국어, 영어, 수학 같은 과목들이 이어지는 게 고등학교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던 차에 서울대 상과대학 학생들의 서클인 이론경제학회(원래 경우회였으나, 통일혁명당 사건 이후 개칭)에 들어가 보니 내가 생각하던 대학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거였어요. ‘사회과학입문’이라는 강독을 하는데 일본 이와나미(岩波)문고에서 나온 좌파서적들을 교재로 사용했는데, 대학강의실에서 채워지지 않고 있던 것을 충전(充塡)할 수 있었어요. 이론경제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점차 운동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당시 세미나를 지도했던 선배들로 4년 선배였던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 이근식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등을 꼽았다.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도 선배였는데, 그는 “이 정도는 알아야 한몫의 지식인이 될 수 있다”면서 50권의 책 리스트를 이영훈 교수에게 주었다고 한다.
 
  — 운동권 활동은 열심히 했습니까.
 
  “당시 윗선이 김근태(작고·전 열린우리당 의장) 선배와 심재권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선배였어요. 김근태 선배는 이론가형, 심재권 선배는 활동가형이었습니다. 저는 김근태 선배의 연락병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고려대, 이화여대 등으로 유인물을 전달하는 일을 했죠.”
 
  — 그때 김근태씨는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나요.
 
  “애매하지만 사회주의 지향성이 있었다고 봐요. 김근태 선배는 김대중씨와도 커넥션이 있었어요. 김대중씨를 만나고 온 얘기를 하기도 했죠. 1971년 4월 대선이 끝난 직후에는 ‘민중혁명의 분위기가 서울시내에 가득하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김근태 선배는 김대중씨의 《대중경제론》 집필을 도왔던 박현채 교수와도 연결되어 있었지요.”
 
  — 북한과 연결되어 있었습니까.
 
  “그렇진 않았어요. 마오쩌둥(毛澤東)주의를 추종하는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었어요.”
 
  — 공장에 위장취업한 적도 있다면서요.
 
  “1971년 8월 김근태 선배가 나, 김문수(전 경기도 지사), 이채언(전남대 교수) 등을 부르더니 ‘이제 농활(農活)은 이미 낡았으니 구로공단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 어디 가서 일했습니까.
 
  “노루표 페인트에서 일했어요. 두 달도 못 견디겠더군요. 이후 내내 노동운동을 한 김문수는 정말 대단해요.”
 
  — 김문수 전 지사와는 친했습니까.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요. 친했죠.”
 
 
  “야, 이 조선놈들아!”
 

  —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 회사에서는 플라스틱 용기도 만들었는데, 사출기(射出機)에서 나오는 제품 끝에 튀어나온 부분을 다듬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훈련도 안 시키고 바로 현장에 투입하니,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있나? 그냥 대충 해서 용기를 상자에 담아 내보냈지요.”
 
  — 그렇게 하는데 탈은 안 났나요.
 
  “왜 안 나겠어요? 얼마 후 그 물건들이 반품이 됐어요. 재일동포인 사장이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군요. ‘야, 이 조선놈들아! 내 친구들은 강남에 투기하고 있지만, 나는 그래도 이 나라 제조업을 발전시켜 보겠다고 공장을 하고 있는데, 다 반품되어 왔다!’면서 ‘야, 이 조선놈들아! 이 조선놈들아!’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속으로 ‘저 친일파놈, 언젠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별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분 참 애국자였어요.”
 
  — 운동은 얼마나 계속했습니까.
 
  “공활에서 돌아와서도 시위 때 연설도 하고 한동안 열심히 했지요. 그때 상대 학생회장이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이었어요. 그러다가 1971년 10월 위수령이 내려지면서 제적당했죠.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대학에서 110명을 제적시키고 절대로 복학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28사단에서 군 복무를 하고 돌아왔더니. 그 사이에 정부 방침이 누그러져서 1976년에 복학했어요. 하지만 이미 함께 학교 다니던 친구들도 없고 해서, 운동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됐지요.”
 
  — 경제사는 어떻게 선택하게 된 겁니까.
 
  “한동안 좌표 없이 대학을 다녔어요. 그래도 안병직 교수님의 한국경제사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안 교수님을 찾아가서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경제사를 하겠다’고 했죠. 안 교수님은 대뜸 ‘그러려면 서당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임창순 선생의 태동고전연구소에 집어넣더군요. 3년 동안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외웠어요. 그러고 나니 한문을 접할 때 두려움이 없어지더군요. 안 교수님이 나를 서당에 넣은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아시아혁명의 주체로서의 빈농’
 
  — 젊은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서 경제사 연구를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백남운 이래 경제사 연구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띠어 왔어요. 어느날 일본의 사사키(佐佐木潤之介)라는 학자가 쓴 논문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아시아혁명의 주체로서 빈농(貧農)이 역사적으로 형성, 발전해 온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시아혁명의 시대를 사는 역사학도에게 부여된 임무’라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경제사학자로서 할 일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침 한국에서는 김용섭 교수가 18~19세기 이래 농민층이 부농(富農)과 빈농의 두 계층으로 분열되었다고 주장, 큰호응을 얻고 있었어요.”
 
  — ‘경영형 부농’의 등장으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조선에서도 나타났다는 주장이죠.
 
  “나는 김 교수의 주장에 실증적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사키의 영향도 있어서 18~19세기 농민분열의 실태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로 결심했죠. 1980년부터 서울대 규장각에 파묻혔습니다. 18~19세기 농민들의 계층별 동향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수집했어요. 동일 지역에서 연도를 달리해 작성된 추수기(秋收記), 도지기(賭只記) 같은 지주들의 장부 등 20여 건의 지역사례를 분석대상으로 삼아 시간의 추이와 함께 나타나는 변화를 추적했죠.”
 
  —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당초 예상과는 딴판이었어요.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는 소농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화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말기의 농민은 그와는 반대로 표준적인 경작 규모의 소농(小農)계층으로 수렴(收斂)되고 있었습니다. 1983~84년 발표한 두 개의 논문에서 나는 ‘자립적 소농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1985년에는 〈조선후기의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논문을 보고 이수근 영남대 교수가 연락을 해 왔습니다.”
 
  — 이수근 교수는 어떤 분인가요.
 
  “그분은 《경북지방고문서집성(慶北地方古文書集成)》이라는 책을 낸 분이었습니다. 함께 영남지역 양반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고문서들을 연구해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 고문서들을 보면서 눈이 뒤집어졌습니다. 덕분에 1986~90년 엄청난 지적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마어마한 노비의 숫자였습니다. 양반가의 15~16세기 상속문서에 적힌 노비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조선 인구의 40%가 노비”
 
  — 어느 정도나 됩니까.
 
  “15~16세기 인구의 30~40%에 달합니다.”
 
  — 역사학에서 중세 내지 근세라고 이야기하는 조선시대에 노비가 그렇게 많았단 말입니까.
 
  “중앙 관료를 겸하는 경우 200~ 300구(口·노비를 세는 단위)는 보통이었습니다. 800구, 1000구를 가진 경우, 심지어 1만 구를 가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도 적어도 노비를 70~80구는 가져야 행세할 수 있었어요. 반면에 고대 로마나 19세기 남부 농장에서도 노예 규모는 100구를 넘기 힘들었습니다.”
 
  — 노비 1구의 재산가치는 어느 정도였나요.
 
  “조선시대에는 노비 1구의 값이 말 한 필의 가격, 혹은 666일의 노동가치에 해당했습니다. 요즘 하루 일당을 5만원이라고 치면 노비 한 구의 가격은 3300만원쯤 되는 셈이죠. 200구의 노비를 가진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66억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셈이었어요.”
 
  — 그 많은 노비들이 어디서 나타난 것입니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실, 귀족, 사찰 등에서 일하는 소수의 가내(家內) 노비들이 있었지만, 많아야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각각의 인간들에게 특정의 역(役)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양반·상민·노비 신분으로 차별하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 중앙의 귀족, 관료, 중앙군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장(老莊)을 만들면서 가난한 농민들이 농장에 딸린 노비로 전락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이러한 발견은 내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멀어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세계사의 기본법칙’에 의하면 인류사회는 원시공산제 →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로 나간다고 하잖아요. 그 영향을 받은 종래의 통설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를 노예제의 전성기로, 이후 고려시대부터는 노예제의 쇠퇴기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고문서들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14세기부터 노예제가 확대되기 시작, 16~17세기가 노예제의 전성기였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현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사적(史的) 유물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역사를 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는 이른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의 전형이었습니다. 사실을 보면서 점차 마르크스주의와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 최종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건 언제였습니까.
 
  “1993년엔가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에서 탈퇴하면서 운동권 교수라는 꼬리표를 뗐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성명서를 보내 왔는데, 광주의 유혈참극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따지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이자 반(半)봉건사회로 간주하는, 내게는 익숙한 논리였습니다. 회원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성명을 발표하는 행태도 마뜩지 않아서 탈퇴서를 제출했습니다. 이후로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은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IMF사태 이후 오늘날 한국 경제의 실태를 들여다보게 되면서 기업과 시장, 법과 제도, 사회적 신뢰의 중요성 등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유주의자로 돌아서게 되었지요.”
 
 
  옥산서원의 지출부
 

  — 그 많던 노비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17세기 전반 이후 조선은 일본과 중국 간에 중계무역을 하면서 한동안 경제적 번영을 누립니다. 그에 따라 농촌에 정기시(定期市)가 성립하고, 동전이 유통되었습니다. 집약농법이 성숙하고 상품생산이 촉진되었습니다. 농가의 자립성이 제고됨에 따라 노비인구가 감소하고, 소규모 가족과 세대(世帶)가 소농으로 자립하게 됩니다. 노비인구의 감소에 따라 농장은 서서히 해체되고요. 그러면서 앞에서 말한 자립형 소농이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 말씀대로라면, 조선말기에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 내지 ‘근대화의 싹’이 나타난 건가요.
 
  “17~18세기에는 안정과 번영을 누렸지만, 이런 상황은 19세기가 되면서 갑자기 악화됩니다. 100년간의 안정과 번영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연료를 얻기 위해, 혹은 산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기 위해 산의 나무들을 남벌하면서 산림이 황폐화됩니다. 그 결과 홍수나 가뭄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면서 농업생산성이 떨어지고 기근이 자주 발생합니다. 19세기 내내 경제수준은 계속 악화되고, 민란이 거듭되지만, 조선왕조는 이를 극복할 만한 통치능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1860년대에 조선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일제(日帝)의 침략 이전에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19세기의 고문서들을 보면 경제상황이 나빠지는 게 눈에 보인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원의 지출부를 연도별로 죽 배열해 보면 장부의 지질(紙質)이 점점 나빠지고, 책을 묶는 끈도 비단에서 종이로 바뀝니다. 경제가 나빠지면 인간의 교양수준도 저하되는지, 장부를 적은 글씨의 수준도 선비의 달필(達筆)에서 어린애의 졸필(拙筆)로 저하되고 있는 게 보여요.”
 
  — 결국 ‘자본주의 맹아’는 없었던 건가요.
 
  “보통 직포업(織布業)이 농가의 가내부업(家內副業)에서 사회적 부업의 일환으로 분리되어 농촌공업으로 성립하는 것을 자본주의 맹아의 출현으로 봅니다. 조선에서는 그런 적이 없어요. 소농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화하는 대신, 소농으로 수렴한 것도 ‘자본주의 맹아’가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정치학
 

  — 그럼 해방 이후 70년 넘게 ‘자본주의 맹아’를 발견하려 애써 온 한국 사학계는 헛고생을 한 셈이군요.
 
  “환상 속에서 살아 온 셈이죠. 미국의 카터 J. 에커트는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은 오렌지나무에서 사과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비꼬았습니다.”
 
  — ‘자본주의 맹아론’이 그렇게 오랫동안 풍미했던 이유는 뭘까요.
 
  “그 정치적 함의가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합병당하기 전에 우리의 역사가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현대 한국인의 민족주의 정서를 만족시켜 주었으니까요.”
 
  이영훈 교수는 “‘자본주의 맹아론’은 한국의 정치현실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도 유용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18세기 이래 자본주의 맹아가 성숙함에 따라 봉건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두 갈래 노력이 나타났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19세기의 민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밑에서부터의 근대화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적 지배계층이 시도했던 ‘위로부터의 근대화 노선’이라는 거죠. 이러한 노력은 모두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되었지만, 해방 후 농민계급의 혁명적 노선은 북한이, 지배계급의 개량주의 노선은 남한이 계승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맹아론의 정치학에 따르면, ‘1948년에 건국한 대한민국은 조선봉건체제의 지배계급과 일제시대에 성장한 예속 자본가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분단을 무릅쓰면서 세운 반민족적·반(半)봉건적 국가체제이며, 대한민국은 통일과 함께 해체되어야 할 잠정적인 위선(僞善)의 체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고종, 왕실의 유지·존속밖에 관심 없어”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종을 자주적 개혁을 추진했던 개명군주로 높이 평가한다.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이 일련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했었다며 이를 ‘광무개혁’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정치인들도 이에 호응한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는 금년을 맞으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 환구단에서 정동에 이르는 길을 ‘대한제국의 길’로 조성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신년을 ‘대한제국 120주년을 맞는 해’라면서 ‘고종의 못다 한 꿈’ 운운하는 소리를 했다. 문 전 대표의 이야기를 이영훈 교수에게 전하자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허 … 그가 그런 소리를 정말 했어요?”라면서 잠시 말문을 닫았다.
 
  — ‘광무개혁’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종 시대의 사료(史料)를 본 사람은 그렇게 얘기할 수가 없어요. 화폐 주조(鑄造), 통신, 인삼세·광업세·어업세·소금세 등 돈이 되는 것은 다 탁지부가 관할하는 국고가 아니라 황실재정으로 들어갔어요. 군부(軍部·국방부)에서 국방예산이 모자란다면서 고종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고종이 돈을 내주었는데 그냥 하사한 게 아니고 꿔 주었어요. 한마디로 고종은 왕실의 유지와 존속밖에는 관심이 없었고, 왕국을 자신의 가산(家産)으로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이 교수는 “고종이 개명군주였고 그가 근대화 노력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주장은, 고종 시대의 방대한 사료에 대한 분석 없이 교수라는 신분적 위세를 이용해서 사회적 명예를 낚기 위한 학문적 사기에 불과하다”고 단정지었다.
 
  —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해서는 한사코 부정적인,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이 1897년 대한제국 선포는 알뜰하게 챙기는 이유가 뭘까요.
 
  “조선시대 성리학과 부족주의적 민족주의의 변태(變態)라고밖에는 할 수 없어요.”
 
  — 조선말기에 추구했던 ‘독립’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큰소리치면서 중국에는 아무 소리 못하는 사람도 많고요.
 
  “조선시대의 연장에서 현재를 감각하는 경향이 아직도 있어요. 맹목적으로 친중(親中) 입장을 표명하는 국회의원들도 그렇고 …. 중국은 경제가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을 알지 못하는 비(非)근대사회입니다. 우리가 존경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서울대는 2014년 7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다녀갔을 때 도서관에서 앉았던 자리에 금줄을 치고 두 사람이 앉았던 자리라는 표지를 하면서 성지화(聖地化)해 놓았어요. 이런 걸 보면 우리의 의식 속에 암묵적으로 소중화론적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은 정주형 도둑”
 

  — 그러면 한국의 근대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나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민법)’을 공포한 데서부터 근대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근대는 개인의 재산권이 보장되고, ‘사적(私的) 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인정되는 사회를 말합니다. 이는 법적으로는 민법(Civil Law)을 제정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영훈 교수는 “조선민사령의 공포는 해방 이후 오늘날 우리의 경제·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철도나 공장 같은 인프라 건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왜 어느 나라는 잘살고 어느 나라는 못삽니까? 신제도학자 경제학을 창시한 로널드 코스, 더글러스 노스는 ‘사유재산을 핵심으로 하는 제도’의 정립 여부에서 대답을 찾았습니다. 사유재산의 보장은 민법이 제정되어야 가능합니다.”
 
  — 그런 소리를 하면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부족주의적 배타성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일제시대에 근대화가 된 게 아니면 우리가 언제부터 근대화되었나요? 일제시대에 진행된 근대화가 왜곡된 근대화라면 진정한 근대화는 언제부터 진행된 것이죠?
 
  우리나라 역사책 어디를 봐도 언제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한 책이 없습니다. 한국사 책 어디를 봐도 오늘날의 경제체제를 성립시킨 역사적 사건이나 계기에 대한 대목이 없어요. 시장경제 속의 인간들은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주체로서 곧 자유인입니다. 한국은 언제부터 자유인이었습니까? 한국에서 사유재산제도는 언제 포괄적으로 성립했습니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는 학생이 없어요. 한국의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법학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엉뚱한 대답만 합니다.”
 
  — 일본이 사적 자치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자유는 인정했지만, 정치적 자유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근대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내가 일제의 식민통치가 좋았다, 옳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제는 비유하자면 ‘정주형(定住型) 도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털어먹고 말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예 한반도에 주저앉아 자기들의 땅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들의 경제제도를 이식한 것이지요. 비록 일제가 제정한 것이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민법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것이라고 여겨서 그대로 계수(繼受)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일제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한다면서 민법이 없는 사회, 조선시대로 되돌아갔지요. 바로 거기가 남한과 북한이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운명의 갈림길이었습니다.”
 
 
  박정희와 한국형 국가혁신체제
 
  — 금년이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입니다.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시대 이후의 한국 경제발전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1963년부터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의 길에 진입한 것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지경학적(地經學的) 조건의 변화에 힘입은 바 큽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출을 주요 동력으로 하는 고도성장의 국가혁신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비료, 시멘트, 정유, 화학 등의 기초공업에 이어 노동집약적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을 순차적으로 건설하면서, 세계시장을 겨냥하여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였습니다. 대규모 투자에 따른 비효율과 낭비가 없지 않았지만, 경영성과가 수출실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낮은 수준에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기업·노동자 사이에 상호 유인과 협력의 체제가 이런 국가혁신체제를 뒷받침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 시절에 구축된 한국형 국가혁신체제가 무너졌지만, 새로운 국가혁신체제를 만들어 내지 못한 데서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