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니 65세부터 90세까지는 열매 맺어 사회에 돌려주는 기간”
⊙ “신체적 노화는 어쩔 수 없지만, 정신적 노화는 자신의 책임”
⊙ “청소년 시기엔 위인전과 문학, 청년 때는 고전 읽어야”
⊙ “늙었다며 후퇴하지 말고 전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 속으로 뛰어들자”
金亨錫
1920년생. 일본 조치대 철학과 졸업 / 1947년 월남, 중앙중학교 교사·교감, 연세대 철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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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6일 양구인문학박물관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에서 만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사진=조준우 |
올해 만 100세가 된 철학자는 천천히 전시관을 둘러봤다. 질리지도 않은지 벽에 붙은 사진들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지난 2월 6일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와 양구인문학박물관을 찾았다.
원래대로라면 김 교수 자택에서 만나야 할 터였다. 그런데 그의 책과 책상, 그러니까 서재가 거의 통째로 외부로 옮겨졌다는 걸 알게 됐다. 저서와 선물받아 간직하고 있던 책들, 일기장, 자필 원고 등이었다. 서적뿐 아니라 도자기와 글씨 등 수집한 작품들도 함께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양구인문학박물관(이하 박물관)으로 보냈다. 2012년과 2018년 두 차례 나눠서 옮겼다.
양구로 서재 통째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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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인문학박물관의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의 외경. |
박물관은 아예 별도 건물을 새로 지어 두 철학자를 맞았다. 2018년 개관한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이다. 파로호 상류 옆에 자리를 잡았다. 1층은 안 교수의 전시실, 2층은 김 교수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두 철학자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과 메모, 서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쪽엔 두 학자의 서재를 재현해놨다.
박물관과의 인연은 두 교수의 아들들 덕에 맺어졌다. 지역 내 인문학을 위한 콘텐츠를 찾던 양구군이 김형석·안병욱·김태길 세 동갑내기 철학자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김태길(2009년 별세)·안병욱(2013년 별세) 교수와 함께 ‘국내 3대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불렸다. 무엇보다 평생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특히 김 교수와 안 교수는 실향민이다. 김 교수는 평안남도 대동, 안 교수는 평안남도 용강이 고향이다. 게다가 김 교수의 아들 김성진 한림대 명예교수와 안 교수의 아들 안동규 한림대 부총장이 강원도에 있는 한림대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2013년 영면에 든 안 교수는 박물관 뜰 한쪽에 묻혀 있다. 최민규 박물관 관장은 “후에 김 교수도 친구 옆에 자리하시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물관에선 한 달에 한 번꼴로 김형석 교수가 강연하는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 박물관은 김 교수의 과거를 보존한 서재이자, 현재를 함께하는 강의실이자, 훗날 친구 곁에서 잠들 미래의 집인 셈이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았을 전시벽을 김 교수는 가만히 오래 들여다봤다. 환히 웃는 젊은 부부, 굳은 표정의 연세대 철학과 교수들, 친우(親友) 김태길 교수, 윤동주 시인, 김수환 추기경…. 그 앞을 조용히 흐르던 그의 발길이 유독 한 흑백사진 앞에 오래 머물렀다. 모교인 평양 숭실중학 교사(校舍)의 전경이었다. 꿈속에서나 가능할지… 이제 이번 생에는 갈 수 없는 곳이다. 평양의 숭실학교 자리엔 현재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서 있다.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난 김형석 교수는 1943년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47년 월남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서울 중앙중·고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54년부터 1985년까지는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헤겔과 그의 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등 100여 권의 책을 냈다. 가장 최근에 낸 책은 《삶의 한 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다.
가구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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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계의 트로이카로 꼽혔던 동갑내기 철학자들. 왼쪽부터 안병욱·김태길·김형석 교수. 사진=양구인문학박물관 |
“의자에 앉아도 됩니까.”
옆에 서 있는 최 관장에게 물었다.
“아이고, 교수님 의자인걸요. 교수님은 언제든 앉으실 수 있지요.”
본래는 사진만 몇 장 찍을 요량이었다. 김 교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보니 어쩐지 진짜 서재 안에 마주 앉아 있는 듯했다. 김 교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서재가 반가운 듯했다. 전시용이 아니라 앉아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고 차를 마시는 서재 말이다. 책상을 어루만지다 문득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가구들은 옛날 내가 쓰던 서재 가구인데요, 내가 지금 연희동에 살아요. 우리 집은 비교적 작은데 다른 집들은 다 크고 좋아요.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가구를 몇 해 쓰다가 새 가구를 쓰고 싶으니까 대문 밖에 내버리더라고요.
집안일 도와주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한 번씩 물어요. ‘누구네 집 대문 앞에 가구 버렸는데 우리가 갖다 쓰면 어떨까요.’ 그러면 내가 말하죠. ‘가져오려면 누가 안 볼 때 밤에 몰래 가져오세요.’ 내가 쓰는 가구들이 다 그런 거예요. 전부 중고품만 있어요.
옆에 이 좌탁은 조금 달라요. 골동품까진 아니지만 100년 가까이 된 거예요. 거기 그 소파는 한 30년 됐네요. 누가 골라준다고 좋은 걸 쓰라고 해서 가져왔는데 편하긴 해요. 여기 갖다놓기가 좀 창피해서 다른 가구들은 안 갖다놨어요. 뭐 저런 걸 쓰고 있나 그럴까 봐요. 지금 집에서 쓰는 책상이 두 갠데요, 그중 하나는 6·25전쟁 때 미군들이 쓰다 버린 걸 갖다 쓰고 있어요. 군대에서 쓴 거라 실용적이고 괜찮아요.”
50대 후반부터 40년간 수영
김 교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지팡이는 물론 보청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작은 소리에 귀가 어두운 것 외에는 신체 노화(老化)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읽고 쓰는 데도 문제가 없다. 지금도 《조선일보》에 매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가 자필로 원고를 작성하면, 수필가이기도 한 이종옥 한국생명의전화 이사가 타자를 쳐서 컴퓨터 파일로 옮겨놓는다.
어떻게 살면 100년 넘게 건강할 수 있을까. 일과부터 물었다.
“대체로 아침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일어납니다. 아침 먹고 오전에는 특별한 일 없으면 원고 정리하고요. 낮 12시 반쯤 되면 점심 먹고요. 강연하는 날이 많으니까요. 오후엔 강연하고 사람 만나고요. 6시 반쯤 저녁 먹고요. 그다음엔 시간이 남으면 책 좀 보고 생각도 좀 정리하다가 밤 10시쯤 되면 잡니다. 다행스럽게 잠을 잘 자기 때문에 하루 8시간은 충분히 자곤 합니다”.
그는 50대 후반에 수영을 시작했다. 운동이 건강의 비결인 걸까.
“나이 들면요, 성인병이 우리 건강을 자꾸 위축시키는 요소가 되지요. 의사들이나 경험 많은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혈압이나 당뇨병, 치매도 50대부터 관리하면 90세까진 괜찮대요. 90세 이상은 좀 어렵지만요.
내가 직접 경험해보니 신체적인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50대쯤 되면 한 가지 운동을 하는 것이 좋아요. 테니스를 쳐볼까 했는데, 짝이 있어야 하고 시간을 맞춰야 하잖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아무 때나 내가 원하는 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보니까 수영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수영을 시작했어요. 이제 한 40년 됐죠. 상당히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독일에 갔더니 성인들의 건강을 위해서 수영이나 자전거 타는 걸 권해요. 수영을 하면 관절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 내 나이가 되면 지팡이 짚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나는 수영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요새 다들 자동차 타니까 다리 운동을 못 하거든요. 90세가 넘으면 다 지팡이 짚어야 해요. 다릿심이 빠져서 그렇대요. 독일 사람들은 그걸 예방하기 위해 자전거 타는 걸 권하나 봐요.”
일기 쓰기 전에 3년 치 일기 읽어
― 요즘도 수영을 하시는지요.
“창조적 중독이라고 할까요. 지방에서 강연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면 친구들은 피곤하니까 다 집으로 가죠. 나는 ‘잠깐 수영 좀 하고 가겠다’고 따로 가요. 그러면 피곤한데 수영을 왜 하냐고 해요. 그런데 20~30분 동안 수영하면 피곤이 다 풀려요. 정신적 피로도 풀려요. 새 출발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더 많은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해요.
수영은 몇 달 전까진 자주 했어요. 나이 드니까 체력이 부담되는 것 같아서 요즘엔 일주일에 한 번쯤하고요. 좀 걷죠. 가만 생각해보니까 의도적으로 하루에 1.5km쯤 걷고요. 2층에 살기 때문에 아래층 위층 오르내리면 층층계단을 하루에 몇십 번 오르잖아요. 그게 운동이 되고요. 내 나이가 되면 거의 걷지 못해요. 안병욱 선생도 93세에 만났을 때 보니 잘 걷지 못했어요. 백선엽 장군도 90세 된 다음부터 휠체어 타거든요. 내가 걷는 걸 보면 부러워하죠.”
대화를 나눌수록 몸이 아니라 정신 건강에 더 관심이 갔다. 그의 말은 정연했다. 유명하다는 학자들 중에도 말을 그대로 글로 옮기면 도저히 문장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두서없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김 교수는 어떤 질문에도 일정한 속도로 단정히 정리된 말로 들려줬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끊임없이 제련한 이들의 특징이다.
― 매일 일기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늙는 게 몸이에요. 그리고 정서적으로 늙기 시작하고요. 감정조절이 잘 안 되죠. 정신력은 거의 늙지 않아요. 지금도 내가 정신적으로 늙었다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일기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데요. 인간적인 성숙엔 한계가 없는 거 같아요. 일기 쓰기 전에 작년 거 재작년 거를 읽거든요. 재작년 걸 읽으면서 ‘아, 내가 그때 그런 실수를 했지, 다신 실수하지 말아야지.’ 작년 거 읽으며 ‘아, 내가 그때 이만큼 좋은 생각을 했구나. 이 생각을 더 연장해야겠다’고 생각하죠. 일기를 쓰면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것 같아요.”
철학으로 이어진 독서
― 왜 철학자가 되셨나요.
“어릴 때예요. 아버지가 가을철 되면 지게를 지고 땔감 하러 산에 올라가셨어요. 나에게 같이 가자고 하면, 전 안 따라간다고 해요. 그러면 ‘옛날 얘기 해줄게’ 하세요. 빈 지게에 타는 재미로 따라갔어요. 석가님 얘기, 예수님 얘기 해주시데요. 재미있게 들었어요. 사색하는 종교철학에 대한 생각을 그때 물려받지 않았나 싶어요.
숭실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신사(神社) 참배가 문제가 됐어요. 참배를 하고 학교를 다니느냐 아니면 신사 참배를 안 하고 학교를 떠나느냐. 그때 윤동주 시인이 동급생이었어요. ‘넌 어떡할래’ 물었더니 ‘만주로 가면 신사 참배 안 해도 된다’ 하더니 만주로 갔어요. 난 신사 참배를 안 해야겠다 싶어 학교를 1년 쉬었어요.
학교는 못 가고 집에 있을 순 없으니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 읽다가 오후 5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어요. 한국 문학도 읽고 철학 관련 책도 좀 읽었어요. 이해는 못 했고요. 철학서를 네댓 권 읽었어요. 그렇게 1년 쉬고 4학년에 입학했는데, 그때 아마 철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긴 거 같아요. 사상적으로 깊이 있는 독서를 한 게 철학으로 이끌지 않았나 해요.”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인식이 뭡니까’라고 질문을 했어요. 학생 질문에 선생이 똑바로 대답을 못 하데요. 내가 손을 들고서 대답했어요. ‘철학에는 인식론이라는 게 있는데 지식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걸 인식이라고 한다’고. 애들이 깜짝 놀라서 ‘와~’ 했거든요. 그때 ‘철학자’란 별명이 생겨서 지금까지 따라다녀요.”
김형석 교수가 추천하는 책 14권 1. 공자 《논어》 2.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3. 안병욱 《안창호평전》 4. 김구 《백범일지》 5. 알베르트 슈바이처 《나의 생애와 사상》 6.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맥베스》 7. 괴테 《파우스트》 8. 김형석 《예수》 9.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0. 간디 《간디 자서전》 11. 이효석 《메밀꽃 필무렵》 12. 성경 구약의 《창세기》 13. 성경 신약의 《마가복음》 14. 김형석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 |
섭리
그는 철학자면서 신앙인이다. 《예수》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 같은 책을 내기도 했다.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목사님 말씀에 고개를 조아리는 신도는 아니었다. ‘기독교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은 독선’ ‘나는 개신교 안에 있지만 교회주의자는 아니다’. 평소 그의 말들이다.
신앙인들은 ‘섭리(攝理)’라는 말을 쓴다. 쉽지 않은 단어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 또는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이란 뜻을 지녔다. 철학자며 신앙인인 그와 가장 잘 맞는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 섭리가 있다고 느끼시나요.
“살다 보면 자유의 한계를 느껴요. 내가 수영한다고 하니 어떤 아나운서가 나보고 ‘몇십 년 하셨으니 수영 잘하시겠네요’ 그래요. 그래서 ‘박지성 선수가 나이 팔십에 축구할 거 같나’ 하고 되묻고 같이 웃었어요. 그건 안 된단 말이죠. 한계가 있는 거예요.
자유를 넘어 그 다음 단계는 운명이라 하거든요. 결국 인간은 자유와 운명을 왔다 갔다 해요. 조물주라고 할까요. 신의 존재와 섭리를 체험한 사람은 종교를 갖게 돼요. 운명 뒤에 서 있는 섭리를 믿게 되는 거죠.
제가 열네 살 초등학교 졸업할 때 건강이 무척 나빴거든요. 어머니가 항상 저 듣는 데서도 ‘스무 살까지만 사는 걸 봤으면 좋겠다’ 할 정도였으니까요. 저 자신도 다른 사람처럼 오래 살지 못할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 교회 나가서 마음속으로 빌었어요. ‘만약에 내게 건강이 허락된다면 내가 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건강을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려운 시대에 살았으니까요. 두세 번쯤은 정말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내게 죽음이 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38선 넘을 때도 그랬고, 학도병 징집 때도 그랬어요. 고비를 넘기고, 나보다 건강했던 친구들이 이제 다 세상을 떠났어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열심히 여러 가지 일하는 거 보면 ‘이건 내 능력은 아니고, 나를 이끌어주는, 내 인생을 관리해주는 제3자가 나와 더불어 일해주고 있다’ 그런 걸 느껴요. 제 책 가운데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라는 책이 있어요. 다들 운명에 맡기느냐, 인생은 허무하냐 하는데, 둘 다 아니다. 섭리 속에 산 거 같다. 그런 말이에요.
철학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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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있던 숭실학교의 전경. 사진=양구인문학박물관 |
안 선생은 공자를 존경했어요. ‘공자만큼 성실하게 산 사람은 없다’면서 저한테 물어요. ‘근데 김 선생은 철학을 공부했고 우리와 생각이 같은데 신앙을 어떻게 가지게 됐나.’
성실은 내가 나를 믿고 내 인생의 운명은 내가 책임지는 게 성실하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답했어요. ‘내가 살아보니 성실이 끝나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되니 신앙을 가지게 되더라.’
산에 호수가 있는데 바람이 불면 호수 물이 움직이잖아요. 그러면 달그림자도 별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거든요. 바람이 불지 않고 조용하게 되면 달그림자가 가득하거든요. 그 마음이 경건한 마음이에요.
철학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엔 두 가지 길로 나뉘어요. 끝까지 성실을 믿고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면 철학으로 가는 거고요, 한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끼고 경건한 마음을 가질 때에는 신앙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박종홍 서울대 교수나 김태길 교수 같은 분들은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몇십 년 고민하다 박 선생이 암을 앓게 되니까 생명의 종말을 느끼면서 신앙으로 돌아왔어요. 김 교수도 여러 해 고민하다 마지막에 신앙을 갖데요.”
“90세까지는 마음놓고 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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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조치대 재학 당시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김형석 교수, 앞줄 맨 왼쪽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사진=양구인문학박물관 |
“선배 교수가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인생이 뭔가 생각했는데 흑판을 향해 30년, 흑판을 등지고 30년이다.’ 30년 학생생활하고 30년 교수생활하니 끝나더라는 거예요. 예전엔 인생이 2단계였어요. 30세까지는 교육을 받는 단계, 60세까지는 직장에서 일한 다음 정년되면 끝났거든요.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65세에 정년퇴직하고 나니 내가 전혀 늙지 않은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살기 시작했어요. 80세 돼서도 늙었다는 생각 안 했거든요. 90세가 되니까 비로소 늙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인생을 3단계로 보자고 해요. 30세까지는 교육받는 단계, 60세 넘을 때까지는 직장에서 일하는 단계, 60세 넘어서 90세까지는 열매를 맺어서 사회에 주는 단계. 사과나무도 제일 소중한 기간은 열매를 맺고 죽어가는 기간이거든요.
살아 보니 열매를 맺어서 사회에 주는 단계는 65세에서 90세까지더라. 90세까지는 마음놓고 인생을 시작하라는 거예요. 60세에 직장을 떠나고 아들딸들은 독립하고 사회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 제2의 마라톤이에요. 그때부터 90세까지는 마음놓고 달려라. 1등, 2등 그런 건 거기 없어요. 90세까지 가는 사람은 다 승리자다, 늦어도 괜찮으니 90세까지 가라. 90세까지 못 간다면 그건 내가 잘못 산 거예요.
그런데 90세가 되면 대부분 끝나고 일부 특수한 사람이 좀 더 가요. 90세를 앞두고 너무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어요. 친구 가운데 11명이 90세 전후에 세상을 떠나데요. 김수환 추기경도 그렇고, 안병욱 선생도 김태길 선생도. 고독하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어요. ‘나 혼자 남으면 어떡하지. 할 수 없다, 이젠 내가 나를 키워야겠다’ 하고 다시 출발해서 100세까지 왔어요.
내가 일을 제일 많이 한 게 40세에서 60세까지고요. 쭉 살다가 97세에서 100세까지 3년 동안 일도 많이 했어요. 지금이 인생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해요. 한 해 강연도 180회 하고요. 책도 금년에 두 권 나오고, 작년에 세 권 나왔으니까요. ‘와, 내 나이에 이렇게 일 많이 할 수 있나’ 싶어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 오래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리겠다’ 했던 주님과의 약속이 이뤄졌나 봐요.”
‘늙어도 늙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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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한쪽에 김형석 교수의 서재를 재현해놓았다. |
“사람이 정서적으로도 늙거든요. 80세 넘은 어느 날 우리 셋(김형석·김태길·안병욱)이 만났어요. 안병욱 선생이 이런 얘길 해요. ‘젊게 사는 방법은 공부, 여행, 연애 이 세 가지다.’ 그래서 ‘당신은 왜 늙었소’ 그랬더니 ‘나는 공부도 하고 여행도 했는데 연애를 못 했소’ 그러는 거예요. ‘부인이 무서워서?’ 물으니, ‘저런 바보 봤나, 연애는 원래 몰래 하는 거지 와이프 무서우면 연애를 하나?’ 이래요. 그러면 왜 못 했냐 물어보니 답이 이거예요. ‘80세가 되니 상대가 없어.’
안 선생이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어요. 일주일에 하루는 오후에 들러서 친구들 만나고 그러던 곳이에요. 여기 여직원과 친해진 거예요. 하루는 그 아가씨가 ‘선생님, 개인적인 말씀을 조용히 드리려는데 시간 내달라’고 했대요. 무슨 얘기를 하려나… 밤새 꿈을 잔뜩 꾸고 갔는데, 결국 얘기가 이거였대요. ‘이번에 결혼을 하는데 주례 좀 서달라.’ 주례 서주마 약속했더니 아가씨는 고맙다고 하고 가더래요. 커피 한잔을 시켜서 절반이 남은 상태였는데 그 절반 남은 커피를 마시고 나니까 커피 맛이 딱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산을 한 바퀴 쭉 돌며 혼자 이랬대요. ‘나 혼자 남겨두고 다 가는구나.’ 그 얘기를 듣고 ‘아, 저런 기분이 남아 있으니 글도 쓰고 젊게 사는구나’ 싶었어요. 그것까지 없어지면 늙은 거예요.
나이 들어도 글에 감정이나 정서적인 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두 가지 조건이에요. 첫 번째는 젊었을 때 문학 책을 많이 읽은 사람, 두 번째는 늙도록 늙지 않는 사람이에요. 신체가 늙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 늙는 건 자기 책임인 것 같아요. 공부하고 일하는 걸 계속하는 동안은 안 늙어요. 일만 하면 정신적으로 늙고, 공부만 하면 사회적으로 늙어버리고요. 공부와 일을 함께 하게 되면 사회에 책임을 지기 때문인지 안 늙는 것 같아요. 90세까진 정신적으로 늙지 않을 수 있다고 봐요.”
“나라 걱정하는 사람이 오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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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와 아내 김옥수씨의 다정한 한때. 1980년 6월 촬영. 사진=양구인문학박물관 |
“결국 늙는 건 생활 공간이 좁아지는 거예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 다니는 동안은 사회 공간이 커지다가 60, 70세가 되면 사회 공간이 없어지니 가정 공간으로 돌아오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끝나요. 안병욱 선생이나 김태길 선생을 생각해보면, 사회 공간을 상실하지 않고 사회에 대한 걱정, 민족과 국가에 대한 걱정을 그대로 하는 사람은 오래가요.
김태길 선생이 90세에 돌아가셨는데 세상 떠날 때까지 일했거든요. 안병욱 선생도 93세에 돌아가셨는데 병중에 있을 때도 나라 걱정을 했어요. 나도 요새 신문에 글을 쓰고 있어요. 내 글에 사람들이 왜 관심을 가져주느냐, 20대부터 50대 사람들이 사회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나도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 대화가 돼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우리 세대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에서 소외당하지 말고 뛰어들어 그분들과 함께 고민하고, 그분들과 함께 문제 해결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어요. 중학생 될 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 이제부터 긴 인생을 살게 되겠다. 항상 나와 내 가정 걱정만 하면 가정만큼밖에 못 자란다. 친구들과 더불어 좋은 직장을 만들어 사회봉사하면 그만큼 성장한다. 항상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게 되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큼 성장한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나이 드니 그것이 인간이 늙도록 보람 있게 사는 한 공식인 것 같아요.”
선한 인생을 넘어 아름다운 인생
그는 선한 인생을 넘어서 아름다운 인생을 말했다.
“요새 가만히 보면 대통령이나 정치 하는 사람들이 ‘법에 걸리지 않으면 나는 잘못한 게 없다’든지 ‘법에만 안 걸리면 부끄러운 게 없다’ 이런 말을 하데요. 그건 인생의 가장 낮은 단계거든요. 양심은 어떡하나요. 도덕과 윤리는 어떡하냐는 말이죠.
조국 전 장관 문제도 그래요. 청와대 사람들 하는 말이 법에만 안 걸리면 된다는데, 그건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뿐이거든요.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법으로만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이상이에요. 질서 사회가 돼야 해요.
그러려면 법보다 윤리, 도덕이 필요해요. 보통 윤리나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한 인생을 택하고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생을 택하거든요. 키에르케고르도 도덕과 윤리를 찾아가는 선한 길을 택하느냐 예술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인생을 택하느냐 고뇌했어요.
한때는 선한 인생이 최고라 생각했는데 나이 드니까 아름다운 인생이 더 귀한 거 같기도 해요. 예술과 더불어 있으니까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건 없고요, 예를 들면 대학에 있다 정년이 돼서 떠나잖아요. 요새 ‘꼰대’라고 하던가요, 후배 교수들이 ‘잔소리하던 김 교수 떠나니까 이젠 살맛이 난다’ 그러면 실패한 사람이고요, ‘선생님 계실 때 우리 참 좋았는데, 다신 그런 선배 못 모실 거다’ 그러면 선하게 산 거죠. 공동체 생활할 때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걸 두고 우리가 선하다 아름다운 인생이다 그렇게 보는 거죠.”
늙으면 필요한 건 일과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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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의 친필 원고. 김 교수는 지금도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다. |
“꼭 몇 살은 아니고요. 나이 들면 점점 후배들과 사회가 멀리하려 하는 사람이 있고, 나이 들어도 계속 가까이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살아 보니 나이가 80세가 되고 90세가 돼도 가까이하려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 보람 있고 행복해요. 나이는 많지 않아도 가까이 안 하려는 사람이 많으면 실패한 사람이거든요.
선배 교수 한 사람이 있었어요 정년퇴직하고 나니 심심하고 혼자 있긴 싫고 종로 어느 다방에 가서 후배 교수들한테 연락을 하는 거예요. ‘쓸쓸하게 나와 있으니 좀 놀러 오라’고.
처음엔 후배 교수들이 나와줘요. 그러다 얼마 지나니 자기들끼리 떠밀어요. ‘다음은 네가 가라, 네가 가라.’
그렇게 되지 말고 같이 얘기하러 나오고 싶은 그런 선배가 되어야 해요. 미안한 얘긴데, 나는 지금도 자식들과 식당에 저녁 먹으러 가면, 내 아들딸들은 식사하고 그냥 나와도 나는 서빙해준 직원에게 인사해요. ‘늦도록 수고해줘서 좋은 시간을 가졌다,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오거든요.
손주들이 그래요. ‘아빠, 엄마는 그대로 나가는데 할아버지는 꼭 가서 인사한다, 우리 할아버지 참 좋은 점이 있다.’
그런 모범이라도 보여야 될 것 같아요. ‘인생을 사는 데 성공했는가’ 물어보면 실패한 것 같진 않아요. 지금도 후배들을 만나니까요.
늙으면 꼭 두 가지가 필요해요. 일과 친구예요. 일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아요. 불행해요. 그리고 고독하지 않게 살아야 해요. 나이 들었다고 어디 요양시설에 가 있는 것보다는 젊은 사람도 있고 늙은 사람도 있는 곳에서 어울려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김일성과 아침 식사하며
‘아, 공산주의자구나’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북한 김일성과의 인연이다. 김일성이 태어났을 때 그 어머니가 젖이 안 나왔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의 외숙모가 3개월 동안 그에게 젖을 먹여 키웠어요. 그 할머니와 김일성 어머니는 같은 강씨에 같은 마을 출신이었거든요. 비슷한 시기에 친정에서 출산했고요. 나중에 그 할머니의 아들 3명 중 2명이 북한 공산당에 의해 죽었어요. 할머니가 ‘그놈(김일성) 젖 먹일 때 코를 콱 막아 죽였어야 했다’고 말했어요.”
청년이 된 두 사람은 만나 대화를 나눴다.
“김성주가 김일성 되기 두 달 전쯤 고향에 왔어요. 여러 사람이 같이 조반을 먹었는데 나도 같이 먹었어요. 김일성에게 물었어요. ‘해방이 되고 자유로운 독립을 하게 되겠는데 제일 중요한 일이 뭐라고 생각하냐.’ 김일성은 ‘첫째는 친일파 숙청, 둘째는 토지 국유화, 셋째는 지주 자본가 추방’ 이렇게 대여섯 가지를 죽 얘기하더라고요. 그때 ‘아, 저 사람이 공산당이로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일제 시대에 공산주의자들이 압박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공산주의자가 첫째로 주장하는 게 일본 왕실 폐지였거든요. 해방 후 북한은 ‘우리는 친일파를 완전히 숙청했기 때문에 순수한 민족 국가다.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그대로 뒀기 때문에 민족의 정통성이 없다’ 이렇게 말했죠. 그런데 좌파들이 기회만 있으면 친일파 몰이를 하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친일파 명단도 만들었죠.
“과거 때문에 미래를 잃어버리는 건 어리석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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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기독교 신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
예를 들면 인촌 김성수 선생도 친일파라고 하잖아요? 만약 일제 강점기에 인촌이나 이화여대 김활란 박사 같은 분들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독립을 못 했다는 거예요. 그때 그분들이 교육을 쌓았으니 독립했지요. 친일파니 너는 매국노다, 그건 아니란 말이지요.
또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예요. 서울대 음대에 김성태 선생이 계셨어요. 그분이 100세를 살았거든요. 100세 생일에 제자들이 축하하러 모여들었어요. 축하를 받다가 기자들이 오니 그분이 갑자기 뛰어갔어요. ‘나 친일파에서 빠졌어’ 그랬다고요.
기자들이 ‘무슨 말씀이세요?’ 그랬더니, 그가 ‘나 친일파 명단에 들어 있었는데 젊을 때 항일운동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갖다줬더니 나 빼줬어’ 했어요.
인간의 존엄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한 일을 그대로 알려주면, 선택은 역사가 하는 거예요. 지난번에 대법원이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문제가 없다, 상영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거든요. 그건 대법관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니에요. 대법관이, 대법원장이 누구한테 권한을 받아서 해라 마라 하느냐는 거예요. 이념 때문에 양심을 파는 거지요.
안익태 선생이 숭실 출신이거든요. 일본서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지휘를 했어요. 친일파로 낙인찍혔지요. 최승희 있잖아요. 정말 훌륭한 무용가예요. 북으로 갔잖아요. 안익태는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로 만들고, 최승희는 이북에서 김일성이랑 같이 있으니까 친일파로 언급을 안 했지요. 정치 때문에 인권을 이용하는 거예요.”
황장엽
― 황장엽 선생도 몇 번 만나셨지요.
“어떻게 연결이 돼서 세 번 만났어요. 나보고 언제 월남했냐고 물어요. 1947년에 탈북했다고 했어요. ‘김 선생은 선견지명이 있어 이렇게 일찍 와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았는데 나는 그걸 못 해서 인생을 의미 없이 끝내게 됐다.’
북한에서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고 존경도 받았는데 그분 생각은 달랐던 거예요. 내 인생을 완전히 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북한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영양부족이라고, 어릴 때부터 영양부족 상태로 크면 성인이 되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할 텐데 너무 딱하다고 하셨어요. 그 얘길 듣고 이런 생각을 혼자 했어요. 북한 동포를 책임지는 것이 우리 정부의 책임이지, 북한 정권과 하나가 되고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건 잘못이지요.
개인적으로 참 성실한 분이었어요. 당신의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려고 많이 노력했죠. 김대중 전 대통령 때 만났는데 활동에 몹시 제약을 받데요. ‘미국 같은 데 좀 다녀올 수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냐’ 그런 얘기를 건넸더니 내가 예측한 대로 답하더라고요. ‘YS(김영삼) 때는 가능했는데 이제는 안 될 것 같다.’”
토론사회와 대화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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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가구를 주워다 사용한 얘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
“긴 역사를 보면 3단계예요 영국이나 미국, 호주, 뉴질랜드 이런 앵글로색슨 사회, 영어문화권에선 옛날부터 경험주의 사회였어요. 경험해보고 개선하고, 해보고 개선하니까 항상 대화를 하게 되죠. 내 생각과 네 생각을 나누어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더 좋은 걸 찾는 게 대화예요.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사회가 경험주의 사회예요.
그중 가장 성공한 사회가 미국이에요. 실용주의 철학을 적용해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꿨지요. ‘모든 교육은 대화를 통해 한다.’ 미국에서 초등학생 교육 하는 것을 보면 두 가지는 철저해요. 첫째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 둘째는 남 욕하지 마라. 그건 어렸을 때 키워주거든요.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대륙 국가들은 대화보다는 토론을 해요. 국회에서도 토론해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걸 따라가는 토론사회예요. 170년 전에 공산주의 사회가 생길 때는 투쟁하는 단계예요. 싸워서 이기는 단계예요. 자본주의의 단점이라며 계급투쟁하잖아요. 예를 들면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잖아요. 될 수 있으면 약을 먹여 치료하고, 안 되면 주사를 놓고, 정 안 되면 수술을 해요. 약 쓰는 단계도 주사 맞는 단계도 건너뛰고 전신을 수술부터 해대면 사람이 죽죠. 수술부터 하자는 게 투쟁이에요. 경험주의 사회는 약을 줘서 안 되면 주사를 맞고, 그게 안 되면 수술하자고 해요.
토론사회는 대화사회로 흡수됐어요. 독일도 교육은 이제 미국식 대화 교육이거든요. 대화하는 사회와 투쟁하는 사회가 남은 거예요. 미국식 교육을 받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화하면 되거든요. 좌파, 공산주의 사람들은 투쟁해서 이기면 정의가 되죠.
노사관계도 미국이나 영국에선 대화로 해결하는데 우리는 투쟁해서 이겨야 된다고 하죠. 불행하게도 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시기에 투쟁이 더 심해졌죠. 지금 청와대에 있는 운동권 출신들은 투쟁하는 것밖엔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최장집 교수가 요전에 ‘운동권 민주주의’라고 얘기했잖아요.
투쟁하는 단계는 역사적으로 끝난 지 오래됐어요.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몇 해 계속하니 사회 질서가 전부 무너지지 않았어요?
“청와대 사람들, 도덕과 윤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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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교수 시절 축구경기에 출전한 김 교수. 사진=양구인문학박물관 |
미안하지만 청와대 사람들 얘기하는 거 가만히 들어보면 도덕과 윤리는 없거든요. 권력만 행사하면 된다고 보는 거죠.”
100년을 살아온 철학자는 다시 올 100년을 이야기했다.
“우리 민족을 위해 제가 바라는 건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100년쯤 지나면 러시아나 중국 같은 체제는 끝나고, 미국·캐나다·유럽 같은 나라로 바뀔 테니까요 그 방향으로 가면 좋겠어요. 자꾸 정권 유지에만 집착하면 중공(중국)같이 되는 거예요. 그건 안 되죠.
두 번째는 한글 문화권을 그때까지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자유중국(대만)에 원래 원주민들이 많았는데요, 그 사람들이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었거든요. 문자가 없으니 지금 말도 없어요. 중국 문화권에 포함됐어요. 스위스가 세계에서 문화 혜택은 가장 많이 받은 축인데, 스위스 문화권이란 건 없거든요. 우리도 그렇게 될 뻔했는데 한글을 만들어 우리 문화권이 생겼어요. 중국 문화권, 일본 문화권과 더불어 한글 문화권을 100년 후엔 만드는 거.
그 두 가지는 꼭 해야 할 것으로 봐요. 그러려면 독서하는 민족이 돼야 해요. 고전 읽는 사회를 만들어야 해요. 인문학이 자꾸 버림받고 있는데 인문학이 허약하면 한글 문화가 못 생겨요. 100년 후엔 결실을 맺어야 할 텐데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해요.”
‘독서하는 민족’
결국 다시 책이다. 독서하는 민족이라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젊을 때는 문학 책을 읽으면 좋겠어요. 정서적인 풍부성을 일생 동안 간직할 수 있어요. 중·고등학생 때는 존경하고 싶은 사람의 전기를 읽으면 좋겠어요. 미국에선 중학교 2학년쯤이 되면 ‘이번 학기엔 이 책 5권 중 3권은 꼭 읽어라’고 선생이 권해줘요. 거기엔 벤자민 프랭클린,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카네기 같은 미국을 형성한 이들의 전기가 들어 있어요. 우리 교육도 그렇게 되어야 해요. 고등학교 졸업반쯤 되면 고전문학을 읽고 졸업 후엔 고전을 읽으면 좋고요.
어느덧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다. 그의 서재를 떠나서 안병욱 교수의 서재를 지나 ‘철학의 집’ 밖으로 나왔다. 안 교수의 묘비석이 저만치 보였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든 후 차에 몸을 실었다.⊙
97세 철학자 김형석, 생의 한가운데
한국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1920년생이다. 10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정정한 목소리로 강연하고 있는 현역의 그를 만나본다.
Program : 내 인생 결정적 순간
Date : 2016-05-23
Author : SERICEO 콘텐츠팀
#1
1920년
평양시 대동군 송산리 그의 고향은 만경대 뒷마을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에 다니는 게 좋을까?'
'학교를 못 가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게 옳을까?'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선택의 기로
평양숭실중학을 자퇴한 소년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아우구스니누스, 키에르케고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까지
일찌감치 정해져버린 '철학자'의 숙명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또 다시 선택을 강요했다
일본 유학 중이던 스물네 살, 강제 징집의 위기
'학도병 모집을 거부하고 구속될 것인가?
운명에 순응할 것인가?'
#2
내 일생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제일 짧은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아버지'하고 찾으니까요
눈물만 자꾸 나지 더 기도 드릴 게 없어요
내가 이렇게 어려운 때 친구들 보는 게 참 마음 아팠거든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니까 도무지 갈 길이 없잖아요
#3
1920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도산 안창호의 마지막 강연을 듣고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한
살아 있는 근현대사 역사책 철학자 김 형 석
김형석
- 1920년 출생
학력
-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 학사
경력
- 1947 중앙중학교 교사
- 1950 중앙고등학교 교감
- 1954~1985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 1961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구교수
-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4
내가 해방을 이북에서 맞이하고요
38선을 넘어서 서울로 왔는데
1947년 8월 18일인데요
아내가 어린 애기를 업고 나는 이제 38선을 넘으려고
해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고 했어요
극적으로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한 이북이 공산주의 세상으로 바뀌면서
스물일곱 청년은 부인과 8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5
오전 아마 10시 반 11시쯤 됐는데
보안서원이라고 그려죠 북한에서는
보안서원에게 그만 들켰다고요
그래서 검문하는 데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전화가 따릉따릉 자꾸 울리니까
계장이 '누구 전화 받을 사람 없어? 전화 받아'
그러다가 없으니까 자기가 받으러 갔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쪽 전화(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요
지금 평양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너무 많이 잡히기 때문에
이제부터 잡히는 놈들은 전부 북쪽으로 돌려보내라고
'어디로 가세요?' 그래서 영천인가 그 바닷가 쪽으로 간다고 그랬더니
누구 한 사람을 부른대요 부르더니 밖에 부인이 있으니까
어린애랑 같이 데리고서 버스 정거장까지 가서 버스 떠나는 거 볼 때까지 감시하라고
#6
운영하던 작은 중학교 이사장이 어린가로 끌려가 행방불명되고
'다음은 내 차례'라는 사실을 직감한 후 월남을 결심했던 그에게
운명은 이토록 극적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안내 받아가지고 버스 정거장까지 가는데
내가 틀림없이 갈 테니까 기다리시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그 사람 따돌리고 나는 이제 아내하고 버스 정거장에 내려서
그 기분은 잘 모를 거예요
그 전날 밤 꿈에도 좀 꿈도 이상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나 혼자 속으로
지옥에서 풀려나온다고 하는 게 바로 이런 때로구나
#7
목숨을 걸고 넘은 38선
지옥에서 풀려난 그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중앙고등학교에 몇 해 있다가
6.25전쟁을 맞이했는데
제자들이 참 좋았고요
그 제자들 참 사랑했어요
며칠 전에도 청주에 갔는데
오세탁이라는 제자가 있는데
고등학교 때 만났으니까
나보다 10년 아래 같아요
그 친구는 매해 스승의 날하고 정월 초하루 날은 나한테 인사 전화를 거는 거예요
이 친구가 어떻게 귀가 나보다 더 어두워졌어요
자기는 17살 때 나를 만나고
나는 27살 때 선생이 되었는데
70년 동안 잊지를 못해서 그런 제자들을 여럿 키웠으니까
#8
운명은 짓궂게도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그를
고등학교가 아닌 대학교에 보내
'학자'의 길을 걷게 만들었고
그는 31년간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만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언제나
'머묾'이 아닌 '도전'을 선택했다
#9
그때 '이제 나도 정년되었으니까 쉬자' 했으면 쉬었을 텐데
연세대학교 있은 해가 31년이고요
나와서 지금 일하는 게 또 31년이거든요
그러니까 60년이죠
그럼 참 행복한 것 같아요
#10
정년퇴임 후에도 여전히 강연을 하고
매일 원고지 40장씩 집필하며
잠시도 지적활동을 멈추지 않는 老교수
지팡이, 보청기, 틀니 하나 없이
허리도 꼿꼿하고 음성도 또렷한 그이지만
'늙는다'는 생각, '나이 먹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11
안 그러던 친구가 오랜간만에 만나면 지팡이 짚거든요
오래 짚으면 2년, 3년 짚고서는
그 다음에 휠체어 탄다고요
그 다음에 또 한 2, 3년 지나서 신문 보면 세상 떠났다고 그러거든요
지금 나는 누가 더 건강하냐고 물어보면요
누가 병원에 안 가느냐 그건 아니고요
누가 일을 더 많이 하느냐
지금 내가 제일 일을 많이 하니까 제일 건강한 것 같아요
신체적으로 나는 아주 열등했거든요
그런데 인간적인 에너지라고 할까요?
사명의식 비슷한 것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을 사랑해요
#12
오욕과 질곡이 교차했던 풍랑의 세월을 살아내며
그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노구의 철학자
시대의 멘토, 철학자 김형석의
인생 마지막 바람은 ...
#13
내 인생에도 이제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은 하는데
죽음이 두렵다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보다는
남은 시간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남은 시간까지 내가 채워야 할 일이 뭔가
유종의 미라고 할까요
그게 뭘까 하는 생각이 더 많지
죽으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은...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은 그래요
내 인생에도 끝이 오긴 왔는데
그래도 나 때문에 몇 사람이 더 행복해지고
몇 사람이 더 희망을 가지고
내 제자 가운데 한 두 사람이라도
인간답게 사는 데 도움을 줄 수만 있으면
그거 도와주는 거
이제 남은 건 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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